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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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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Wed, 04 Nov 2026 05:41:3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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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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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밑지층과 웃지층: 겉지층과 곁지층- “윤구병 철학: 함께 이야기하기”</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5d21c2af6190acf71ef41e389f6166db06c128f5.jpg" class="fr-fic fr-dib"><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9649d1fc0ab9ba07c0621ccc15bde22342748fdf.jpg" class="fr-fic fr-dib"><br>밑지층과 웃지층: 겉지층과 곁지층<br><br>- &ldquo;윤구병 철학: 함께 이야기하기&rdquo;, 2026 10 31, 정암학당<br><br>*<br><br>&nbsp; 윤구병의 철학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열렸다. 우리 철학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어쩌면 우리 시대에 우리 방법으로 철학하기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다. 제시하는 만큼이나 내용과 방법이 다양하게 분출되는 분위기였다. 형님은 글에서도 선승과 같은 말씀이 종종 있었다. 발표자들과 형님의 질의응답은 마치 선문답 같았다. 그러면서 선문답의 주제라 할 &lsquo;이뭣꼬?&rsquo;라는 물음에 대해 다루는 방법 또는 찾아가는 공통적 방향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 되었다. 방향 설정은 형님의 저술 순서이기도 하고 사유의 전개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즉 존재론, 형이상학, 우주론으로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br><br>&nbsp; 방법으로는 우선 &ldquo;있음&rdquo;으로부터 다루는 데 우리 입말을 통해서 할 수 있다고 하고, 이런 입말로부터라는 점에 대해 대부분의 동의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있음을 통한 세상의 질서 또는 배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은 논리학보다 앞서는 논리(또는 이법)가 먼저 있다고 하고, 그 논리의 전개를 형님은 저술에서 입말을 통해 36가지로 전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의 항목과 삼단논법이나 칸트의 범주와 판단과 달리할 수 있는 우리 입말의 논리 가능성을 열었다고 본다. 이런 흥미있고 생성적인 우리 언어에서 논리의 전개 방식을 공간에서 그리고 시간에서, 그리고 공간과 시간을 겹쳐서, 미래와 의지(욕망)의 발현에 이르기까지 전개하였다. 서양에서 지성(이성)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체계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입말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 지성(이성)의 규준을 수용하여 우리의 문자화도 가능하다고 보는 방식인 것 같다. 이런 방법은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나 불교 선문답의 분수화(유식철학처럼)에서 대립과 반대, 대응과 평행, 대칭과 변환을 아마도 형님이 자유롭게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br><br>&nbsp; 형님은,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일 신학론, 우주론은 데카르트에서 분석학과 산술학의 결합 방식의 발전을 따라가면서 뉴턴의 중력장, 오일러의 상수, 아인슈타인에서 상대성 공식, 슈뢰딩거의 양자장론으로 발전하는 우주의 장(영역)을 다루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 또는 원인으로부터 (연역적?) 추리를 하는 지성의 방법으로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로 나갈 방향 또는 방식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논의에서 형님의 저술에서 보여준 미래에 대한 즐거운 놀이로서 삶의 영토에서 당파성이 나올까?<br><br>&nbsp; &lsquo;함께 이야기하기&rsquo;의 대화공간에서, 논평자들 중 일곱은 인식론을 바탕으로 두고 존재론-형이상학-우주론으로 가능 방향으로 이해하고 대화의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물론 흥미있게도 김성환은 과학 인식론적 관점에서 영화 예술론으로 연결성을 물었는데, 이는 이미 인식론의 진리론이 도덕론, 예술론(미학), 음덕론(종교론)과는 층위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상식적으로 도덕론, 종교론, 예술론도 그 분야의 지식을 많이(질적으로?)이 갖출 때 더 잘 이해하고 이용한다고 한다. 분화의 논의 앞서서 나로서는 사유의 기원 또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존재론보다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br><br>&nbsp; 인류의 삶에서 &lsquo;있다와 없다&rsquo;보다 &lsquo;이다와 아니다&rsquo;가 먼저라고 하는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인류가 정체성을 다루면서, 주체성으로 다룬 것과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말은 인간이 무엇인가(정체성)는 자연과 연관이고, 인간이 누구인가(주체성)는 어쩌면 그리스 시대의 논리를 갖추기 시작한 지성(로고스)로부터 인간과 대상의 구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ldquo;이다&rdquo;가 대상의 일반화에 가까운데, 그리스 시대에 &ldquo;이다&rdquo;는 항목 또는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지적 체계를 세울 수 있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 인간의 실천에서 그 개인 또는 인류의 정체성을 보아야(느껴야) 한다는 쪽이 있었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렐레스에서 전자의 길을 갔다면, 소크라테스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길은 후자의 길이라고들 한다.<br><br>&nbsp; 한글학회 주시경의 제자였던 최현배는 우리 언어에서 &lsquo;이다-아니다&rsquo;를 지시사로, &lsquo;있다 없다&rsquo;른 존재사로 구별하자고 했었다. 미군정이 서양 8품사론 체계론에 몰아넣어서, 서양 근대언어의 계사와 현존을 함께 쓰는 etre, be, sein가 있고, 이보다 앞선 시대의 용어인 esse와 einai로 이어지는 길에서 주어와 술어의 분화(이중화, 분열)에 근거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혼동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다음 또는 아제에서 &lsquo;할 것이다, 하리다&rsquo;라는 의미에서도, 이 입말에는 미래, 조건, 의욕, 예측, 상상 등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발설에 대해 선승은 &lsquo;할&rsquo;[일갈]했다고 하는데, 그 발설자의 방향의 오류에 대해 지적인지, 방향의 일방성(일관성)에 대해 조심하라인지, 예측과 의욕의 앞세우는 데 대한 경계인지 등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내가 보기에 선승의 일갈을 학문적으로 진위를 구별할 수 없지만, 삶에서 인습에 젖거나, 이익에만 고집하거나, 또는 누구의 편만을 들거나 하는 것을 교정 또는 조율하는 방편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br><br>&nbsp;<br><br>윤구병철학, 함께 이야기 하기(2026, 10, 31)<br><br>1부에서 김혜경. 강성훈, 유형수, 이정우 순서였고<br><br>2부에서 긴성환, 최종적, 류종렬, 이병창 순이었다.<br><br>&nbsp;그리고 이정호의 논평은 발표하지 않았으나, 전 과정에서 사회를 보면서 충분히 그의 견해를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님의 &lsquo;할&rsquo;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과 설명을 보탰다. &ldquo;함께 이야기&rdquo;의 중요 흐름은 우리말로 철학하기 였고 그 가능성을 넘어서 현실성이 있다고 참석자들은 느낀 듯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일관성있게 네권의 저술을 발전적 또는 확장적으로 쓴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2003)』,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2013)』, 『꿈꾸는 형이상학(2020)』, 『우주의 역사(2024)』<br><br>*<br><br>&nbsp; 나로서는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최종덕의 양자장을 설명하면서 오일러 상수와 양자장의 연관을 잘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다. 여러 유투브에 나오는 해설들을 보았는데, 그의 설명이 갑자기 와 닿았다. 그는 오일러 등식 ei&pi;+1=0과 양자장함수의 상수(상항)&psi;를 설명하였다. 오일러의 등식에서 수(數)가 양자장의 상태(위상)를 설명해주는 부분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념론은 관념들 중에 사물과 대응이 된다고 여겨 신실재론으로 여긴 것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이었다.<br><br>&nbsp; 이런 논의는 18세기에 오일러의 로그(log2)의 산술화로부터 많은 오일러 등식의 여러 종류들이 성립함을 알렸다. - 이것을 알면 신의 현존을 믿을 밖에 없다고 한 오일러는 디드로가 이것을 모르기에 무신론자라고 비꼬았다. - 그리고 다음 세기에 1830년대 열역학, 파동론, 전자기학 등에서 사물들의 상태를 표시하는 상수(상항)의 영역 안에서 에너지, 자기력, 전자력 등을 표시하는 방식은 방정식이라기보다 함수로 표시하면서, 대수학이 산술학의 연산규칙을 넘어서는 연산, 당시는 연결(connexion)이란 용어를 쓰는데, 행렬의 방식이 나오면, 함수 방정식의 요소들은 수와는 다른 단위들이 있다고들 한다.<br><br>&nbsp; 흥미로운 점은 수를 기반으로 하는 논리(추리)가 함수에서 다른 차원(승수)과는 다른 영역(장)을 다룸에도 논리하고 한다. 그래서 논리학(la logique)과 구별하여 논리계산(la logistique, 기호논리학)이라 한다. 이에 논리라는 방식의 기반이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으로 정의과 공리에 대해 새로이 검증하면서, 논리학이 추리의 기원으로서 선전제를 증거(증명)없이 이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보가드로 수, 볼츠만 상항, 플랑크 상항 등을 제시하는 대수함수론이 사물들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상항은 산술학의 상수와 다르다. 그럼에도 오일러 등식의 역할이 대수함수에도 적용(응용)되면서, 수학자들은 수학의 확장으로 물리적 상항에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상항은 증명하는 수학적 상수와 달리,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런 상항이 이루어지는 모습 또는 변형과정에서 조화로운 상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순수 수학의 논리에서는 이런 조화로운 상항들이 개연성 또는 일정한 조건과 영역 안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아, 수학적 적용(응용)이지, 산술학의 논리성과 달리 대수학의 논리성이라 하며, 이 두 논리의 차이가 산술적 4칙연상에 보태어 변환(치환) 연산을 덧보탰다고 한다. 즉 산술적 상수의 확대 적용에는 위상, 속도, 시간 등의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여 물질의 실재성의 일부를 다룬다고 한다. 나로서 수적 상수와 물리적 상항 사이에 근친성이 있다고 본다. (수학적 기호로 = 라기보다 ≃일 것이다)<br><br>&nbsp; 이런 수적 체계의 정합성이 물리적 세계의 일관성(항상성)에 적용이 가능하고, 또 수학적 의미에서 상수와 같은 상항을 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생물의 내분비의 상항을, 마치 동물들의 상온을 설명할 수 있듯,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듯이, 생물로서 인간의 활동과 사유방식도 상항을 형성할 수 있다고 유추하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나누기보다 복잡한 분수들과 곱하기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다차 승수로 다루는 방식은 산술학의 범위와 기하학의 범위로 한계(limite) 지울 수도, 그리고 정의할(definit)수 있는 영역과는 다른 영역이 인간의 유기화에서도 사회의 조직화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학의 우월성을 믿는 쪽은 인간이란 생명체를 다룸에서 물질의 상항을 다루듯이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쪽이 과학주의로서 논리실증주의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식 상태를 뇌의 분비물의 이동을 상항(상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좌초하듯이, 사회 공동체의 정립에서도 수적이든 함수로든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부분이 더 많다. 많은 수학자들은 생산과 소비의 경제적 관계를 함수로 또한 인간의 욕망과 새로운 창안도 수학적 함수처럼 변형상항(대수상항의 확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다른 쪽의 수학자들은 그렇게 상항을 조성하는 것이 수와 물리의 구성과 구축과 다르다고 보았다. 이로서 생물학과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에서 사회학이 등장할 것이다.<br><br>&nbsp; 사회의 조직화가 왕정이든 국가든 조직화에서 국가예산과 집행을 수식화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 행정조직의 집행의 연관들을 여전히 수학과 물리학을 모방 수식처럼 다루었지만, 공동체의 평등과 안녕에 대해 답해주기보다 조직화에서 배치와 배열에 맞게 살아가라는 암묵적 통치가 지배하였다. 이런 조직화에서 인간이 자기의 완성(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품으면서, 공동체가 그림 이론처럼 사실들의 배치와 배열이라기보다, 삶의 터전에서 조성과 공감이 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공동체의 조직화에서 개인의 성향과 의도가 이런 제도로서 조직화와 다르고, 그 인격들은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의욕과 욕망의 실현의 방법을 달리 창안하고 나아가 혁명을 추동하고 있다는 점을 무의식으로 밀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br><br>&nbsp; 수적 정합성이, 물리적 법칙성과 동등하지 않지만, 적용가능의 국면에서 둘 사이에 어쩌면, 한 평면에서 겉지층과 곁지층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사회조직화와 심리공감대는 이 두 층위와는 다른 층위일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성을 지닌 논리적 진리를 우선으로 하는 이들은 수학과 물리학의 정립처럼 사회와 심리도 정립되리라고 보았다. 지금도 전자의 학문들이 철학에서 중심처럼 여기는 쪽이다. 이에 비해 사회와 심리(심성)의 영역은 전혀 다르다. 어쩌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의 선분의 4가지 분할 비유에서, 도형에서 이데아는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에 닮았고, 그림자에서 사물이라는 관계 심성과 터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플라톤 이후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앞의 두 분할이 수와 원자로서 설명하려고 했다면, 후자의 두 분할을 원주 위의 점과 현의 점 위의 소리와 같다고 여겼다. 중세 내내 4학을 다루면서 산술학과 기하학, 그리고 천문학과 음악을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중세는 이런 구별들 당연히 퓌타고라스와 에우클리데스의 정의과 공리를 잘 이용하여 적용하면 천문학도 음악도 다룰 수 있다고 여겼다. 근세에는 이런 적용과 방법을 대수를 받아들인 데카르트가 분석기하학을 방법으로 제시했다. 스피노자를 거쳐서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런 방향의 인식이, 지성이든 절대지이든 인간사회에도 그리고 의식에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다.<br><br>&nbsp; 플라톤의 4분할 선분의 비유도 설명하는 방식이 여럿이다. 좀 전처럼 상위 둘과 하위 둘을 달리 보는 경우, 하위에서 상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귀납법과 유사)에 경우, 상위에서 하위로 내려가는 경우(연역법과 유사)가 있는가 하면, 근대 대수함수론의 이후로 학문의 성립에서는 각 선분들(이데아, 도형, 물체, 그림자)의 각 학문들이 성립 또는 형성하는 방식으로 보아 여러 학문들의 형성방식들을 설명하기도 한다. 각각의 선분을 바탕 또는 자료로서 사용하기도 한다. 인식론 즉 지식론이라는 면에서, 예를 들어 선분의 아래에 있는 그림자에 해당하는 쪽이 새로운 지식론으로서 영혼론과 심리학인 셈이다.<br><br>&nbsp; 이와 달리, 『티마이오스』편에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발생론(또는 우주론)을 생각하면서, 지성의 창조론에는 신적 창조와는 다른 의미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불변의 이데아(페라스)를 통해 움직이는 물질(아페이론)을 조작하여 만드는 방법도 제시될 수 있다. 여기서도 학문들 각각의 발달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 아페이론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어쩌면 벩송의 관점에서, 박홍규선생님의 관심사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내가 들었던 &lsquo;영혼&rsquo;에 관한 설명은 이런 단면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아페이론(자연)의 자발성을 설명하는 예는 생물 진화론에서부터일 것이다. 아마도 선생님은 자연이 자발성을 갖는 쪽에서 우주발생론으로 읽었을 것 같다.<br><br>&nbsp; 우주 발생론으로 읽으면 덩어리가 먼저이고 그리고 단위가 설정되는 쪽이 생명체들들이 나오고, 그 생명체들은 자연의 총생산에 맞추어 조화롭게 인간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뷔퐁에서 라마르크로 이어지는 생명체의 노력에 있다고 한다. 물질과학에서도 중력개념 이전에 갈릴레이가 물체 속에 힘을 &lsquo;충력&rsquo;이 있다고고 생각했듯이, 벩송은 생명체의 증가는 노력을 &lsquo;에는&rsquo;이라 보았다. 이런 견해를 벩송은 진화의 과정을 독특하게 요약했다.<br><br>&nbsp; 의식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ldquo;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rdquo;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 1911)｣(ES, 1장)에 나오는데 1911년 강연에서이다. 벩송은 이 강연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과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리고 사회의 조직화를 설명하기 이전에,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1932)』에서도 다시 이 변환 과정을 먼저 설명했다. 그런데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1980)』, ｢3장, 기원전 1만년: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은 벩송의 &ldquo;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rdquo;에서 &ldquo;사실들&rdquo; 대신에 &ldquo;지층들&rdquo;로 바꾸고, 생명 진화로서 생명의 변환과 변형과정을 변조(la modulation)의 과정처럼 서술했다. 그 두 흐름의 방향과 내용은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물을 다루는 방법으로 구성과 구축의 관계 방식을 통한 시뮬라크르를 이용하였고, 그 다음으로 내재의식을 다루는 방식으로서 조성과 조율의 연관방식(수학에서 고차 함수의 변환들처럼)을 통한 변조(la modulation)를 이용한 것 같다.<br><br>&nbsp; 『티마이오스』편을 갈릴레이가 종교재판 받고 난 뒤, 말년 10여년을 『티마이오스』편을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선생님도 『티마이오스』편을 당신의 독백으로 열 번을 넘게 읽었다고 하셨고, 유독히 이 책 만은 거의 낱장이 될 정도이며, 각 쪽에는 잘 읽을 수 없는 주들이 꽉 차있다. 그럼에도 해석은 분분하다. 이데아로부터 아페이론을 설명하는 방식과 아페이론에서 이데아로 설명하는 방식에서 전자를 플라톤주의, 후자를 플라톤 고유성이라고 설명하는 후대의 수학자들은, 전자에서 비례중항을 찾는 노력을 했다고 하고, 전자에서 조화중항을 탐색했다고 한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사회학의 발달 시기에도 나오는데 전자에서는 교환에서 후자에서는 분배에서 찾는다(수학사에서는 수의 성립에서 다루는데 그리스 사유 이전에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프랑스에서 경제학의 발전시기에 총생산량의 분배를 중시하여 중농주의를, 영국에서 상품의 거래에서 중상주의를 중심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사회변혁기에 정치경제학은 중상주의하에서, 상부와 하부의 불평등의 심화에서 형님이 주장하듯이 당파성을 지녀야 한다고 하듯이, 아페이론으로부터 페라스가 조율되는 것이지 페라스에서 아페이론을 규정하는 쪽이 아닐 것 같다. - 선생님 수업중에 진위결정 우위로서 학문을 하는 쪽은, 맞는 쪽이 맞지 아니하는 쪽을 정복함으로써, 이익을 챙기기에 전쟁을 할 위험이 크다고 하셨다. 나로서는 교환을 중심으로 비례중항을 하는 쪽이 제국주의 이래로 전쟁을 걸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싶고, 조화중항을 추구하는 쪽은 전 지구가 함께 살아가자는 고민을 한다고 생각한다. - 유엔의 세계인권 선언은 사회주의자들의 협의의 산물이라고 한다.<br><br>&nbsp; 변역(變易)을 말하는 쪽은 상층에서 심층으로 질서와 명령을 통하여 배치와 배열을 하면서, 심층에서 저항을 무화 또는 배제자로 만든다. 그런데 심층에서 발현으로, 사회라는 표면에 다양한 방식들(학문들도 마찬가지)과 수리과 물리로서는 적용이 잘 아니 되는 도덕론, 예술론, 음덕론(은총론)을 중요시하는 쪽은 상층의 저항(기존지배)을 뚫고 나오는 쪽을 반역처럼 생각하지만, 우주발생론으로 보아 심층의 발현이, 인민의 저항이 정역인 셈이다.<br><br>&nbsp; 이날 발표자들과 형님의 일갈들은 우리말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도반들과 선승의 대화처럼 느꼈다. 한철연에서 느낀 것인데, 그럼에도 나로서 규성형도 민중을 기반으로 분출하는 새로운 사회를 바랐듯이 형님도 심층 또는 생명이 먼저라고 하면서 인민의 발현을 정역으로 보는 것 같다. 더하여 나에게는 벩송이 정체성의 실현을 위한 &lsquo;다음측정&rsquo;의 방향이 될 두 철학자(형과 형님)는 수학과 물리학의 통일성까지는 아니라도 그 두 학문을 기반으로 설명하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낀다. 나로서 그날 발표장에서 나의 발표문을 읽지는 못했지만, 형이상학이든 철학이든, 지성의 도식 또는 체계보다, 자연에서 힘, 충력, 에너지, 엘랑의 발현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것이 먼저라고 보고 싶었다. 다른 한편 서양의 문법구조가 아닌 우리 입말로서 &lsquo;이다-아니다&rsquo;, &lsquo;있다-없다&rsquo;를 넘어서 &lsquo;있으라, 있으리라&rsquo;는 것을 생각한다. (이에 대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언어가 항목의 연산인 시뮬라시옹이라기 보다, 기호의 연결로서 시뮬레이션이라고 보고, 전자의 파라독사 생산과 달리 의미(기호, 마치 물리적 상항처럼)의 생산 방식에 빗대어 입말의 전개를 다음에 쓰고 싶다.<br><br>&nbsp; 이날 최종덕이 일상적이 아닌 젊은이의 용어를 들어 내면서 분위기를 바꾼 것은, 들뢰즈가 루이스 케롤의 글을 인용하면서, 꼬마 엘리스를 말투를 인용한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제는 학습하는 과정에서 벗, 동료와 동지를 사랑하는 길 위에서 8천만의 입말과 더불어, 합의(convention)와 평결(sententiaire)을 통해, 다음 공화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리라. (5:18, 59VKA) (6:02, 59VKAA)<br><br>&nbsp;<br><br>&nbsp;<br><br>***<br>비판과 충고 그리고 조언을 주실 분은<br>https://cafe.daum.net/masilga/MIk2/87<br>여기에서 덧글이든 댓글을 쓸 수 있습니다.<br><br>**참조*<br>형이상학의 위상 (하나에서);<br>https://cafe.daum.net/milletune/S5wU/5<br>형이상학에 대한 단상들;<br>https://cafe.daum.net/milletune/S5wU/6<br>형이상학, 우주생성론 대 우주론;&nbsp;<br>https://cafe.daum.net/milletune/S5wU/7]]></description>
			<author>류종렬</author>
			<pubDate>Tue, 03 Nov 2026 22:25:0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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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편소설_칸첸중가_031_변복_대필 작가</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8a3ffb8c4ae99a66cd488ef623ecd26a4a97a6ba.jpeg" class="fr-fic fr-dib"><br>변복&nbsp;세 스님은 북인도 쿠시나가르_Kushinagar에서 석가모니 붓다&nbsp;8대 성지 순례를 끝냈다.&nbsp;한 스님은 쿠시나가르에 남고,&nbsp;한 스님은 첫 순례지였던 네팔의 룸비니로 갔다.&nbsp;무상 스님은 왔던 길을 되짚는 길을 택했다.&nbsp;&lsquo;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천신만고&rsquo;&nbsp;끝에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 외곽에 도착했을 때 무상 스님의 몰골은 말 그대로 걸사_乞士였다.&nbsp;며칠 쉬면서 빨래도 하려고 찾아 들어간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여행자들이 입다가 두고 간 옷가지 중에 더 입어도 될 만한 것들을 세탁하여 팔고 있었다.<br>&nbsp;첫날은 못 봤고,&nbsp;다음날은 무심하게 봤는데 셋째 날에는 꾀가 났다.&nbsp;게스트 하우스 로비에는 다리미질까지 해서 얌전하게 걸어둔 힌두풍의 새것 같은 옷가지들도 보였지만 스님은 세탁해서 대충 접어놓은 허름한 옷가지 중에서 골랐다.&nbsp;무릎을 가리는 정도의 펑펑한 반바지 두 개와 얇은 면으로 만든 헐렁한 긴팔 티셔츠 두 개였다.&nbsp;방에 들어와 누군지 모를 여행자가 입었던 옷을 입고 서서 금방 벗어 놓은 동방아(간편하게 입는 짧은 두루마기)와 적삼과 바지 등 먹물들인 겉옷들을 내려다보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nbsp;출국할 때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날아갈 듯 산뜻했던 먹물 옷들이 풀이 죽고 여기저기 닳아서 넝마처럼 보였다.&nbsp;아니,&nbsp;구렁이가 허물을 벗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게스트 하우스를 떠나 역으로 향하는 스님의 배낭 속에는 성지의 사원에서 예불하고 기도할 때 동방아 위에 둘렀던 가사_袈裟만 들어 있었다.&nbsp;그 가사는 비구니계와 함께 받은 진정한 의미의 승복이었다.변복_變服했을 뿐인데 천애 고아로 사바세계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nbsp;불안하고 무섭고 외로웠다.&nbsp;군중들이 후줄근한 곡물 자루처럼 앉고 눕고 서성이는 파트나 역전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nbsp;기가 질리고 숨이 막혀서 주저앉을 뻔했다.<br>&nbsp;5년 넘게 입었던 군복을 벗었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nbsp;국가가 부여하고 통제하며 보호하는 제복을 벗고 일반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알몸으로 기는 애벌레의 고통이 따랐다고 했다.&nbsp;밖에 나가기가 싫었다.&nbsp;무섭고 외로웠다.&nbsp;그래도 거기는 태어나서 자란 익숙한 땅이었다.&nbsp;전화만 걸면 달려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 곳이었다.&nbsp;파트나는 달랐다.&nbsp;인도 전역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범죄가 많은 비하르주의 수도가 파트나였다.&nbsp;또한 인구가 많은 도시였지만 아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가까스로 광장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스님은 중음신들을 연상시키는 군중들 속에서 동양인 여행자 넷을 발견했다.&nbsp;두 남자는 한국인이었고 두 여자는 일본인이었다.&nbsp;그들도 바라나시로 간다고 했다.&nbsp;순례 중에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지만 그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nbsp;그들 넷은 모두 바라나시가 초행이었지만 스님은 바라나시는 물론 거기서 가까운 사르나트까지 두 도반과 함께 한 순례를 통해 이미 경험한 곳이었다.진정한 의미의 만행은 파트나역에서 시작되었다.&nbsp;스님은 그들과 일행이 된 것만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nbsp;스님은 아는 소리를 삼가고 말을 아꼈다.&nbsp;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nbsp;사바세계의 희로애락을 듣는 일이 마치 어렸을 때 듣던 라디오 드라마처럼 경이로웠다.&nbsp;바라나시에 도착해서 잠시 같은 숙소에 머물다가 헤어질 때까지 그들 중 아무도 스님이 승려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nbsp;<br>대필 작가<br>&ldquo;반바지에 티셔츠,&nbsp;더벅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콜카타 하우라 역전 광장으로 걸어 나온 배낭여행자,&nbsp;그는 무상 스님이었다.&rdquo;내 일기장에 기록된 스님의 만행 이야기는 위와 같이 끝났는데,&nbsp;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끝 문장은 나의 상상이었음을 밝힌다.&nbsp;스님은 시킴_Sikkim에 가서도 말을 결코 길게 하지 않았다.&nbsp;&ldquo;그토록 단단하게 뭉쳐져 있던 도반들의 화합과 인내는 성지에서 깨지고 또 깨졌다.&nbsp;성지 순례 도중에도 물론 참회하고 또 참회했지만,&nbsp;순례를 마친 후에는 서로 주고 서로 받은 상처를 각자 다스리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rdquo;&nbsp;앞에서 소개한 저런 얘기도 실은 내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었음을 마저 밝힌다.&nbsp;저런 식의 추상적인 재구성이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지만,&nbsp;저런 방식으로 쓰는 버릇이 귀신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nbsp;그것은 마치 내가 술에 몹시 취해서 얼토당토않은 않은 거짓말을 꾸며내어 뇌까리는 버릇을 못 고치는 그것과도 같다.<br>&nbsp;페마네 뚱바집에서는 칸델라(압축식 석유등)가 토치램프_torch lamp&nbsp;같은 소리를 내며 백열등보다 훨씬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nbsp;스님의 성지 순례 얘기가 끝나자 나는 말했다.&nbsp;&ldquo;그래도 성지 순례를 마치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nbsp;아니,&nbsp;훌륭한 거죠.&rdquo;&ldquo;그럴까요?&rdquo;&ldquo;저도 몇 년 전에 셋이 떠났다가 혼자 귀국한 일이 있습니다.&nbsp;그때 우리는 티베트의 카일라스를 목표로 떠났는데 수속이 여의치 않아서 백두산으로 갔거든요.&nbsp;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rdquo;&ldquo;직업과 관련이 있는 여행이었나요?&rdquo;&ldquo;그런 셈이죠.&nbsp;셋 다 글 쓰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었으니까요.&rdquo;&ldquo;세 분 다 작가라는 말씀이군요?&rdquo;&ldquo;둘은 확실한 작가지만 저는 좀 어정쩡합니다.&nbsp;여성 잡지 기자 명함을 가진 대필 작가라고나 할까요?&nbsp;여성 잡지에 나오는&nbsp;&lsquo;육필 수기&rsquo;는 대부분 잡지 기자들이 취재원의 얘기를 듣고 재구성해서 쓴 겁니다.&nbsp;독자들의 특별한 흥미를 끌 수 있겠구나 싶은 사람을 일간지나 주간지 기사에서 찾는 데서 우리 일이 시작되었습니다.&nbsp;저는 일부러 서울에서 아주 먼 곳에 사는 사람만 찾았습니다.&nbsp;그렇게 멀리 한 번씩 바람 쐬는 게 좋았습니다.&nbsp;그러느라고 회사 출장을 전국으로 다녔습니다.&rdquo;&ldquo;전국으로요?&rdquo;&ldquo;네,&nbsp;전국으로요.&nbsp;부산의 어느 카바레 댄서의 얘기도 듣고,&nbsp;귀순한 남파 간첩 얘기도 듣고,&nbsp;아편 몇 개를 뒷마당에 심은 죄로 남편이 교도소에 수감되자 섬에 혼자 남은 부인 얘기도 듣고 그랬죠.&nbsp;저명인사의 부인이나 따님,&nbsp;연예인,&nbsp;종교인 등등 취재원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rdquo;&ldquo;그랬군요.&rdquo;&ldquo;한 달에 두세 꼭지씩 육필 수기를 쓰면서&nbsp;3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더니 진이 다 빠지더군요.&nbsp;그때가 여성 잡지 전성기여서 여성 잡지들이 자꾸 생겼습니다.&nbsp;그만두고 몇 달 쉬어도 창간하는 잡지사에서 일 좀 해 달라고 했죠.&nbsp;세 번째 직장부터는 데스크 직속으로 기자들이 제출한 수기를 읽고 교열 보는 일을 했습니다.&nbsp;그건 더 지겨운 일이었지요.&nbsp;한때는 대기업 홍보실에서 사보를 만들기도 했고요.&rdquo;<br>&nbsp;입이 말라서 뚱바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nbsp;스님도 나처럼 한 모금 길게 빨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좀 전처럼&nbsp;&ldquo;그러셨군요.&rdquo;라고 말한 후 내 눈을 바라보았다.&nbsp;스님은 내 얘기를 더 듣고 싶은 것 같았다.&nbsp;나도 말할 상대가 앞에 있는 게 기뻤다.<br>&nbsp;&ldquo;저도 실은 승려가 되고 싶었습니다.&nbsp;고등학교&nbsp;1학년 때는 승려가 되겠다고 가출했다가 잡혀 오기도 했고요.&nbsp;어찌어찌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아내가 있고 애도 있는 겁니다.&nbsp;식구들 밥벌이를 해야만 했죠.&ldquo;지금은?&rdquo;&ldquo;지금도 미련이 남아서 만행 다니는 스님들이 제일 부럽습니다.&rdquo;&ldquo;......&rdquo;&ldquo;뚱바 한 통씩 더 할까요?&rdquo;&ldquo;하세요.&nbsp;그런데 저는 그만할게요.&rdquo;&ldquo;아,&nbsp;그러시면 저도 그만하렵니다.&nbsp;칸델라를 켜놔서 실내 공기가 탁하네요.&nbsp;자,&nbsp;일어날까요?&rdquo;밖의 공기는 과연 맑았다.&nbsp;올 때보다 별들이 더 많이 보였다.&nbsp;숨을 쉬면 별빛이 심장을 스치는 듯했다.&nbsp;나오기를 잘했다 싶었다.&nbsp;스님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nbsp;그러나 미련이 남았다.&nbsp;뚱바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nbsp;하고 싶은 얘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nbsp;승려가 되겠다고 가출했던 이야기 말이다.<br>우리가 걸어오는 사이에 전기가 들어왔는지 알리멘트의 창문들이 빛을 뿜고 있었다.&nbsp;문을 열자,&nbsp;타파가 환한 얼굴로 반겼다.&nbsp;그는 다음 날 정오 무렵에 파업이 풀린다고 했다.&nbsp;그러나 갱톡으로 가는 버스 운행이 바로 재개될지는 미지수이니&nbsp;10인승 합승 지프를 이용하는 게 낫다면서 좌석을 예약하겠냐고 물었다.&nbsp;스님도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타파는 전화로 좌석 두 개를 예약하고서 아슬아슬했다고 말했다.&nbsp;우리가 예약한 좌석이 마지막 남은 두 좌석이었다고 했다.&nbsp;그리고&nbsp;12시&nbsp;10분까지 합승 지프가 우리를 태우러 올 거라고 했다.&nbsp;요금은 버스비의 두 배쯤이었다.&nbsp;스님은 타파와 나를 향해 합장한 후,&nbsp;나에게는&nbsp;&#39;내일 봐요&#39;라고 말하고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nbsp;혼자 남아서 타파에서 몇 가지 확인했다.&nbsp;합승 지프는 다르질링에서 갱톡까지 보통&nbsp;5시간이 걸린다고 했다.&nbsp;도중에 두어 번 카페에 들러서 차를 마실 시간이 있다고 했다.&nbsp;타파는 카페에 여성 승객용 화장실이 있는 카페라는 점을 강조했다.&nbsp;그제야 나는 스님은 화장실이 급해서 바로 방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방에 돌아와 고등학교 때 승려가 되겠다고 가출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금방 한 페이지가 다 찼다.&nbsp;스님과 뚱바를 마시며 떠드는 기분으로 썼기 때문일까?&nbsp;아마 그랬을 것이다.&nbsp;또 한 페이지가 차고,&nbsp;또 한 페이지가 차면서 기나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계속><br>#장편소설_칸첸중가_031_변복_대필작가&nbsp;<br>]]></description>
			<author>김홍성</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20:19:58 +0900</pubDate>
		</item>
		<item>
			<title>특성 없는 인간과 아직 오지 않은 삶의 가능성</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5</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fa82413e8b82b2b5fd60675f04f9aa9b180ff2c1.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264px;">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nbsp;인간에게는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nbsp;성격,&nbsp;능력,&nbsp;직업,&nbsp;계급,&nbsp;출신,&nbsp;민족,&nbsp;신념과 같은 것들이 한 사람을 설명하는 기준이 된다.&nbsp;우리는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nbsp;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대답하기 위해 이러한 특성들을 동원한다.&nbsp;사회 역시 개인을 특정한 특성에 따라 분류하고 평가한다.&nbsp;어떤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고,&nbsp;어떤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며,&nbsp;어떤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고,&nbsp;어떤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다.&nbsp;개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특성들을 통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nbsp;때로는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nbsp;그러나 로베르트 무질의&nbsp;『특성 없는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 이해에 의문을 제기한다.&nbsp;인간을 규정하는 특성들이 과연 그 사람의 본질을 설명하는가?&nbsp;우리가 한 인간을 특정한 특성으로 설명할 때,&nbsp;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nbsp;무질의 소설에서 특성 없는 인간이란 아무런 개성도 능력도 갖지 못한 인간을 뜻하지 않는다.&nbsp;주인공 울리히는 수학자이며,&nbsp;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갖춘 인물이다.&nbsp;그는 무기력하거나 세상에 무관심한 인물도 아니다.&nbsp;오히려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예리하게 관찰하고,&nbsp;그 세계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와 규범을 의심한다.&nbsp;그에게 문제는 특성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nbsp;인간을 설명하는 특성들이 마치 변할 수 없는 본질인 것처럼 굳어져 있다는 사실이다.&nbsp;특성은 한 인간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동시에,&nbsp;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사회적 기준이 된다.&nbsp;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성에 맞추어 살아가고,&nbsp;사회는 그 특성에 따라 인간을 이해하고 관리한다.&nbsp;무질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근대 사회가 개인을 고정된 정체성 안에 가두는 방식을 드러낸다.&nbsp;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바로 현실감각과 가능성감각이다.&nbsp;현실감각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nbsp;현실감각을 가진 사람은 현재의 질서와 제도,&nbsp;관습과 규범을 현실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nbsp;물론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nbsp;문제는 현재의 현실이 마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는 필연적인 질서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때 발생한다.&nbsp;반면 가능성감각은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지 않는다.&nbsp;지금 존재하는 것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nbsp;세계는 다른 방식으로도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nbsp;가능성감각을 가진 인간에게 현실은 완결된 결과가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잠정적으로 굳어진 상태다.&nbsp;울리히가 특성 없는 인간인 까닭은 바로 이 가능성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nbsp;그는 자신을 하나의 성격이나 직업,&nbsp;사회적 지위로 확정하려 하지 않는다.&nbsp;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nbsp;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특성을 새롭게 획득하는 일이 아니라,&nbsp;인간을 특정한 특성으로 고정하는 사고방식 자체에서 벗어나는 일이다.&nbsp;특성이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만,&nbsp;동시에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틀이기도 하다.&nbsp;사람을 특정한 성격으로 규정하면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성격의 표현으로 해석된다.&nbsp;그가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예외나 일탈로 취급된다.&nbsp;이처럼 특성은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는 몇 가지 속성으로 환원한다.&nbsp;울리히는 그러한 환원을 거부한다.&nbsp;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의 배경인 카카니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nbsp;카카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델로 한 가상의 국가다.&nbsp;이곳에서는 황제의 즉위&nbsp;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인&nbsp;&#39;평행운동&#39;이 추진된다.&nbsp;평행운동은 국가의 위대함과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낼 역사적 기념사업을 구상한다.&nbsp;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가적 이상은 관료주의와 허영,&nbsp;민족주의와 개인적 야심이 뒤얽힌 거대한 공회전으로 변한다.&nbsp;사람들은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말하지만,&nbsp;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지위와 이해관계를 지키는 데 몰두한다.&nbsp;미래를 준비한다는 사업이 오히려 기존 질서를 반복하는 것이다.&nbsp;무질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낡은 제도나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가 아니다.&nbsp;그가 비판하는 것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언어조차 기존 현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의 상태다.&nbsp;평행운동의 참여자들은 새로운 시대와 국가의 이상을 말하지만,&nbsp;그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이미 존재하는 가치와 위계의 연장에 불과하다.&nbsp;그들은 현실을 넘어서는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을 구성하는 특성들,&nbsp;즉 국가적 위대함,&nbsp;사회적 명예,&nbsp;성공,&nbsp;권위와 같은 기준을 그대로 유지한다.&nbsp;이 점에서 평행운동은 가능성을 말하면서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설적인 사업이다.&nbsp;울리히는 이러한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세계의 가치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nbsp;그는 현실의 질서가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감지한다.&nbsp;따라서 그의 태도는 단순한 냉소주의와 구별된다.&nbsp;냉소주의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적당히 살아가는 태도라면,&nbsp;울리히의 가능성감각은 현실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nbsp;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을 다른 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다.&nbsp;소설 후반부에서 울리히와 여동생 아가테의 관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nbsp;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무질은 기존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관계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경험을 탐색한다.&nbsp;여기서 등장하는 것이&nbsp;&#39;다른 상태&#39;다.&nbsp;다른 상태란 일상적인 의식과 판단,&nbsp;사회적 규범이 작동하는 방식이 흔들리는 경험을 가리킨다.&nbsp;이 상태에서는 나와 타자,&nbsp;주체와 객체,&nbsp;정신과 신체를 구분하는 익숙한 경계가 느슨해진다.&nbsp;인간은 자신을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개인으로 경험하는 대신 타자와 세계에 연결된 존재로 경험한다.&nbsp;이때 다정함은 단순히 친절하거나 상냥한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nbsp;그것은 자기 자신을 고정된 개인으로 유지하려는 태도가 약화되고,&nbsp;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열어놓는 경험에 가깝다.&nbsp;인간은 타자를 자신의 욕망이나 판단에 따라 규정하는 대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 역시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경험한다.&nbsp;이러한 경험은 인간을 고정된 특성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관점과 대립한다.&nbsp;특성이 개인을 독립적이고 확정된 존재로 만드는 사회적 규정이라면,&nbsp;다른 상태는 그러한 확정성이 흔들리는 경험이다.&nbsp;울리히와 아가테의 관계는 이처럼 기존의 인간관과 사회적 관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탐색하는 소설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nbsp;물론 무질이 제시하는 가능성이 곧바로 새로운 사회제도나 정치적 대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nbsp;『특성 없는 인간』은 현실의 모순을 분석하고 그것을 제거할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소설이 아니다.&nbsp;오히려 이 작품의 독특함은 현실을 구성하는 범주들이 얼마나 자명하지 않은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nbsp;우리가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nbsp;능력이라고 부르는 것,&nbsp;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것인가?&nbsp;아니면 특정한 사회가 인간에게 부여한 규정인가?&nbsp;무질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인간을 이미 완성된 존재로 간주하는 관점을 해체한다.&nbsp;따라서&nbsp;『특성 없는 인간』의 핵심은 특성을 제거한 인간을 상상하는 데 있지 않다.&nbsp;그것은 인간을 하나의 특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데 있다.&nbsp;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규정과 일치하는 존재가 아니며,&nbsp;현재의 현실에 의해 완전히 소진되는 존재도 아니다.&nbsp;인간에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nbsp;가능성감각은 바로 그 잉여를 감지하는 능력이다.&nbsp;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nbsp;현재의 질서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nbsp;인간이 지금의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감각하는 능력이다.&nbsp;이런 의미에서 울리히는 특성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 아직 하나의 특성으로 확정되지 않은 인간이다.&nbsp;그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대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열어놓는다.&nbsp;무질이 비판하는 것은 개성의 부재가 아니라 개성을 고정된 속성으로 이해하는 사회이며,&nbsp;그가 탐색하는 것은 정체성의 완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넘어설 가능성이다.&nbsp;『특성 없는 인간』은 우리에게 묻는다.&nbsp;인간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게 사용하는 특성들이 정말 인간을 이해하게 해주는가,&nbsp;아니면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될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가?&nbsp;이 질문은 무질의 시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nbsp;사람을 능력과 성과,&nbsp;직업과 지위,&nbsp;성공과 실패로 끊임없이 분류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nbsp;특성 없는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아니라,&nbsp;주어진 세계가 규정하는 자신으로만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인간이다.&nbsp;무질의&nbsp;『특성 없는 인간』에서 특성과 가능성감각의 관계는&nbsp;&lsquo;인간을 규정하는 것&rsquo;과&nbsp;&lsquo;인간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감각하는 것&rsquo;의 대립으로 정리할 수 있어.&nbsp;다만 특성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nbsp;핵심은 특성을 인간의 고정된 본질로 받아들이느냐,&nbsp;아니면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현실적 표현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어.&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18:56:2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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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두물머리와 팔당댐의 물 이야기</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4</link>
			<description><![CDATA[1. 두물머리로 모인 산과 물양평의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두물머리 양수(兩水)라는 이름이 붙었다.풍수에서 산이 가는 곳에 물이 가고 물이 만나는 곳에서 산이 멈춘다고 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을 이루며 여기까지 달려온 산의 흐름을 살펴 본다.1.1. 한북정맥의 두물머리까지 산줄기조선 시대 전통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 체계에 따르면,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백두대간의 식개산(食介山)에서 분기하여 한강과 임진강을 가르며 교하의 장명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13정맥 중 하나이다. 현대 지리에서는 추가령 인근 분수령에서 갈라져 백운산,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본다.&nbsp;<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zFfMTIx/MDAxNzkzNDQ3MjEyMDc2.6ilh8tZbpnxQSS_-0iHDpBpRny9n_5uYagLn-Faw8sIg.ib7bqOOh2kMhT-gh5NPHcdpO-TkFIhGUtQmMVI7WWV4g.PNG/%ED%95%9C%EB%B6%81%EC%A0%95%EB%A7%A5.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652" data-height="656"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46699c118da1d4d80a22e9672150bff5430d886d.jpg">블로그 &#39;나를찾아떠나는여행&#39;에서1.2. 한북정맥에서 천마지맥으로 분기&nbsp;① 광덕산(廣德山, 1,046m) ~ 광덕산 서남쪽 각흘산&middot;명성산 방면(도마치봉 인근)광덕산: 강원 화천&middot;철원과 경기 포천의 경계를 이루는 한북정맥의 중추 고산분기 과정: 광덕산의 기운은 한북정맥 주능선을 타고 백운산(903m), 국망봉(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을 거쳐 운악산에 이른다. 여기서 한 줄기는 운악산&middot;축석령&middot;도봉산&middot;북한산(한양의 진산) 방향인 한북정맥 본맥으로 가고, 또 다른 웅장한 줄기가 남쪽으로 가지를 쳐 천마지맥을 형성한다.&nbsp;② 주금산(鑄錦山, 814m)포천시 내촌면과 남양주시 수동면, 가평군 상면의 경계에 솟아 천마지맥의 실질적인 첫 관문 역할을 하는 산이다.비단이 펄럭이는 형세라 하여 &#39;비단산&#39;으로도 불리며, 북쪽의 거친 고산 기운을 부드러운 육산과 암릉의 조화로 바꾸어 남쪽으로 흘려보낸다.&nbsp;③ 축령산(祝靈山, 887m)과 서리산(832m)주금산 남쪽 능선에서 동남쪽으로 솟구친 산으로, 서리산과 함께 말발굽 형태의 포근한 분지를 이룬다.조선 태조 이성계가 사냥을 왔다가 짐승을 잡지 못하자, 산신령께 제사를 올린 뒤 멧돼지를 잡았다고 하여 &lsquo;축령(祝靈)&rsquo;이라 불리게 된 유서 깊은 산이다. 울창한 잣나무 숲과 암릉이 어우러져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nbsp;④ 철마산(鐵馬山, 711m)축령산에서 서남쪽으로 오독산(오동재)을 거쳐 솟아오른 험준한 암릉산.남양주시 진접읍과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며, 천마산으로 진입하기 직전 기운을 다잡아 날카롭게 용트림하는 형세.⑤&nbsp;천마산(天摩山, 812m)이 지맥 전체의 이름을 낳은 명산으로, 산세가 매우 가파르고 우뚝 솟아 있다.고려 말 이성계가 이곳의 산세를 둘러보고 "산이 하도 높아 손을 뻗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手摩天)"고 읊은 데서 &#39;천마(天摩)&#39;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양주 북부의 주산이자 군사적&middot;지리적 요충지로, 암봉과 협곡이 발달하여 지맥의 생기가 가장 강력하게 집결하는 곳.&nbsp;⑥ 백봉산(栢峰山, 587m) ~ 갑산(甲山, 549m)천마산의 기운은 마치고개(마석고개)로 한 번 숨을 죽인 뒤, 남쪽으로 백봉산(묘적산)을 솟구친다.이어 평내&middot;호평 분지를 감싸며 남하하여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갑산(甲山)과 적갑산(561m)으로 맥을 연결.&nbsp;⑦ 예봉산(禮峯山, 683m)팔당호 서북쪽을 굽어보며 한강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명산.한양 도성을 둘러싼 풍수 구조에서 한강 건너 검단산과 마주하며 동쪽 수구(水口)를 좁혀 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동쪽 외청룡(外靑龍)의 핵심 진산 역할. 조선 시대 왕실 능묘나 한양을 향해 예를 갖추는 봉우리라는 의미에서 &#39;예봉(禮峯)&#39;으로 불렸다.&nbsp;⑧ 운길산(雲吉山, 610m)예봉산 능선이 북동쪽으로 뻗어 올라가 솟은 명봉으로, 구름이 가다가 걸려 머무는 길한 산이라는 뜻.중턱에 신라 시대 창건 설화가 전하며, 조선 세조(1458년경) 때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 수종사(水鐘寺)를 품고 있다. 서거정이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 찬탄했듯, 수종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물길 합수 경관은 한반도 최고의 절경이자 명당 조망으로 꼽힌다.&nbsp;운길산 자락과 예봉산 줄기가 맞닿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마재마을)에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났다.⑨&nbsp;종착지: 두물머리 (양수리, 兩水里)합수와 지맥의 완성: 운길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마지막 산자락은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에 이르러 물속으로 몸을 낮추며 행룡을 마친다.&nbsp;풍수적 가치: 풍수학에서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을 만나면 행룡을 멈춘다(산진수회&middot;山盡水廻)"고 하듯, 광덕산에서 시작된 백 리 산줄기는 거대한 남&middot;북한강의 수태극(水太極)을 만나 기운을 완결 짓고, 한양(서울)으로 흘러드는 천리장강 한강 본류를 탄생시키는 거대한 젖줄 구역을 완성한다.1.3. 북한강의 물길 (발원지 &rarr; 양수리)북한강은 한강의 최대 지류로, 북한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한강 본류를 이룬다. 총 유로연장은 약 317km(남한 구간 약 291km)이다.발원: 북한 강원도 금강군(구 회양군) 신읍리 일대, 금강산 부근에서 금강천이 시작.북한 구간: 금강천이 남쪽으로 흐르며 금성천 등을 합류한 뒤 군사분계선을 넘는다.화천 진입 (남한 국가하천 시작): 화천군으로 들어와 양구서천&middot;수입천 등과 만나 파로호(화천댐)를 형성.춘천 구간: 춘천호(춘천댐)를 거쳐 의암호(의암댐)에서 최대 지류인 소양강(인제&middot;홍천 일대에서 발원, 소양강댐/소양호)과 합류. 춘천은 의암호로 &lsquo;호반의 도시&rsquo;가 된다.가평 구간: 가평천&middot;홍천강 등을 합류하며 청평호(청평댐)를 이룬다. 조종천 등도 합류.양수리 합류:&nbsp;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한강 본류가 시작. 이후 팔당호를 거쳐 한강으로 이어진다.주요 특징댐&middot;호수 연속: 평화의댐 &rarr; 화천댐(파로호) &rarr; 춘천댐 &rarr; 의암댐(의암호) &rarr; 청평댐(청평호) + 소양강댐(소양호). 유량이 풍부하고 협곡이 많아 발전&middot;수량 조절에 유리.주요 지류: 소양강(최대), 홍천강, 가평천, 조종천, 양구서천 등.남한 구간: 휴전선 이남부터 국가하천으로 관리됨.이 물길이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쳐져 한강을 만들고, 팔당호를 거쳐 수도권으로 공급된다.&nbsp;<br>2.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2번째 산줄기 한강기맥(漢江岐脈)2.1.&nbsp;한강기맥의 산 줄기한강기맥은 백두대간 오대산 두로봉에서 시작해 양평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총 길이 약 167km이며,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분수령 역할을 한다. 한강기맥은 정맥에 버금가는 규모와 높이의 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계방산과 용문산이 대표 명산으로 꼽힌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xMDFfMTk3/MDAxNzkzNTMwNzE1Njk0.Tg_DxlLkqhRy1G8c5UOSChZMAYn3urXMgjsX_voBFMkg.5lEYIKlaNeI4rOYqwBd6gD9Ymy4oLGlm7rFz0yJ-iGEg.JPEG/%ED%95%9C%EA%B0%95%EA%B8%B0%EB%A7%A5_%EC%9A%A9%EB%AC%B8%EC%82%B0.jp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693" data-height="458"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7492f9e5e841cebf0773918856ee9c626124272d.jpg" class="fr-fic fr-dib">2.2. 남한강 물줄기 정리(발원 &rarr; 양수리)한강기맥과 함께하는 남한강은 이 기맥의 남쪽을 따라 흐르며, 최종적으로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난다.발원: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시작 (골지천)상류&nbsp;(강원 구간): 골지천 &rarr; 임계천 합류 &rarr; 송천 합류 &rarr; 조양강 &rarr; 오대천 합류 &rarr; 동강&nbsp;&nbsp; 영월에서 평창강&middot;주천강(서강)과 만나 남한강이 된다.중류 (충북 구간): 단양을 거쳐 충주호(충주댐)에 유입 &rarr; 충주에서 달천 합류.하류 (경기 구간):&nbsp;섬강&middot;청미천 합류 후 여주를 지나며 양화천&middot;복하천 등을 받아들임&nbsp;&nbsp; 양평에서 흑천 합류 후 서쪽으로 흐른다.합류 :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한강 본류가 시작.&nbsp;2.3. 한강기맥과의 관계한강기맥은 오대산&middot;계방산&middot;용문산&middot;유명산&middot;청계산 등을 지나 두물머리에서 끝난다.기맥의 남쪽 사면에서 내려오는 물이 남한강으로, 북쪽 사면의 물이 북한강으로 흘러간다.특히 용문산~두물머리 구간에서 한강기맥은 남한강의 북쪽을 따라 병행하며, 양수리에서 두 강이 합쳐진다.이처럼 한강기맥은 북한강과 남한강을 나누는 뼈대 역할을 하고, 남한강은 그 남쪽을 따라 태백에서 양수리까지 흐른다. 3. 한남금북정맥을 타고 들어와 양평 강상&middot;강하로 끝나는 맥3.1.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nbsp;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분기해 경기도 안성 칠장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약 158km)를 말하며 칠장산에서 한남정맥(서북 방향 &rarr; 김포 문수산)과 금북정맥(남서 방향 &rarr; 태안 안흥)으로 갈라진다.한남정맥은 칠장산에서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것이 본맥이다.이 한남정맥(또는 그 주변 분기점, 문수봉 일대)에서 가지를 친 지맥(양자지맥/앵자지맥 계열)이 이천 방향으로 들어온다.양평으로의 흐름: 문수봉 부근 분기 &rarr; 천덕봉&middot;앵자봉 일대 &rarr; 이천 설봉산 &rarr; 양자산 &rarr; 양평군 강상면&middot;강하면 방향으로 들어와 남한강 쪽으로 내려앉으며 맥이 마무리된다.칠장산(492m, 안성)에서 서북쪽으로 진행하며 이천&middot;용인 일대와 인접산줄기는 안성 칠장산에서 출발하여 도덕산과 국사봉을 거쳐, 용인의 함박산(349m), 부아산(403m), 석성산(472m)을 지나 문수봉에 이른다.문수봉 부근에서 북쪽으로 양자지맥 등이 갈라져 경안천&middot;청미천 발원지를 이루며 이천&middot;양평 쪽으로 뻗어 나간다.이 맥은 남한강 남쪽 분수령의 일부를 이루며, 이천&middot;양평 강상&middot;강하 지역의 산세와 수계를 가르는 역할을 한다.&nbsp;이 일대는 도시화&middot;개발로 능선이 끊기거나 희미한 구간이 많아 지맥 명칭과 정확한 마루금은 산경표 해석이나 종주 자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nbsp;3.2. 팔당호로 흘러들어가는 경안천(慶安川)의 물줄기경기도 용인&middot;광주&middot;곤지암 일대 물은 경안천(慶安川)을 통해 팔당호로 흘러들어간다.흐름 정리용인&middot;광주&middot;곤지암 지역 물 &rarr; 경안천 본류 + 곤지암천 등 지류 &rarr; 팔당호 (남한강&middot;북한강과 합류)&nbsp;&nbsp; &rarr; 한강 본류발원 : 용인시 처인구 호동(문수봉 남서쪽 용해곡&middot;굴둑골 계곡, 해발 약 400m 부근)에서 시작.용인 구간:&nbsp;용인 시가지(김량장동 등)를 북쪽으로 관통하면서 금학천, 능원천, 양지천, 경안천 상류 지류, 목현천, 곤지암천 등 여러 지류가 합류.광주&middot;곤지암 구간:&nbsp;광주시로 진입한 뒤, 곤지암천(곤지암읍 건업리 일대 등에서 발원하여 곤지암&middot;도척&middot;초월 일대 물을 모은 하천)이 초월읍 지월리 부근에서 경안천에 합류.팔당호 유입:&nbsp;합류 후 계속 북쪽으로 흘러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서하리 일대)에서 팔당호로 들어간다.경안천은 유로연장 약 49km, 유역면적 약 560km&sup2; 규모의 국가하천이며, 팔당호 전체 유입량의 약 1.6%를 차지하지만 오염 부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 상수원 보호 차원에서 중요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마무리 글두물머리 이야기를 하려다가 먼저 우리나라 수도권 사람들이&nbsp;생활하고 즐겨찾는 크고 작은 나들이 발검음마다 마주하는 이 산들과 물의 족보와 내력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나온 물들이 우리가 먹고 마시는 생명수의 젖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고마움과 산과 물을 사랑하고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경각심을 일게 하려는 의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쓴 글입니다.&nbsp;백두대간의 험준한 마루금에서 시작해 천마지맥과 한강기맥, 한남의 줄기를 타고 내달린 거대한 산맥들은 두물머리와 팔당호에 이르러 비로소 몸을 낮추고 생명수를 품어 안습니다. 태백의 검룡소에서 솟은 맑은 물과 금강산 자락을 적시며 내려온 물길, 그리고 도심의 곁을 흘러온 경안천의 여울까지, 이 모든 산과 물의 족보는 억겁의 세월 동안 쉼 없이 흘러 마침내 수도권 이천만 시민의 목을 축이는 가장 거룩한 젖줄이 되었습니다.우리가 산길에 남긴 가벼운 발걸음 하나, 계곡물에 무심코 흘려보낸 작은 오염과 부주의한 손길은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산을 타고 내린 빗물이 개울이 되고, 강물이 모여 팔당호에 고였다가, 결국 돌고 돌아 내 가족과 나 자신의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생명수가 되어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더럽히는 것은 곧 내 식탁과 몸을 병들게 하는 일이며, 산천을 맑게 보듬는 것은 곧 우리 삶의 내일을 살려내는 일입니다.이 장엄한 산수의 내력을 가슴에 새길 때, 산과 물은 비로소 단순한 쉼터를 넘어 나의 일부이자 지켜내야 할 생명의 뿌리로 다가옵니다. 흙 한 줌, 물 한 방울에도 깊은 감사와 경외를 담는 것, 그 다정한 책임감이야말로 대지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끝없는 은혜에 온전히 보답하는 가장 아름다운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11:40: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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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11.2 《지혜의 능력과 존재적 책임에 대하여》</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3</link>
			<description><![CDATA[《지혜의 능력과 존재적 책임에 대하여》-지식과 권위의 크기보다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이유<br>인간 사회에는 자신을 현자라고 칭하거나 타인으로부터 현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br>물론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과 통찰력, 경험적 능력을 축적한 사람들의 전문성과 성취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저마다 다른 환경과 경험, 학습과 노력의 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능력과 성과를 형성해 왔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의 지혜와 존엄성까지 온전히 평가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br>지식과 능력은 그 자체로 완성된 가치가 아니며, 어떠한 방향으로 사용되고 무엇을 위해 활용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br>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누리는 대부분의 기회는 오직 개인의 노력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br>자연이 제공한 생존의 터전과 수많은 존재의 노동, 이전 세대가 남긴 지식과 기술, 역사적 희생과 사회적 협력, 그리고 우연히 주어진 환경과 시간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재의 개인을 가능하게 했습니다.<br>결국 개인의 성취조차 수많은 존재와 사건, 시간의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더 많은 지식과 능력을 획득한 존재일수록 자신이 누려 온 기회의 기원과 그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br>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개인의 소유나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보다, 그 기회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널리 이로운 의미를 되돌려 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무조건적인 죄책감에 빠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것과 실제로 돌려준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를 점검하는 윤리적 감각에 가깝습니다.반면 일부 사기적 현자나 권위주의적 지식인에게서는 능력에 수반되어야 할 책임과 성찰보다 권위와 과시를 우선시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br>자신의 능력을 절대화하고 타인의 판단을 낮추며, 검증받아야 할 주장조차 권위라는 방패 뒤에 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지식과 신성,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행동이 타인과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돌아보지 않습니다.<br>물론 모든 권위나 자기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정당한 전문성과 성취는 존중받아야 하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 역시 사회적으로 필요할 수 있습니다.<br>문제는 그러한 능력이 객관적인 검증과 책임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지에 있습니다.<br>결국 중요한 차이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는 지식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사용하는 방향성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진정한 지혜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영역을 인정하고, 잘못된 판단을 수정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 타인과 세상에 어떠한 결과를 남기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과정까지 포함해야 합니다.<br>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식과 성찰이 깊어질수록 권위가 높아지는 것만큼이나 겸손과 책임의 범위도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오히려 지식과 성찰이 심화될수록 순수한 의지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br>아무런 계산 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작은 생명의 행동, 자신에게 주어진 터전과 온기를 다른 존재와 나누는 자연의 모습, 보상이나 명예를 기대하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며 타인의 삶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에는 지식과 권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br>그러한 의지는 때로 거대한 학문적 성취나 사회적 지위보다 더 깊은 존재적 의미를 전달하기도 합니다.이것은 지식과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이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는지를 되묻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br>지식이 깊어질수록 순수한 의지를 이해하고, 이성이 성숙할수록 그 의지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br>이러한 태도를 존재적 성숙의 중요한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br>특정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획득하기까지 자신에게 기회를 제공한 수많은 존재와 역사에 감사하며, 그에 합당한 쓰임을 고민하는 태도입니다.<br>결국 지식과 지혜의 가치는 소유한 정보의 양이나 사회적 지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br>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보다 그 지식을 통해 무엇을 보호하고 개선했는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랐는가보다 그 위치에서 무엇을 책임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가보다 스스로 얼마나 정직하게 자신을 검증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br>이러한 기준에서 누구도 완성된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판단의 오류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객관화와 정합화, 구조화를 시도해야 하는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다만 한 가지 방향만큼은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세상이 제공한 기회를 개인의 부귀영화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소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더 넓은 존재들에게 이로운 의미로 되돌려 주려는 방향입니다.<br>그것은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이나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스스로의 생존과 존엄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역량을 더 넓은 존재적 가치로 연결하려는 노력입니다.<br>결국 지혜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능력 앞에서 얼마나 합당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한 성찰이 없다면 뛰어난 지식도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높은 지위도 자기기만의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br>반대로 부족한 능력과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진실하게 노력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타인을 위해 사용하려는 순수한 의지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br>지식은 존재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더 합당하게 이해하고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br>그리고 그 지식이 충분히 성숙했는지를 확인하는 하나의 기준은, 보상받기 어려운 순수한 의지와 가여운 노력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며, 그 가치를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가에 있을 것입니다.<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dbb3d95ce8f95e60d4e55ac9b6e69fd39b068bf8.jpg" class="fr-fic fr-dib">●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11:15: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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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명품녀와 신자유주의의 잉여물</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2</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46762e91b1a7339a775012a149f7984d40f7e161.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286px;">예전에 한 케이블 방송사 프로그램에 부모님의 용돈으로 온 몸에 명품을 걸치며 살았다는&nbsp;4억 명품녀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nbsp;명품녀 당사자는 가짜로 밝혀졌고 명품녀와 방송사 사이에 분쟁이 오고가더니 명품녀와 명품을 만들어 준 회사 사이에도 법적인 분쟁이 생겨났다.&nbsp;쇼핑의 여왕 페리스 힐튼에게도 비교되는 이 명품녀의 한 바탕 소동은 우리 사회에&nbsp;&lsquo;명품&rsquo;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 준다.&nbsp;이러한 소동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방송 시청율과 광고 수주에 혈안이 되어 무분별하게 유행어를 양산해 내는 방송언론의 책임도 크고 유독 여자라는 이름을 희생시켜 이루진다는 것도 큰 문제다.&nbsp;오크녀,&nbsp;된장녀,&nbsp;알파녀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nbsp;그 중에서&nbsp;2005년&nbsp;에 실린 기사를 계기로 하여 나타난 된장녀는 사실 명품녀의 전사에 해당된다.&nbsp;비싼 수입 명품을 즐기는 여성들 중에서 소비 생활을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여자들을 비하하기 위해 등장한 말이 된장녀이기 때문에 이번에 소란을 피운 명품녀 또한 소비 생활을 무려&nbsp;4억 원이나 되는 부모 용돈으로 꾸렸다는 점에서&nbsp;2005년 된장녀와&nbsp;2010년 명품녀(지금은 무슨 여자인지 모르겠다)&nbsp;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nbsp;그런데 여자만 명품녀일까.&nbsp;우리 주변에는 온통 명품으로 가득차 있다.&nbsp;사극도 명품 사극이고 심지어는 보험도 명품 보험이다.&nbsp;개나 소나 다 명품 타령이다.&nbsp;심지어는 명품 복근도 있으니 혀를 찰 일이다.&nbsp;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nbsp;요즘 텔레비젼에는 아파트 광고가 나오지 않는다.&nbsp;명품 아파트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 텔레비전에는 온통 대출 광고다.&nbsp;부동산 시장이 죽었기 때문이다.&nbsp;필자가 기억하기로 명품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은 자살한 모 탤런트가 아파트 광고에 출연하면서 부터다.&nbsp;어느 건설사의 아파트인지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만 명품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분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nbsp;주지하다시피 지난 노 무현 정부는 한국의 금융산업을 아시아 최고의 금융 허브로 만드는 허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한국의 은행 자산을 불렸다. 2002년부터&nbsp;2005년까지 분기마다 거의&nbsp;1조원에 가까운 이익을 낸 국내 은행들이 자산 부풀리기 경쟁에 뛰어 들었다. 2002-2003년에 지어진 아파트들이&nbsp;2004-2005년에 대규모로 분양되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에 부동산 투기 광풍이 몰아닥쳤다.&nbsp;지금은 아파트 이름이&nbsp;&lsquo;힐스테이드HILLSTATE&rsquo;이듯이 그 정점에 서 있다.&nbsp;예의 된장녀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이 때쯤이었다.&nbsp;이렇게 노 무현 정부와 은행은 이른바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사람들을 개발의 욕망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nbsp;개발,&nbsp;프리미엄,&nbsp;시세차익에 눈 먼 사람들은 주택을 담보로 하여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nbsp;시세차익이 많이 나는 명품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nbsp;그러는 사이에 목동에서는&nbsp;10억짜리 명품 아파트와 그 이하의 짝퉁 아파트라는 말이 나타났다.&nbsp;명품 아파트라는 말에서 출발한&nbsp;&lsquo;명품&rsquo;이란 단어는 그 후 언어 사이를 순환하며 된장녀,&nbsp;명품녀로 거듭났고 이제는 근육에까지 들러붙어 살아가고 있다.&nbsp;보드리야르는 유명한 저서&nbsp;『소비의 사회』에서 노동 과정이 문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지적한다.&nbsp;그러나 명품이 됐든 짝퉁이 됐든 소비 문제가 현대의 특수성이라고 보는 보드리야르의 입장은 왜 한국 사회에서&nbsp;&lsquo;명품&rsquo;이 문제가 되고 명품녀가 등장해 논란거리를 제공하는지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nbsp;명품이라는 상품이 왜 페티시가 되어 인간의 마음 속에 빙의를 일으키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nbsp;문제의 본질은 한 사회를 명품과 짝퉁으로 양분하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전 지구적으로 관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nbsp;조절주의자인 알랭 리피예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란 어느 한 사회가 모래시계 사회hourglass society로 변하는 것을 가리킨다.&nbsp;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사회는 중간부분이 개미허리처럼 홀쭉해지고 아래 부분이 두터워지는 극심한 양극화사회가 바로 모래시계 사회다.&nbsp;중국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제는&nbsp;1%가 한 사회의 부와 권력을 싹쓸이하는&nbsp;99 : 1의 사회로 변했다.&nbsp;명품과 짝퉁은 한국 사회가&nbsp;-&nbsp;그리고 전 지구가&nbsp;-&nbsp;바로 이러한 모래시계 사회임을 입증하는 단어일 뿐이다.&nbsp;타워 팰리스가 명품 아파트라면 강북의 어느 주택은 명품은 커녕 짝퉁 축에도 들지 못한다.&nbsp;보드리야르는 노동 과정이 문화 전체를 지배한다는 논리만 전개할 뿐,&nbsp;오늘날 그 노동 과정이 슬림화되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nbsp;기술 발전으로 핸드폰이 슬림화를 거듭하는 동안 노동 과정 또한 슬림화를 거듭하며 저임금으로 치달아 왔다.&nbsp;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사람들이 모래시계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명품 아파트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nbsp;복지라고는 눈꼽 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 시세 차익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를 충당해야 했고 명품 부자들은 그 돈으로 또 다른 투기를 감행하고 자식들을 신인류,&nbsp;신 계급으로 성장시켜야 했기 때문이다.&nbsp;한국 사회가 명품에 열광하고 아무 말에나 명품이라는 말을 빙의시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짝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포감,&nbsp;모래시계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 탓이다.&nbsp;최근 외교부 장관 사태에서 나타났듯이 신분이 철저하게 세습되고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성골 내지는 진골이 되기 위해 광기를 부리는 사회에서 명품은 마치 하류로의 전락을 방지하는 부적과 같은 존재다.&nbsp;그러나 그 부적의 힘으로는 저임금,&nbsp;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시대를 바꾸지도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명품녀도 구하지 못한다.&nbsp;목에 걸어 사용하는 물건에 명품이라는 단어가 영가로 들어오고 주거공간인 아파트에 명품이라는 단어가 영가로 들어 와 고액의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둔갑하는 시대의 모순은 퇴마사의 능력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nbsp;한국 사회가 존 롤스 식의 공정사회라는 구색이라도 최소한 갖추어야 명품이라는 영가에 몸과 마음을 훼손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nbsp;&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09:57: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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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11.2《진실을 향하는 세 가지 방향성과 존재적 정합성》</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1</link>
			<description><![CDATA[《진실을 향하는 세 가지 방향성과 존재적 정합성》-단절&middot;정체&middot;연결을 통해 바라본 존재와 문명의 유지보전<br>저는 세상의 다양한 현상과 개념을 바라볼 때,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정의만큼이나 어떠한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그 방향이 어떠한 의미와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동일한 지식과 진실, 정의와 선의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주체의 목적과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관점에서 존재와 사회의 여러 현상을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nbsp; 바로 단절, 정체, 연결입니다.<br>이는 단순히 상태를 분류하기 위한 구분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외부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며, 변화와 유지의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하나의 해석적 구조입니다.1. 단절을 향하는 진실: 자기보호가 왜곡으로 전이되는 과정단절을 향하는 진실은 진실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진실을 검증하고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br>다각적인 객관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정합화, 구성요소를 합당하게 정리하는 구조화, 그리고 그 과정에 수반되는 책임과 의무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것입니다.<br>이러한 상태에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탐구하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만을 선택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사고가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br>결국 부당한 생존과 욕망, 소유와 약탈까지도 자신만의 논리로 정당화하게 될 수 있습니다.특히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와 관점을 차단하고, 비판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 형성한 기준을 절대화한다면 진실은 더 이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장벽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br>이러한 단절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일부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nbsp;스스로의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차단한다는 데 있습니다.<br>저는 이것이 개인의 왜곡을 넘어 집단의 관행과 문명의 퇴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2. 정체를 향하는 진실: 유지보전과 관성의 차이정체를 향하는 진실은 참과 거짓의 구별이나 당장의 변화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 결과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br>진실을 발견하는 것과 진실을 유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br>한 번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이후의 모든 판단까지 올바르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은 변화하고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며, 기존의 기준 역시 시대와 조건에 따라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br>그럼에도 과거의 성과나 지식에 머물러 자신을 점검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합당했던 판단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과 괴리될 수 있습니다.<br>물론 정체가 반드시 악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피로와 한계, 익숙함과 자기만족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br>그러나 지속적인 자기점검과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유지보전이라는 이름 아래 기존의 오류까지 보존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br>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지보전과 관성을 구분하는 일입니다.<br>유지보전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를 개선하고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반면 관성은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기존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입니다.따라서 진정한 유지보전에는 반드시 자기점검과 수정 가능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3. 연결을 향하는 진실: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공명의 과정제가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는 방향은 연결을 향하는 진실입니다.이 방향에서 진실은 완성된 절대적 결과물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들이 서로의 한계와 차이를 인정하면서 지속적으로 정제해 나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br>여기에는 객관화와 정합화뿐 아니라 감사와 교감, 반면교사, 그리고 다른 존재의 어려움과 노력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함께 필요합니다.특히 연결을 향하는 진실은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기고, 다른 존재의 경험과 관점을 받아들이며, 기존의 구조를 수정할 수 있는 자기점검 과정을 유지합니다.<br>이 과정에서 감사와 애심, 감내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현재 우리가 누리는 삶과 기회는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제공한 터전과 수많은 사람의 노동, 역사 속에서 어려움을 감내했던 존재들의 노력, 그리고 직접 알지 못하는 수많은 과정이 연결되어 현재의 기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역사를 인식한다면 진실은 단순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도구에 머물 수 없습니다.<br>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합당하게 사용하고, 다른 존재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며, 다음 세대와 미래의 가능성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까지 고민하게 됩니다.이때 감내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행위가 아닙니다.불완전한 환경에서 조화와 공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적절히 투입하고 관리하는 과정입니다.<br>다만 감내가 일방적인 희생이나 부당함의 수용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그러한 구분이 이루어질 때 연결은 맹목적인 화합이 아니라 합당한 공존의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4. 세 가지 방향의 상호작용과 유지보전단절&middot;정체&middot;연결은 현실에서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br>하나의 개인이나 조직, 사회 안에서도 세 가지 방향은 동시에 나타날 수 있으며, 환경과 이해관계에 따라 그 비중이 달라집니다.<br>어떤 주체는 특정 영역에서는 연결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영역에서는 단절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는 합당했던 구조가 새로운 환경에서는 정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따라서 특정 주체를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하기보다 각각의 과정에서 어떠한 방향성이 강하게 작동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br>이러한 관점에서 유지보전은 단순히 기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단절이 과도해지지 않도록 개방성을 유지하고, 정체가 고착되지 않도록 자기점검과 개선을 지속하며, 연결이 왜곡되지 않도록 객관화와 정합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br>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 개방화: 기존의 주장과 구조를 외부의 검증에 열어 두는 과정입니다.- 객관화: 다양한 관점과 기준을 통해 현상을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정합화: 원인과 결과, 목적과 수단 사이의 합당성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구조화: 개별 요소를 시작과 과정, 결과의 관계 속에서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자가점검: 기존의 판단과 행동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의미화: 이러한 과정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적 가치와 이로움을 만들어 내는지 확인하는 과정입니다.이 과정들이 상호작용할 때 불완전한 존재와 환경 속에서도 일정한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5. 진실의 성숙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저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선언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br>자신이 모르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며, 새로운 경험과 증거에 따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단절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를 차단하고, 정체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미루며, 연결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더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조정합니다.이 차이는 존재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br>진실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강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그 지식과 권위가 자신과 타자, 그리고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지, 타인의 정당한 노력을 존중할 수 있는지,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합당한 방법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가 진실의 실질적인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6. 진실을 향한 연결과 존재적 책임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불완전합니다.그러나 그 불완전성 때문에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이 존재하고, 그 차이 속에서 새로운 기회와 변화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br>다만 그 기회가 반드시 성숙과 조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생존과 소유, 욕망과 권력에 편중된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불완전성은 부당함을 확대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반대로 감사와 애심, 성실과 정직, 객관화와 정합화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점검한다면 불완전성은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그래서 진실을 단순히 소유하거나 완성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유지하고 정제해 나가야 할 과정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br>그 과정에서 때로는 단절해야 할 부당함이 있고, 유지해야 할 가치가 있으며, 새롭게 연결해야 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이 세 가지를 구분하고 적절한 비중으로 조율하는 것이 불완전한 존재들이 조화와 공존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br>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절대적인 진실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진실을 향한 연결을 포기하지 않고, 감사의 역사를 잊지 않으며, 부당함을 줄이고, 존재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이로운 방향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단절해야 할 것은 부당함이며, 보전해야 할 것은 합당한 가치이고, 연결해야 할 것은 더 나은 의미와 가능성입니다.이것이 진실을 향한 방향성이며, 존재적 성숙과 문명의 유지보전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cdcd4bbe333cb9fcd1a395176cba8dcc062e5ef8.jpg" class="fr-fic fr-dib">●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08:52: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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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60</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e2c04819333d9cf6dc7b25003418b9b422a855ed.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247px;">&ldquo;야,&nbsp;걔 있잖아,&nbsp;애가 좀 맹하지 않냐?&rdquo;&nbsp;멍청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맹盲&nbsp;자는 한자 그대로 눈目이 망亡했다는 뜻이겠다.&nbsp;눈이 망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인데 멍청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nbsp;하지만 그 아이만 맹한 것이 아니다.&nbsp;인간은 누구나 맹하다.&nbsp;누구 할 것 없이 멍청하다는 말이다.&nbsp;따라서 누가 누구 보고 맹하다는 말을 사용하면 오류다.&nbsp;왜 그럴까?&nbsp;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nbsp;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nbsp;우리는 길거리의 개나리를 눈으로 보고 개나리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개나리가 뇌 속에서는 어떻게 스캔되어 있을까.&nbsp;눈으로 본 개나리와 뇌 안에 시신경으로 전달된 개나리의 이미지는 같을까.&nbsp;인간의 눈에는 놀라운 점이 있다.&nbsp;맹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사람에게는 맹점이라는 것이 있다.&nbsp;어떤 이지미가 망막에 전달되도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곳이자 빛에 무감각한 곳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맹점이라 부른다.&nbsp;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본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nbsp;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시각에 늘 그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nbsp;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세상을 다 보지 못한다.&nbsp;따라서 다른 사람을 보고 맹하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다.인간이 왜 맹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실험이 있다.&nbsp;왼쪽 눈을 감은 채 그림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라.&nbsp;그 때 그림 전체를 눈에서 약&nbsp;40cm&nbsp;떨어뜨려 이리저리 움직여보라.&nbsp;그러면 결코 작지 않은 검은 점&nbsp;A가 그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nbsp;이 그림은 다른 종이에 그대로 옮겨 그린 뒤 검은 점&nbsp;A를 관찰해도 된다.&nbsp;점&nbsp;A가 얼마나 커져야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nbsp;그리고 점&nbsp;A가 있는 곳에 점&nbsp;B가 오도록 그림을 돌린 다음 똑같은 관찰을 해도 된다.&nbsp;그러면 점&nbsp;B를 지나는 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라.이 실험은 우리에게&nbsp;&lsquo;안다는 것&rsquo;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해준다.&nbsp;일본의 뇌과학자인 요로 다케시는&nbsp;『바보의 벽』이란 자기 책에서 뭔가를 안다는 것이 잡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nbsp;그러면서 그는 앞의 실험처럼 사실을 아무 것도 모르면서&nbsp;&lsquo;알고 있다&rsquo;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말한다.&nbsp;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nbsp;인간은 결국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존재다.&nbsp;그렇다면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며 추구하는 지식이란 무엇인가?&nbsp;지식은 잡학이 아니다.&nbsp;아무 것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고 보고 있으며 눈으로 보는 개나리가 진짜 개나리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사회다.&nbsp;그렇다면 요로 다케시의 말처럼 그런 사회는 무서운 사회다.&nbsp;눈으로 보는 개나리가 뇌 속에 스캔된 개나리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현실의 자세한 모습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nbsp;즉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nbsp;착각 속에 있는 인간이 더 큰 착각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nbsp;절대적인 진실,&nbsp;객관적인 사실,&nbsp;본질 같은 것이 존재할까?&nbsp;서양 사상의 토대에는 이러한 것들이 전제되어 있지만 동양 사상은 그렇지 않다.&nbsp;사물을 보되 보지 못하고 어떤 사실을 알고 있되 알지 못한 채 더 큰 착각을 자초하던 서양 사상은&nbsp;20세기에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끔찍한 사고를 치는 기반이 되었다.&nbsp;최근에야 프랑스의 랑시에르 같은 사상가가 자기 책&nbsp;『무지한 스승』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 없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나는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기에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계몽사상이 유럽을 지배하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nbsp;착각은 이데올로기를 만든다.&nbsp;이데올로기라고 하니까 지레 겁먹을 이유는 없다.&nbsp;이념,&nbsp;아이디어 등의 뜻으로 쓰이는&nbsp;idea에 논리를 뜻하는 접미사가 붙은 것이 이데올로기니까 말이다. idea란 그리스어로&nbsp;&lsquo;본다&rsquo;는 뜻이다.&nbsp;이데올로기란 따라서 세상을 보는 논리다.&nbsp;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인데도 세상을 보는 논리가 마치 존재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고집하다 보면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만다.&nbsp;이데올로기는 그 안에서&nbsp;100%&nbsp;진리다.&nbsp;내가 세상을 보는 논리가 진리이듯이 나의 이데올로기,&nbsp;우리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엄청난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진리이자 절대적인 진실이다.&nbsp;따지고 보면 나의 이데올로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nbsp;인간은 근본적으로 맹한 존재이니까.&nbsp;그런데 이러한 착각이 인류의 비극을 불러 왔다.&nbsp;무섭고 공포스러운 일이다.&nbsp;지식이 아니라 잡학이 난무하는 세상은 무섭고 위험하다.&nbsp;우리는 흔히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말하고 또 꿈꾼다.&nbsp;새 정부 들어서서 위장 전입,&nbsp;병역 기피,&nbsp;세금 탈루를 기본&nbsp;3종 세트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부지기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nbsp;상식은 이런 곳에서만 안 통하는 것이 아니다.&nbsp;지구온난화가 탄산가스의 증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으며 비타민&nbsp;C가 몸에 좋다며 열심히 챙겨 먹는다.&nbsp;무엇이 진실인가?&nbsp;과연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인 것인가?&nbsp;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nbsp;과학철학자인 칼 포퍼는 반증될 수 없는 이론은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nbsp;비타민&nbsp;C가 몸에 좋다면 그것이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nbsp;예전에 채식의 배신』이라는 책이 논쟁거리로 떠오른 적이 있다.&nbsp;절대적 채식주의자vegan이었던 리어 키스는 채식주의를 배신하며 쓴 이 책에서 암 세포가 비타민&nbsp;C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며 자기의 주장을 논증한다.&nbsp;과연 무엇이 진실일까?&nbsp;이 세상에 과연 확실한 것은 얼마나 될까?&nbsp;담배는 과연 나쁠까?&nbsp;담배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싱크대의 가스렌지에서 나오는 프로판가스가 더 나쁜 것은 아닐까?&nbsp;수많은 언쟁들이 오고 가겠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만다.&nbsp;막걸리로 식초를 만들어 아내의 유방암을 고쳐주었다는 사람이 방송을 타고 싱싱한 채식으로 건강을 지켰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nbsp;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지식일까?&nbsp;정보가 흘러넘치는 시대는 잡학이 판을 친다.&nbsp;어떤 맥락에서는 그럴 수도 있고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식이 인정을 받는 세상이 와야 한다.성찰이 필요한 세상이다.&nbsp;서양 문화는 성찰보다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인식한다고 하는 특별한 상황을 마주하기를 전통적으로 꺼려 왔다.&nbsp;그래서 칠레의 유명한 인지과학자인 바렐라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살아 왔다고 말한다.&nbsp;앎을 알기 전에 다 안다고 이야기하고 앎을 알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nbsp;우리의 삶에 실제로 가장 가까운 우리의 경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바렐라 말대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nbsp;기회가 한 번 되시면&nbsp;KBS&nbsp;다큐 프로그램인&nbsp;을 보시길 강추한다.&nbsp;성찰이란 자기가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인식하는 과정이다.&nbsp;다큐 프로그램처럼 우리가&nbsp;90%&nbsp;이상을 무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면 내가 살고 있고 보고 있으며 알고 있다고 인식하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nbsp;과연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nbsp;&nbsp;&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08:41:29 +0900</pubDate>
		</item>
		<item>
			<title>&lt;소리숲&gt; 업데이트</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9</link>
			<description><![CDATA[https://james-music-room.jogel4u.chatgpt.site/<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9084a83c2f272c45e9ff3542ace485044891e05b.jpg" class="fr-fic fr-dib"><br>https://james-music-room.jogel4u.chatgpt.site/<br>이번에는 해외 클래식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항목을 넣었습니다.&nbsp;뉴스와 방송을 분리시킨 다음 각각의 항목들을 충실하게 했습니다.&nbsp;팟 캐스트는 검색 지역에 따라 검색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07:31:29 +0900</pubDate>
		</item>
		<item>
			<title>&lt;손안의 도서관&gt; 업데이트</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485b45575053c8c81c4ddcdb47075a8435339bf5.jpg" class="fr-fic fr-dib">https://epn-pocket-reader.jogel4u.chatgpt.site이번 업데이트에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인 공영 뉴스 사이트 메뉴를넣었습니다. 이 뉴스 사이트를 통해 해당 국가의 신문들을 무료로 읽을 수 있고, 언어 학습도 할&nbsp;수 있습니다. 과 연동시키면 그 기능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습니다.&nbsp;은 단순히 글만 읽는 앱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다양한 기능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멀티 앱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사용해보세요.&nbsp;<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02 Nov 2026 07:16: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장편소설_칸첸중가_030_촛불_만행</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1/1c6925c72df1c74a895fad6048acaf9994531b4a.png" class="fr-fic fr-dib"><br>촛불서쪽 능선에 별들이 돌아와 있었다.&nbsp;어디 갔다가 인제 왔나 싶게 듬성듬성 보이는 별들이 반가웠다.&nbsp;별들과 나 사이에 언제 그렇게 도타운 정이 생겼나 싶기도 했다.&nbsp;스님도 오랜만에 보는 별들이 반가웠는지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다가 또 멈추면서 한참씩 별들을 바라보았다.파업으로 차가 다니지 않는 저녁 거리는 한적했다.&nbsp;행인이 많지 않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nbsp;산책하기 그만이었지만 너무 어두웠다.&nbsp;정전이었다.&nbsp;파업으로 인한 단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nbsp;우리가 걷던 길가의 창문마다 촛불이 어른거렸다.페마네 뚱바집 창가에도 촛불이 켜져 있었다.&nbsp;무심코 문을 열었는데 안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nbsp;테이블마다 촛불이 켜져 있어서 생일 파티를 하는 것 같았다.&nbsp;늘 그랬듯이&nbsp;&lsquo;안녕하세요.&rsquo;&nbsp;하며 반갑게 맞이한 페마가 우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네 명이 앉는 탁자에 세 명이 앉아 있었는데 일행이 아닌 현지인 한 사람을 옆 탁자로 합석시키면서 만든 자리였다.&nbsp;나란히 앉아 있는 남녀가 나란히 앉은 우리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후 그들의 대화를 이어갔다.&nbsp;일본어였다.&nbsp;서른 살 전후의 일본인 남녀는 만두와 뚱바를 앞에 놓고 있었다.우리도 만두와 뚱바를 주문하고 스님에게 뚱바에 관해서 설명했다.&nbsp;앞에 앉은 커플은 일본어로,&nbsp;우리는 우리말로 소곤대는 중에 우리 뚱바가 왔다.스님은 페마가 보온병을 들고 와서 뚱바 통에 뜨거운 물을 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nbsp;&lsquo;정말 곡차로군요&rsquo;&nbsp;했다.&nbsp;빨대로 한 모금 빨아 보고는&nbsp;&lsquo;많이 마시면 취하겠네요&rsquo;&nbsp;했다.&nbsp;김이 나는 뜨거운 만두를 한 입 먹어 보고는&nbsp;&lsquo;알리멘트보다 낫네요&rsquo;&nbsp;했다.스님은 각양각색의 현지인들이 촛불을 켜놓고 우글거리는 그 우중충한 장소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듯했다.&nbsp;그래도 뚱바의 빨대를 빨면서 만두 한 접시를 다 비웠다.다시 와서 뚱바 통에 뜨거운 물을 살금살금 붓고 난 페마에게 스님을 소개했다.&nbsp;페마는 반색하면서 합장했다.&nbsp;스님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합장으로 답례했다.우리나라에서는 비구니 스님이 그런 대폿집에서 남자와 나란히 앉아 고기만두를 안주로 술을 마시고 있으면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다르질링의 불교도들이 주로 모이는 페마 네 집에서는 그리 유난스럽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nbsp;티베트의 스님들은 염소나 야크 같은 짐승의 고기를 거의 주식처럼 먹는다는 정도는 스님도 알고 있었다.&nbsp;그러나 칸첸중가 기슭에서의 뚱바는 술이 아니라 남녀노소는 물론 승속이 한자리에서 함께 즐기는 발효차 정도라는 걸 현장에서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nbsp;스님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ldquo;출가하기 전에 저도 이런 대폿집을 해보고 싶었습니다.&rdquo;&ldquo;네?&nbsp;방금 이런 대폿집을 하고 싶다고 하셨나요?&rdquo;&ldquo;네.&nbsp;정말.&nbsp;꼭 이런 대중적이고 허름한 대폿집에서 저 보살님 같은 여주인 노릇을 해보고 싶었어요.&nbsp;지금도 미련이 남아 있어요.&nbsp;저 보살님 정말 부럽습니다.&nbsp;큰스님 같아요.&rdquo;<br>잠시 멍했었다.&nbsp;비구니로써 있을 자리가 아니다 싶어서 불편한 줄 알았는데 페마가 부럽다니!&nbsp;페마가 큰스님 같다니!&nbsp;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온병을 들어서 마개를 빼고는 내 뚱바 통에 조심조심 뜨거운 물을 부어 주면서 말했다.&ldquo;어때요?&nbsp;잘하고 있나요?&rdquo;&ldquo;네,&nbsp;하지만 큰스님한테 좀 더 배우셔야겠습니다.&rdquo;&ldquo;그야 물론이죠.&nbsp;흐흐흐.&nbsp;아예 여기 취직할까요?&rdquo;그때 페마가 왔다.&nbsp;페마는 한쪽 끝이 부러진 재봉 가위를 들고 와서 초의 심지를 짧게 잘랐다.&nbsp;심지가 너무 길어서 촛농이 줄줄 흐르고 촛불이 일렁였기 때문이다.&nbsp;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페마는 무심하게 다른 테이블의 심지를 자르러 갔다.&nbsp;내가 스님에게 물었다.&ldquo;출가하시기 전에는 뭘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nbsp;괜찮으시면 말씀해 주시죠.&rdquo;<br>스님은 잠시 긴장하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nbsp;그리고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nbsp;&ldquo;흐흐흐&hellip;&hellip;.&nbsp;군인이었어요.&rdquo;<br>&ldquo;군인이라면 여군이셨다는 얘기로군요?&rdquo;<br>&ldquo;네,&nbsp;여군 하사관이었어요.&nbsp;더 자세한 건 지금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rdquo;<br>&ldquo;네,&nbsp;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nbsp;그런데&hellip;.&nbsp;동작 그만!&nbsp;차렷!&nbsp;마리아 호텔에서 저한테 그런 명령했던 것 기억나세요?&nbsp;뒤에다 욕을 붙여서 말입니다.&nbsp;그 뒷날부터 안 보이셨으니 기억나실 겁니다.&rdquo;&ldquo;그랬나요?&nbsp;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nbsp;저는 그날 너무 취했어요.&nbsp;누군가가 저를 방에 데려다줬다는 기억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처사님이셨군요?&rdquo;&ldquo;네,&nbsp;저였습니다.&nbsp;그러면,&nbsp;제 따귀를 때렸던 것도 기억이 안 나겠네요?&rdquo;<br>스님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nbsp;대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nbsp;&ldquo;승려로서 그렇게 취해 보기는 처음이었어요.&rdquo;&ldquo;군에서는 무척 취한 적이 더러 있었다는 얘기도 되는군요?&rdquo;"그렇습니다.&nbsp;말년에는 거의 중독 수준이었죠.&nbsp;하하하.&rdquo;<br>&nbsp;만행<br><br><br>실내가 밝아졌다.&nbsp;파상이 촉광이 높은 칸델라 석유등을 들고 들어와 카운터 탁자 위에 올렸다.&nbsp;실내가 밝아지자,&nbsp;촛불을 끄는 손님들이 있었고 그대로 둔 손님들도 있었다.&nbsp;일본 청년이 촛불을 꺼도 되겠냐고 영어로 물었다.&nbsp;오케이 했더니 그는&nbsp;&lsquo;땡큐&rsquo;하면서 엄지와 검지로 심지를 잡아서 우리 탁자의 촛불을 껐다.스님과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ldquo;출가하신 지는 몇 년이나 되셨는지요?&rdquo;&ldquo;출가 하고 십 년이 안 된 스님들은 저처럼 이렇게 만행할 처지가 못 될 겁니다.&rdquo;&ldquo;왜 그렇습니까?&rdquo;&ldquo;십 년까지는 안 놔줘요.&nbsp;절에서 이런저런 소임을 맡아 일하고 있어야 때가 되면 강원에도 보내 주고 선원에도 보내 주고 그럽니다.&nbsp;그러다 보면 십 년이 금방 지나가죠.&nbsp;저는 작년&nbsp;4월에 도반들 셋과 성지 수행을 나왔던 겁니다.&rdquo;&ldquo;성지 수행?&nbsp;성지 순례와 같은 말인가요?&rdquo;&ldquo;예,&nbsp;같은 말입니다.&nbsp;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부터 열반하신 쿠시나가르,&nbsp;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와 최초로 설법한 사르나트까지&nbsp;4대 성지와 그 주변의&nbsp;8대 성지에 속하는 지역들을 비구니 셋이 순례했던 거지요.&nbsp;겨우 석 달 좀 넘는 동안에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될 뻔했던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어요.&nbsp;십 년을 공부하고도 나라는 인간이 겨우 이 정도인가 싶어서 무참했고요.&nbsp;그때 얘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아요.&nbsp;천천히 할게요.&rdquo;나중에 시킴의 욕숨이나 조레탕에 머물 때 더 들은 바에 의하면 스님들의 성지 순례 여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세 비구니의 화합이었다.&nbsp;숙소,&nbsp;음식,&nbsp;교통편의 선택은 물론이고 머무느냐?&nbsp;떠나느냐에 대한 판단에 숱한 갈등이 따랐다.&nbsp;결국 다수결로 정하기로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점점 서로가 불편해졌다.&nbsp;처음에는 감수하고,&nbsp;중간에는 인내하며 감추었으나 결국 짜증을 드러내고야 말았다.&nbsp;폭염과 피로,&nbsp;그리고 신경 쇠약으로 인해 점점 더 서로를 견디기 어려워졌다고 했다.스님 표현에 의하면&nbsp;&lsquo;성질 못된 인간이 중 된다&rsquo;라는 말이 있는데 결국 못된 성질이 제각기 다 드러나더라고 했다.&nbsp;큰 절의 강원에서 또 만나고 또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도반이 되었던 세 스님은 의기투합 된 상태로 떠났지만 목적한 순례가 끝난 후에는 서로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넌더리가 났다.성지 수행은 결과적으로 인내를 시험하는 수행이었다고 스님은 말했다.&nbsp;그토록 단단하게 뭉쳐져 있던 화합과 인내는 성지에서 깨지고 또 깨졌다.&nbsp;성지 순례 도중에도 물론 참회하고 또 참회했지만,&nbsp;순례를 마친 후에는 서로 주고 서로 받은 상처를 각자 다스리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계속>#장편소설_칸첸중가_030_촛불_만행]]></description>
			<author>김홍성</author>
			<pubDate>Sun, 01 Nov 2026 13:06:26 +0900</pubDate>
		</item>
		<item>
			<title>1980년대 이문열의 韓民族 앞날에 對한 우려</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5</link>
			<description><![CDATA[한민족의 말살위기에 관련하여 필자가 여진족과 토착왜구 少數者들의 위협을 발설한 것에 대해 이러한 논의를 두려워하고 오직 좌우이념이라는 허울로 감추기만을 원하는 세력은 마치 일개인의 비약적인 발상인양 일축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역사서 자료 (요즘은 歷史書 專門家가 아니라도 인공지능을 통해 특정 사항의 역사서의 수록 여부를 알아보기 가능하다.) 그리고 정감록 및 지금도 유튜브에 관련 노래들이 있고 사진자료로도 있는 6&middot;25 당시의 북한 세력에 對한 호칭에 따른 것으로서 전혀 奇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관념은 근래 들어 거짓 좌우 이데올로기 構圖化에 의해 억눌려졌을 뿐 과거에는 더욱 자연스러웠던 것이다.작가 李文烈의 1980年代 作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를 살펴보면 &lsquo;젊은&rsquo; 작가의 우리 민족의 앞날에 對한 우려가 생생히 나타나있다.&nbsp;서두에는 &lsquo;壯麗했느니, 우리 그 落日&rsquo;이라는 소제목이 있는데 (별도의 단편으로도 작가의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lsquo;주장&rsquo;이 실려 있다.&ldquo;우리의 영광스런 과거를 치욕 속에 묻으려는 못된 세력이 점점 커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못된 세력이란 우리 중에 섞여 살고 생김도 차림도 비슷하나, 피는 우리와 조금씩 달리하는 되(胡)트기, 양(洋)트기, 한자(韓子=일본혼혈아)들을 이른다. 앞으로도 종종 얘기되겠지만, 그것들은 어쩌다 제 핏줄에 튀긴 이족(異族)의 피가 무슨 요사라도 부리는지 좋을 때는 우리 중의 하나로 가만히 있다가도 정작 긴요한 대목에 오면 갑자기 한겨레 아닌 딴 겨레가 되고 만다.&rdquo; (&lsquo;되*&rsquo;라고 불리는 중국인에 對한 卑稱은 본래 만주족을 향한 비칭이다.)자칫 실제의 혼혈인을 指稱하는 것으로 오해되면 인종차별에 민감한 현대사회에서 이슈로 펼치기 곤란하겠지만 이러한 論議의 원인은 全的으로 해당자들의 행동에 따른 것이지 결코 그들의 외모나 족보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결국 이러한 差異의 근원은 윤회와 인연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될 밖에 없다.) 전혀 현실적인 &lsquo;민족&rsquo;이나 출신에 對한 차별적 視角이 아닌 것이다.여하튼 소설에서의 되(胡)트기, 韓子. 양(洋)트기는 필자가 주장하는 여진족, 토착왜구, 서양세력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임은 의심의 餘地가 없다.&nbsp;<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d8395ff764a50e072080eb7c4da7c3ce9e687679.jpg">625참전위부사관연맹 발행 625 기록서 중에서]]></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14:27:23 +0900</pubDate>
		</item>
		<item>
			<title>거짓 좌우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고 대한민국 對 反대한민국의 구도로 가야한다</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dfef7167d015728b8021262545036d2313a88bac.jpg">챗지피티거짓 좌우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고 대한민국 對 反대한민국의 구도로 가야한다&nbsp;所謂 진보라 불리는 집단의 反日 시위에서 자주 나오는 구호가 &ldquo;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rdquo;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抗日 운동가의 글귀도 못 읽게 만든 자들이다. 전통의 한자문명에 敵對的인 이들 세력을 필자는 용비어천가 등의 역사서와 정감록 그리고 6&middot;25당시의 敵에 對한 호칭 들에 근거하여 여진/말갈/오랑캐라 지칭했지만 그들의 自稱은 물론 그들과 형식상 대립하는 자칭우파세력에게서도 한결같이 &lsquo;좌파&rsquo;라는 순화어(?)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보 理念의 참뜻을 안다거나 맑스의 사상을 理解하고 감화되어 信條를 지킨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들은 저네의 恨을 풀고 이익을 얻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오직 이 땅의 역사문화의 연속성을 단절하여 저들이 상대적으로 盛하는 세상을 목표할 뿐이다.&lsquo;과거의 비주류&rsquo;를 자처하는 그들이 이렇듯 강성하게 된 배경에는 일제침략으로 기존의 주류사회가 국외로 망명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일제의 한글전용소설장려 문화정책과 한글날 제정으로 日帝의 德을 보아 興한 그들이 &lsquo;역사&rsquo;를 입에 달고 다니며 反日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대륙 출신의 그들로서는 이 나라가 接大陸 脫海洋으로 나아가야 그들의 성향에 맞는 활동영역을 얻기 때문이다. 흔히 親大陸反海洋이냐 親海洋反大陸이냐로 좌우를 나누려고들 애쓰고 있는데 이것은 理念思想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대만 좌파 민주진보당은 극렬 親美親日 성향이다.)&nbsp;이렇듯 소위 좌파가 그들의 정체를 숨기고 대한민국 붕괴를 向해 공작하는 중에 그들과의 대립진영을 만들어 우파를 자칭하는 것은 정치평론을 위해서는 편리한 設定이지만 소모적인 진영싸움의 승부를 위해서만 국민의 표가 行使될 뿐 정작 국민에게 중요한 事案은 국민의 표로 선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國利民福에는 得이 되지 못한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부추기는 바 상대진영에의 투쟁에너지를 승화하여 現代史가 발전적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對 反대한민국의 正惡對決의 구도로 가야 한다.&nbsp;趙甲濟 前 月刊朝鮮 社長은 2001년도의 발간서적에서 이미 &ldquo;이제 대한민국의 반격이 시작된다&rdquo;고 宣言한 바 있다. 이 책의 머리글에서는 대한민국 다수 주류층의 실체를 생활인의 관점에서 보고 있지만 그 의미는 相通한다. &ldquo;주류층은 소수의 反대한민국 세력한테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 다녔다.&rdquo;, &ldquo;한국의 주류층이 노예근성을 버리고 한국사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선 국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rdquo; 하고 &ldquo;주류층이 換骨奪胎하고 守勢에서 攻勢로 轉換할 계기&rdquo;의 필요성을 提起했다,&nbsp;대한민국을 지키자는 말은 근래에도 많이 나온 바 있어서 그저 나라 지키자는 상투적인 구호로 넘기고 그 의미가 실감나지 않을 數도 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근본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결코 그 나라의 체제에서 신분적 혜택을 누리는 계층을 보호하자는 목적에서가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이 이제까지 이어온 자신들에게 적합한 문화 환경 속에서 資質을 기르고 情緖를 함양하며 저마다의 인생성취를 최대한 이룰 기회를 제공하고 그러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참된 의미는 대한민국의 근원이 존중되고 대한민국 초기에까지 이어진 以前의 역사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新羅 高麗 朝鮮을 이어받아 大韓帝國으로 기초를 세웠고 일제하 항일투쟁에서도 계승되었으며 대한민국초기까지 이어온 民族精神文化의 繼承을 방해하는 세력은 대한민국의 敵이다.反대한민국 세력이란 공연히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다. 그들은 가능만 하다면 漢字로 된 大韓民國이라는 國名을 &lsquo;아름누리&rsquo; 따위의 저들대로의 명칭으로 바꾸려는 자들이다. 다만 그들은 &lsquo;아직은 때가 아니다&rsquo;는 것을 인식하여 칼집 속에 감추어두었을 뿐이다. 당연히 그들은 할 手만 있으면 國旗가 너무 어렵다며 太極旗도 (아마도 한글 紋樣으로) 바꾸자고 할 者들이다. 그리고 愛國歌도 (&lsquo;임을 위한 행진곡&rsquo; 등으로) 바꾸려는 것임은 이미 그들이 문재인 정부 때 試圖한 바도 있었다. 反대한민국 세력의 國名과 國旗 그리고 愛國歌에 對한 貶下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lsquo;아직은&rsquo; 국민여론을 얻지 못해 숨겨두고 있을 뿐이다. 기회만 되면 언제라도 칼집에서 꺼낼 준비가 그들은 되어 있다. 이미 경기도 북부를 분할하여 평누도(평화누리도)를 만들려 했던 것에서도 나타나있다. 그들은 국민의 &lsquo;변화&rsquo;에 앞서서 민족정신을 파괴하려고 애썼다. 과거 국민일보가 가로쓰기로 시작했다가 반대여론을 맞자 &lsquo;아직은 아니다&rsquo;며 철회했다가 다시 나중에 다시 국민이 &lsquo;변화&rsquo;되니 所願을 이루었던 것처럼 아직 국민여론이 불리하면 숨겨두고 있다가 계속되는 세뇌교육으로 언젠가 &lsquo;국민여론이 바뀌면&rsquo; 애국가는 물론이고 국명과 국기 까지 바꿀 것임은 충분히 예상된다.근래에도 光化門 현판을 계속 흔들고 李舜臣 將軍像의 碑文도 한글로 바꾸자고 하는 자들은 광화문의 환경을 高宗 때가 아닌 世宗 때의 모습으로 만들자고 한다. 세종의 여진족편입은 링컨의 흑인노예 해방에 비교된다. 미국흑인에게 링컨이 중요하듯이 여진족에게 세종은 숭앙의 대상이다. 다만 미국이 아무리 과거의 인종차별을 보상하고자 흑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편다 하더라도 미국이 흑인문화가 지배하는 나라로 탈바꿈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lsquo;소수 비주류 종족&rsquo;의 주도권은 계속 노골화 되어가고 있다.&nbsp;명목상 단일민족인 한국사회가 인종차별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들도 (외세를 업기 위하여?) 미국의 흑인민권투쟁을 롤 모델로 삼은 바 있다. 안철수 의원이 데뷔시절 크게 정치적 주목을 받았을 때 박원순 서울시장후보 지원연설에서 미국 흑인여성의 버스에서의 흑인민권운동을 들고 나왔는데 당시 얼마간의 침묵 끝에 나온 그 메세지는 안철수를 &lsquo;활용&rsquo;하려는 &lsquo;자문위원단&rsquo;의 지시였음이 충분히 추정가능하다. 그 외에도 우리 사회의 대립구도를 미국의 인종 간 대립에 빗대는 정치권의 발언은 비일비재했다.우리말의 表記와 외래어의 表記에서도 우리 습성대로의 자연스러운 언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그들 세력의 정체가 정치적으로 드러나도록 分離해야 대한민국 주류 국민이 권익을 찾을 길이 열릴 것이나 反대한민국 세력은 비록 所謂 진보좌파정당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고도의 술책으로 兩黨에 고루 분포하면서 국민의 선택을 피하며 暗躍하고 있다. 所謂 정치적 보수우파에는 포함되고 있으나 역시 &lsquo;과거 비주류&rsquo;인 친일 세력도 그들에 대립할건 대립하되 중요 事案에서는 동조하거나 침묵한다. 상대방의 가족이 언제 골프를 쳤다는 등 사소한 것에도 시비를 걸며 싸움을 일삼지만 정작 대한민국 파괴의 각종정책에 대해서는 약속했듯이 조금도 문제 삼지 않는다. 바로 전 이재명대통령의 한글날 거짓말에 침묵을 지킨 것은 물론 문재인 정권 때 더민당의원들의 교육과정에서의 弘益人間 조항 삭제시도에 관해서도 재야 활동가 몇몇이 항의했을 뿐 국힘당 측 의원은 전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의 &lsquo;반민족&rsquo; 행위를 부각하면 크게 정치적 이익을 얻을 手 있음에도 쌍방의 &lsquo;페어플레이(?) 협정&rsquo;에 따라 일언반구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은 兩黨은 물론 양당의 分派에서도 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反대한민국 성격이 적은 쪽을 支持하기 위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種族分派끼리의 승부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논설집 〈대한민국의 반격이 시작된다〉의 본문 내용에도 있듯 한민족은 유목민족이자 해양민족으로서 대륙과 해양을 융합한 進就性을 추구함이 당연한 것인데 그것은 우리 歷史의 연결선 위에서 실행될 일이지 自虐的인 민족파괴로 가능할 일이 아니다. 大韓民國의 반격의 실천은 이제 더는 늦출 수가 없게 되었다.&nbsp;]]></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14:23: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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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무통의 전체주의 시대</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3</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f834042d402faa90947de0fdda626ddfdfbb11eb.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192px;">부자 되세요!&nbsp;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nbsp;『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나온 지&nbsp;13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세월 참 빠르다.&nbsp;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터널로 진입하던 그 시절 사람들도 욕망을 충족시키는 질주를 시작했다.&nbsp;그러나 욕망의 본질이 지연이었던가.&nbsp;욕망은 한 때 돈의 쾌락을 가져다주었지만 욕망 충족은 지연되었고 그 사이 사람들은 지쳐갔다. 2008년 금융위기가 몰아친 후 하우스 푸어 얘기가 나왔고 모두가 부자가 될 것 같던 꿈은 한낱 신기루였음이 드러났다.&nbsp;부자의 꿈이 부서진 사람들은 딴 곳으로 눈을 돌렸다.&nbsp;힐링 열풍은 그래서 일어났다.&nbsp;신체의 욕망을 한껏 부풀리려던 꿈,&nbsp;쾌락을 추구하며 고통을 피하려던 꿈이 상처를 입자 상처 치유에 나선 것이다.&nbsp;하지만 힐링이 진정한 대안인가.&nbsp;어찌 보면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피하고 또 다시 쾌락을 꿈꾸려고 준비하는 운동 아닐까.&nbsp;지연이 그 본질일망정 욕망은 끝없이 확장해 나가고 경계를 넓혀 나가는 운동 아니던가.&nbsp;부자 되기나 힐링은 고통을 피하려는 우회로일 따름이다.모리오카 마사히로의 책&nbsp;『무통문명론』은 부자 되기나 힐링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고통과 쾌락의 변증법에 주목하고 고통 없는 문명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얻자고 주장하는 책이다.&nbsp;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인간은 과연 고통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nbsp;가령 이빨이 아파 밤새 끙끙거리는 사람이 게보린을 먹지 않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까?&nbsp;누구나 게보린을 먹고 고통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nbsp;얼마 전 학교 비정규직 환경미화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nbsp;환경미화원들이 청소를 거부하자 학교 직원들이 동원되었고 과 조교들까지도 쓰레기 청소를 했다.&nbsp;환경미화원에 대한 불만이 나타났다.&nbsp;필자가 툴툴거리는 조교에게 돈 백도 못 받는 환경미화원이 네 부모라고 생각해 보라고 하자 대뜸 우리 부모는 그러지 않을 거니까,&nbsp;환경미화원이 되지 않을 거니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nbsp;이 말에 속으로 열 받던 필자는 모두가 이렇게 경제적 고통이 나한테는 닥치지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nbsp;치통이든 경제적 고통이든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고통을 우회하려고 하는구나.&nbsp;누가 노동자가 되려고 하고 돈 백도 안되는 돈을 받으려고 하겠는가마는,&nbsp;그렇다면 실제로 저임금을 받는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nbsp;그 사람들이라고 고통을 피하고 싶지 않겠는가.모리오카 마사히로의 책은 이러한 경제적 고통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지만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nbsp;자본의 자기증식운동이 욕망과 쾌락의 파이를 키우고 고통을 애써 피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는&nbsp;&lsquo;무통&rsquo;을 키워드로 하여 현대 생활 속에 두루두루 개입한 문화적&nbsp;-&nbsp;제도적 무통화 장치를 드러내고 무통격류에 휩쓸려 살아가는 현대 문명의 문제를 다각도로 고찰한다.&nbsp;사람이 힐링과 웰빙을 통해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치통약 같은 문명의 이기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nbsp;모리오카 마사히로는&nbsp;1930년대 폰 아이크슈테트von Eickstedt(1892-1965)가 사용한&nbsp;&lsquo;자기가축화&rsquo;란 말을 빌어 인간이 스스로를 가축으로 만드는 자기가축화를 이야기한다.&nbsp;그에 따르면 문명이란 인간이 곧 가축이 되는 것이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의 말을 들어 보자.&nbsp;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인간은 가축공장의 가축처럼 보인다.&nbsp;좁은 우리에 갇혀 온도가&nbsp;인공적으로 조절되고 음식은 자동공급 장치를 통해 충분히 제공되며 먹고 자는 것만&nbsp;이 생활의 전부인 닭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nbsp;인간이 가축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nbsp;인간에게도 한 것은 아닐까.&nbsp;그것을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힐링 열풍과 넘쳐나는 웰빙 식품,&nbsp;아파트 이름이 웰리치wellrich인 것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욕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nbsp;다들 잘 나가고 싶어 하고 자기나 자기 가족들만큼은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nbsp;건강,&nbsp;무병장수가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긴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은 통증,&nbsp;아픔,&nbsp;불안,&nbsp;공포에서 탈출하고자 애쓴다.&nbsp;주변의 통증은 웬만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애써 채널을 돌린다.&nbsp;치통이 괴로워 고통을 잊고자 게보린을 먹듯이 고통을 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일까.&nbsp;중환자실에 누워 영양 섭취와 약 처방을 받으며 온도가 쾌적한 방 안에서 기분 좋게 잠만 청하는 환자는 닭 같은 가축의 모습과 흡사하다.&nbsp;여기에는 통증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nbsp;인간이 가축을 가축으로 기르고 거기서 인간 스스로를 가축으로 기르고 관리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nbsp;고양이와 강아지를 반려동물로 키우고 옷 입히고 사료를 주거나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려가는 것이나 인간이나 무엇이 다를까.&nbsp;그런데 현대 문명의 종착지가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대로 인간의 자기가축화라면 뭔가가 꺼림칙하긴 하다.&nbsp;문명을 이 종착지까지 끌고 온 것은 욕망이었기 때문이다.&nbsp;고통이 적고 쾌락이 가득한 인생,&nbsp;방망이를 대신한 전자자동세탁기,&nbsp;해피 엔딩,&nbsp;노동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욕망 등 욕망의 자맥질에 의해 종착역에 도달한 문명의 끝이,&nbsp;가축이라니,&nbsp;인간의 가축화라니 꺼림칙하고 허망하기도 할 것이다.&nbsp;그래서일까.&nbsp;무통의 시대는 무감을 낳고 무감은 사이코패스를 낳는다.&nbsp;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쫓는 순간 사람들은 감정을 상실하고 사이코패스가 되어 간다.&nbsp;사이코패스가 죽임의 욕망이 절정에 이른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존재다.&nbsp;아주 가끔씩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nbsp;99.9%의 절대 다수가 고통을 피해 쾌락과 욕망의 길로 접어든다.&nbsp;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예 화성인이 될 정도다.&nbsp;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결코 두고 볼 수 없다는,&nbsp;나에게 고통이 산사태처럼 덮치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도 거기서 한 몫 한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에 따르면 무통문명에는 무통문명을 작동시키는 몇 가지 원리가 있다.&nbsp;첫째가&nbsp;&lsquo;존재 말소&rsquo;다.&nbsp;이것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간단한 원리다.&nbsp;이빨이 아프면 게보린을 먹는 것이다.&nbsp;매일 보살펴야 할 노인이 고통스럽다면 안락사 시키면 되고 출생 전 태아가 중증장애자임을 알고 나서 그 아이의 장래와 자신의 인생이 고통스럽게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공임신중절을 하면 된다.&nbsp;문명의 이기인 초음파 장치가 고통의 소멸을 도와주기까지 한다.&nbsp;두 번째는&nbsp;&lsquo;예방적 무통화&rsquo;의 시도다.&nbsp;앞으로 엄습할 고통을 용의주도하게 예축하여 미래에 생길 그 고통을 지금 여기서 하나씩 존재 말소 시켜가는 예방조치가 그것이다.&nbsp;힐링과 웰빙 열풍은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신체적 경제적 고통에 대비하는 예방조치다.&nbsp;도래하지 않는 미래에 투자하는 펀드 투자도 고통을 미리 막으려는 예방조치의 예라고 할 수 있다.&nbsp;세 번째는&nbsp;&lsquo;눈가림&rsquo;이다.&nbsp;고통의 원인을 존재 말소하거나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고통이 떡 하니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 자체를 기억에서 지우려고 한다. &ldquo;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한다&rdquo;는 것은 눈가림의 높은 경지에 올라선 결과다.&nbsp;이 정도 되면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부인하게 된다.&nbsp;존재를 말소하고 예방 조치를 취하고 눈가림을 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nbsp;여전히 뜨물처럼 떠오른 고통을 없애는 해독과 예정조화의 원리가 남아 있다.&nbsp;눈앞에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고통이 독이 해독되기를 사람들은 바란다.&nbsp;고통 받는 사람에게 무감한 방관자가 되면 된다.&nbsp;예정조화란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 결국 나를 돕는 길이 되기에 고통에 동참한다.&nbsp;예정조화는 타인을 돕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돕는 것을 말한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무통문명의 이러한 원리들은 사회 전체가 무통화의 격류에 휩쓸려 가게 만든다.&nbsp;세포의 대사작용처럼 사회 전체가 하나의 세포가 되어 무통화 작업을 벌인다.&nbsp;거기다가 문화적&nbsp;-&nbsp;제도적으로 넘쳐나는 무통화 장치&nbsp;-&nbsp;게임,&nbsp;도박,&nbsp;마약,&nbsp;섹스 등&nbsp;-&nbsp;는 사회 전체의 무통화 과정을 더욱 더 촉진한다.&nbsp;1985년 후지다 쇼죠는&nbsp;「&lsquo;안락&rsquo;으로서의 전체주의」라는 글을 썼다.&nbsp;후지다는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nbsp;&lsquo;안락주의&rsquo;라고 말한다.&nbsp;사람들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을 일소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nbsp;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은 청산 대상이다.&nbsp;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일에 관여되기를 두려워하고 게다가 그 두려움을 스스로 인정하기를 피하려 한다.&nbsp;그 결과 우리는&nbsp;&lsquo;기쁨&rsquo;의 감정을 잃어간다고 후지다는 주장한다.&nbsp;오늘날 세상은 고통,&nbsp;불안,&nbsp;통증,&nbsp;공포,&nbsp;아픔,&nbsp;불쾌,&nbsp;혐오 등과 쾌락,&nbsp;안락,&nbsp;욕망,&nbsp;안전 등으로 철저하게 양극화되어 있는 듯하다.&nbsp;드라마&nbsp;에 나오는 장규직과 계약직 미스 김,&nbsp;정주리의 양극화,&nbsp;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양극화,&nbsp;조절주의 경제학자인 알랭 리피예츠가 말한 모래사회hourglass society도 문제지만 무통,&nbsp;무감의 감정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nbsp;&lsquo;감정의 전체주의&rsquo;도 문제다.&nbsp;여기에는 공감이 개입할 여지도 고통 분담의 슬로건이 개입할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nbsp;고통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는&nbsp;empathy로서의 공감은커녕 그저 옆에서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나 하는sympathy로서의 공감도 턱 없이 부족하다.&nbsp;텔레비전에 나오는&nbsp;&lsquo;공감 프로젝트&rsquo;&nbsp;같은 프로그램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가 감정의 전체주의 사회로 전락해 있음을 말해준다.&nbsp;무통화의 윈리가 지배하고 무통화 장치가 도처에 널브러져 있는 이&nbsp;&lsquo;무통&rsquo;의 시대에 무통,&nbsp;무감이라는 감정의 전체주의,&nbsp;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사회 전체의 무통화를 거둬내지 않으면 안 된다.&nbsp;바야흐로 힐링의 시대다.&nbsp;도처에서 사람들이 힐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nbsp;웰빙도 마찬가지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nbsp;&nbsp;무통문명에서&nbsp;&lsquo;치유&rsquo;는 가능성이 아니다. &lsquo;치유&rsquo;는 무통문명의 흐름에 스스로를 적응&nbsp;시켜 가는 일이다.&nbsp;그리하여 자신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nbsp;&lsquo;생명력&rsquo;을 두 번 다시 일&nbsp;어설 수 없도록 무력하해 가는 일이다.&nbsp;무통문명에는&nbsp;&lsquo;병&rsquo;에 그 가능성이 감춰져 있&nbsp;다. &lsquo;병&rsquo;을 짊어진 채,&nbsp;무통화 흐름에 역행하여 쉴 새 없이 출구를 찾으려는 고독한&nbsp;싸움에 진정한 가능성이 있다.&nbsp;병을 앓는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nbsp;병을 치료해서&nbsp;치유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절망이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 식으로 말하면 힐링은 무통문명에 적응하는 것일 뿐이지 사회 전체의 무통화에 역행하거나 그것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다.&nbsp;어찌 보면 힐링은 사회 전체의 무통화에 순응하는 것이자 그것을 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nbsp;모리오카 마사히로 식으로 다시 말하면 힐링은 무통문명이 요구하는 방향으로&nbsp;&lsquo;치유&rsquo;하는 것이다.&nbsp;힐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진짜 기쁨이 아니다.&nbsp;그것은 신체를 관리한 후에 찾아오는 관리의 기쁨이다.&nbsp;생각해 보자.&nbsp;오늘날 현대 사회는 신체의 관리를 넘어 생명까지도 관리한다.&nbsp;그래서&nbsp;&lsquo;생명의 품질관리학&rsquo;&nbsp;자격증을 따야하는 시대가 바로 올지도 모른다.&nbsp;아이들이 출생 전 생명의 품질을 검사받고 관리 받은 후 태어나는 무통의 시대에는 안전한 유전자 조작과 태아 치료가 보급된다.&nbsp;그렇다면 이 무통문명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nbsp;에리히 프롬의&nbsp;&lsquo;자유로부터의 도피&rsquo;가&nbsp;&lsquo;고통으로부터의 도피&rsquo;로 전환한 이 시대에 우리는 신체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힐링과 웰빙을 넘어 생명으로 나가야 한다.&nbsp;생명의 질긴 힘을 이용하여 거기서 터져 나오는 기쁨,&nbsp;거기서 분출하는 욕망의 힘을 맛보아야 한다.&nbsp;우리이게는 괴로워하면서도 이겨내야 하는 고통이 필요하다. &lsquo;아프니까,&nbsp;청춘이다&rsquo;라는 청춘으로의 도피 행각은 중지되어야 한다.&nbsp;고통을 참고 견디면 기쁨이 찾아온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nbsp;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괴로움이 괴로운 고통을 이겨내는 길이다.&nbsp;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이다.&nbsp;아픈 청춘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청춘이라는 말은 청춘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다.&nbsp;또 다시 감정의 양극화에 빠지고 무통문명에 빠른 속도로 적응해갈 뿐이다.&nbsp;우리는 아파해야 한다.&nbsp;고통과 적극 대면해야 한다.&nbsp;고통은 힐링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고 내가 주체로 설 수 있을 때 그것은 자연히 소멸된다.&nbsp;그것은 젊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lsquo;아프니까,&nbsp;청춘이다&rsquo;라고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nbsp;고통의 노예가 아니라 고통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nbsp;무통문명이 나의 생명력을 포식하고 갉아먹는 시대다.&nbsp;감정을 온통 무통의 전체주의로 몰아가고 있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나의 넘쳐나는 에너지로서의 생명력을 힐링과 웰빙이라는 좁은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무통문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nbsp;&nbsp;&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12:12:53 +0900</pubDate>
		</item>
		<item>
			<title>바흐찐의 철학으로 생각하는 세월호 참사</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2</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e0e2a29516913430fa90e2c958b97af2d43c0287.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219px;">세월호 참사로&nbsp;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nbsp;가깝게는 초동대처 미흡으로 멀게는 선박 수명을&nbsp;20년에서&nbsp;30년으로 규제를 완화해 준 것이 화근이었다.&nbsp;선박 수명을&nbsp;20년으로 제한했더라면&nbsp;20년 넘은 낡은 선박이 수입되었을 리 만무하고 사람들은 세월호가 아니라 다른 배편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nbsp;거기다가 화물 수입으로 돈을 더 벌려고 평형수를 다 채우지 않고 선박을 개조해 많은 사람들을 짐짝처럼 취급해 실어 나른 것도 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화근이었다.&nbsp;생명의 존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다.&nbsp;백번 지당한 말이다.&nbsp;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혹자는 한국 사회가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nbsp;이 또한 올바른 말이다.&nbsp;한국 사회의 교육이라는 것이 무조건 외우고 외운 것을 시험지에 오바이트 하듯이 쏟아내는 것이니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다.&nbsp;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비판적 사고를 배제한 채 권위주의와 상명하복 식의 군대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학생 놈이 건방지게 교장실을 찯아 와”&nbsp;하며 학생들을 겁박하는 문화가 여전히 팽배하니 상명하복 문화에 길들여진 학생들이&nbsp;“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갑판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고 죽어 나갔다.&nbsp;세월호 침몰 후 벌어진 수색에서 학생들이 얌전하게 가만히 웅크린 모습으로 죽은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한국 사회의 교육 현장에 명령과 복종의 문화가 얼마나 팽대했던 것인지 여실히 보여준다.여기서는 세월호 참사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nbsp;낯선 이름일지 모르나&nbsp;‘대화주의’의 사상가로 유명한 미하일 바흐친이라는 러시아인이 있다. 1895년에 태어나&nbsp;1975년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친 바흐친은&nbsp;『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nbsp;『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민중문화』&nbsp;등으로&nbsp;20세기 중반&nbsp;‘바흐친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다.&nbsp;그의 사상 권 안에는 대화주의,&nbsp;독백주의,&nbsp;카니발,&nbsp;그로테스크,&nbsp;응답성,&nbsp;,&nbsp;행동,&nbsp;존재의 비&nbsp;-&nbsp;알리바이,&nbsp;,&nbsp;,&nbsp;시선의 잉여분 등 많은 키워드들이 들어 있다.&nbsp;본고에서는 바흐친의 사유 안에 들어 있는 이러한 키워드들을 가지고&nbsp;-&nbsp;이러한 시도가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전혀 도움은 안되겠지만&nbsp;-&nbsp;생명에 대한 철학과 세심한 배려가 전무하다 싶을 정도의 한국 사회를 반성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해보고자 한다.&nbsp;다른 사건도 있었겠지만 삼풍 백화점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 등 재난과 인재 문제를 다루는 사회과학적 성찰은 있었지만 인문학적인 성찰은 없었기 때문이다.인간은 응답성 있는 존재다.&nbsp;여기서 응답성이란 윤리적이고 법적인 것이 아니다.&nbsp;따라서 응답성은 응답성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nbsp;러시아어로 응답성은&nbsp;ответственность라고 쓰는데 뜻은 대답,&nbsp;답변,&nbsp;반응이라는 뜻의&nbsp;ответ에서 왔다.&nbsp;영어로는&nbsp;answerability나&nbsp;responsibility로 번역된다.&nbsp;바흐찐에게 있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해바라기가 햇살이 있는 쪽으로 머리를 돌리듯이 반응하고 대답하는 존재라는 뜻이다.&nbsp;그렇다면 누구에게 반응하고 대답하는가?&nbsp;바흐찐은 스포츠 예를 들면서 내가 나에게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를 든다.&nbsp;바흐찐에게 영향을 미친 스승 브베젠스키에 따르면 나는 나를 볼 수 없고 나는 나를 들 수 없다.&nbsp;바흐친과 브베젠스키는&nbsp;20세기 초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유행한&nbsp;‘죽음의 심리학’이라는 사상의 흐름 속에 있었는데 죽음의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존재다.&nbsp;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타자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nbsp;그래서 설령 나라는 존재도 너의 입장에서 보면 너이고 너라는 존재도,&nbsp;즉 타자라는 존재도 나의 입장에서 보면,&nbsp;그리고 타자의 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타자일 뿐이다.&nbsp;그러니까 나도 타자이고 타자도 타자라는 것이다.&nbsp;바흐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타자다.&nbsp;인간이 응답성 있는(응답하는)&nbsp;존재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타자에게 반응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nbsp;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반응을 보이고 있다.&nbsp;바흐친에게 있어서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타자의 존재에 의해 형성되는 것처럼 나를 떠나 타자의 입장에 서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KBS&nbsp;보도국장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이가 더 적다라는 말을 해 유가족과 시민들의 공분을 산 것은 그가 나의 입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nbsp;그래서 자기는 안전 불감증을 이야기해보자는 뜻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사과 없이 사임한 것이다.&nbsp;유가족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nbsp;KBS&nbsp;보도국장은 내가 나의 장애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nbsp;바흐찐에 따르면 존재는 언제나 나의 바깥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nbsp;finding oneself outside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나의 바깥에 머물게 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고&nbsp;KBS&nbsp;보도 국장처럼 공분만 사게 된다.&nbsp;바흐친을 대화주의의 사상가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타자에 대한 사고에서 나온다.&nbsp;바흐친이 말하는 시선의 잉여분도 외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nbsp;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타자가 볼 수 있고 타자가 볼 수 없는 시선을 내가 볼 수 있다는 시선의 잉여분 개념은 그 자체가 대화의 토양이 될 수 있는 에너지라는 뜻이다.&nbsp;만일 이러한 시선의 잉여분이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nbsp;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잉여분 탓에 나와 타자는 결코 융합될 수 없다.&nbsp;따라서 내가 유가족의 시공간 안에 선다는 것,&nbsp;유가족의 감정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nbsp;이러한 사정 탓에 유가족들이 성금 모으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nbsp;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유일무이한 존재 안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타자가 타자의 존재 안에서의 유일무이한 위치에서 벗어나 형성되는 대화의 공간일 뿐이다.&nbsp;&nbsp;내가 나 바깥에 그리고 나를 마주보고 있는 한 사람 전체를 관찰할 때,&nbsp;우리의&nbsp;구체적인,&nbsp;실제로 체험한 지평들은 일치하지 않는다.&nbsp;왜나하면 각각의 순간에,&nbsp;내가 관찰한 사람,&nbsp;이 타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nbsp;나에게 얼마나 가깝게 있든지&nbsp;간에,&nbsp;그가 자기 자리의 밖에서 그리고 나와 마주보고 있는 곳에서 볼 수 없는&nbsp;어떤 것을,&nbsp;나는 볼 것이고,&nbsp;알 것이기 때문이다&nbsp;나와 타자는 융합하지 않더라도 나의 입장을 떠나 타자의 입장에 설 수는 있다.&nbsp;바흐친이 말하듯이 나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nbsp;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외재성의 존재로서 타자의 반응에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nbsp;이러한 반응은 상당히 중요한데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이&nbsp;KBS&nbsp;본사나 청와대까지 쫓아간 것은 응답성 있는ответственный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nbsp;인간은 바흐친이&nbsp;「텍스트의 문제」라는 글에서 말하듯이,&nbsp;그리고 우리가 흔히 듣는&nbsp;‘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라는 외침처럼 반응을 원하고 자기의 말이 들려지기를 원하는 존재다.&nbsp;이 말이 들려지지 않을 때 인간의 감정은 폭발한다.&nbsp;&nbsp;들려짐услышенность은 이미 대화적 관계이다.&nbsp;말은 들려지고 이해되며 응답받기를&nbsp;원한다&nbsp;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이러한 반응,&nbsp;응답은 나오지 않았다.&nbsp;유가족들이 원했던 것은&nbsp;KBS&nbsp;보도국장의 사임이 아니라 그의 사과 말 한 마디였다.&nbsp;그러나 유가족들의 외침은 들려지지 않았다.&nbsp;바흐친 식으로 이야기하면 한국 사회는 지금 독백주의의 사회다(시청자들이&nbsp;에 열광했던 것을 보면 아직&nbsp;100%&nbsp;독백주의 사회는 아닌 모양이다).&nbsp;관료들은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기만 하고 대통령은 국민들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nbsp;타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철저하게 나의 위치에서만 말한다.&nbsp;그래서 유가족들이 우리들이 필요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대통령 본인이 필요하면 진도에 온다고 비판하는 것이다.바흐친이&nbsp;「행동철학을 향하여」라는 글에서 꿈꾸던 삶,&nbsp;철학도 이러한 것이었다.&nbsp;삶은 구체적인 응답성 안에서만 의식될 수 있다.&nbsp;삶의 철학은 도덕 철학이 될 수 있&nbsp;을 뿐이다.&nbsp;삶은 사건으로만 의식할 수 있지 존재&nbsp;-&nbsp;주어짐으로는 의식될 수 없다.&nbsp;응답성에서 떨어져 나온 삶은 철학을 가질 수 없다.&nbsp;그러한 삶은 원칙적으로 우연적&nbsp;이고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nbsp;한국 사회는 응답성에서 떨어져 나와 철학을 가질 수 없는 삶으로 가득 차 있다.&nbsp;바흐친은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nbsp;&nbsp;오늘날의 위기의 근저에는 당대 행동의 위기가 있다.&nbsp;행동의 동기와 그 산물 간에&nbsp;심연이 만들어졌다.&nbsp;그러나 그 결과 존재론적인 뿌리에서 떨어져 나온 산물도 시&nbsp;들기 시작했다.&nbsp;돈이 도덕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nbsp;경제적&nbsp;물질주의는 현재 순간에 대한 관계에서는 옳지만 행동의 동기들이 산물 안을 관통&nbsp;해 있고 더 나아가 거꾸로 나름의 의미를 가진 산물이 현실적인 동기부여에 따르는&nbsp;행동과 절연되어 있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하다&nbsp;여기서 바흐친이 말하는 행동은 뜀뛰기 같은 육체운동, 생물학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 소망, 감정, 보는 것, 생각하고 일하는 것 등을 모두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의 동기가 그 산물(결과물)에 일치하지 않는 사태가 생겼다는 것이다. 언어는 그러므로 인류의 교양이 어느 정도 높고 낮은가를 결정해주는 척도다. 『미래의 철학의 근본 명제』&nbsp;&nbsp;&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11:07: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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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인간의 눈은 세 개다</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5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9d1dd42cdc5c32331f8ce0c9af4cae6fb8d1be58.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160px;">인간의 눈은 세 개다&nbsp;고통의 심연을 드러내 보였던&nbsp;2012년 영화&nbsp;로&nbsp;2012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김기덕 감독은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배움이 있다.&nbsp;하나는&nbsp;&#39;노동&#39;이고,&nbsp;또 하나는&nbsp;&#39;사람&#39;이다.&nbsp;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든 내가 상처를 준 사람이든.&nbsp;세 번째는&nbsp;&#39;자연&#39;이다.&nbsp;지금 자연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데,&nbsp;자연은 엄청난 가르침을 준다.&nbsp;나무 한 그루,&nbsp;개구리 한 마리가 엄청난 깨달음과 위로를 준다.&ldquo;&nbsp;이 인터뷰에서 보듯 김기덕 감독은 영화제 최고상을 받은 것만큼이나 학문 전반에 대한 통찰을 다 한듯하다.&nbsp;노동,&nbsp;사람,&nbsp;자연은 각각 사회과학,&nbsp;인문과학,&nbsp;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nbsp;김기덕 감독이 노동,&nbsp;사람,&nbsp;자연을 세 가지 배움으로 삼았다면 초등학교만 마친 그는 이미 학문 전반을 아울러 깨닫고 있었던 인문학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인문학은 모름지기 학문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자 열 길 사람 속을 꿰차고 들어앉으려고 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넓고 깊다.&nbsp;김기덕 영화에 대한 이야기나 김기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다.&nbsp;아직 우리는 사람 혹은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nbsp;안다고 하나 그 앎이 충분하지 못하다.&nbsp;김기덕의 말처럼 나무 한 그루,&nbsp;개구리 한 마리가 엄청난 깨달음을 주고 위로를 주지만 노동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자연에 대해서도 우리의 앎은 여전히 미숙하기 그지없고 볼품없다.&nbsp;우리의 앎만이 아니다.&nbsp;눈이 정면에 위치해 있는 인간의 눈은 물고기의 눈보다 보는 시야가 좁다.&nbsp;물론 인간에게는 나를 보는 눈,&nbsp;너를 보는 눈,&nbsp;세상을 보는 눈 세 개가 있으니 인간의 눈은 어떤 의미에서 물고기의 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nbsp;하지만 그 눈은 마음의 눈일 뿐이다.&nbsp;인간은 세 개의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nbsp;얼굴에 있는 두 개의 눈과 목덜미에 있는 눈을 그린 과학영화에만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신체적으로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nbsp;세 개의 눈을 인간이 갖고 있다니 괴기하고 공포스럽지만 사실은 사실이다.프랑스의 특이한 사상가 조르쥬 바타이유(1867-1962)는 원숭이를 연구한 짧은 논문에서 송과안pineal eye을 제&nbsp;3의 눈으로 명명했다.&nbsp;마치 생긴 모양이 작은 솔방울을 닮았다고 하여 의학적으로 송과선松果腺(pineal gland)이라 불리고,&nbsp;솔방울샘,&nbsp;송과체라고도 불리는 이 신체 기관은 인간이 깨어나고 잠을 자게 하며 계절마다 육체를 조정해주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유도 멜라토닌을 생산하는 내분비기관이다.&nbsp;인간의 송과선은 대뇌 밑,&nbsp;간뇌의 시상 상부에 있는데 송과선에서는 죽은 세포를 살려주는 미량의 물질인 프로스터그랜딘(prostagrandin)이 방출된다.&nbsp;이 물질은 환상의 약이라 하여 현재 세계 각국에서 연구 중이지만 화학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고 오로지 송과선에서만 만들어지는 물질이다.<br>송과선에 대해서는 이미 데카트르가 그의 저작&nbsp;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nbsp;<br>&nbsp;데카르트는 송과선을 두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장소라고 했지만 조르쥬 바타이유는 이 송과선을 두고 제&nbsp;3의 눈이라고 이야기했다.&nbsp;다른 글에서 눈의 맹점에 관한 이야기를 한 바 있지만 조르쥬 바타이유도 눈의 맹점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nbsp;그러고 보면 조르쥬 바타이유는 유별나게&nbsp;&lsquo;눈&rsquo;에 집착하던 사상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nbsp;그가 눈의 맹점을 넘어 지성의 맹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지적인 실명失明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문학적으로 곱씹을만한 구절이다.&nbsp;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유난히 머리 두개골 윗부분을 조심해했던 기억이 난다.&nbsp;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볼록볼록 움직이던 곳이지만 나이가 들면 굳어 버린다.&nbsp;아이를 재울 때 잘못 재워 이곳을 막아 버리기라도 하면 아이가 죽는 사고가 난다.&nbsp;이 곳과 양 눈썹 사이 이마의 움폭 들어간 부분이 가로 세로로 만난 머리 안 쪽에 있는 송과선은 바타이유가 말한 대로 제&nbsp;3의 눈으로서 데카르트나 바타이유가 말하기 이전에도 문화와 수행체계에 따라 명칭은 다를지라도 동양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개념이었다.&nbsp;중국에서는 송과선을 두고 천목天目이라 부른다.&nbsp;인도에서는&nbsp;&lsquo;야즈나 차크라&rsquo;라고 한다.&nbsp;선도에서는&nbsp;&lsquo;상단전&rsquo;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nbsp;&lsquo;영안&rsquo;, &lsquo;신안&rsquo;, &lsquo;천안&rsquo;&nbsp;이라고 부르기도 한다.&nbsp;불상을 보면 눈썹 사이에 빨간 점을 그려 넣거나 보석 모양의 유리를 박아 넣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제3의 눈인 송과선이다.&nbsp;&nbsp;성인에게는 이 제&nbsp;3의 눈이 열려 있지 않지만 명상,&nbsp;요가 등 수련을 한 사람들에게는 제&nbsp;3의 눈이 열려 있다.&nbsp;정확히 말하면 원래 열려 있던 것이 닫힌 것이니 다시 열었다고 해야 한다.&nbsp;이 제&nbsp;3의 눈을 열게 되면 다음과 같은 능력이 발달한다.&nbsp;직관력,&nbsp;신통력,&nbsp;텔레파시 같은 천리안,&nbsp;예지력,&nbsp;투시력,&nbsp;통찰력 등으로 불릴 수 있는 기능들이다.&nbsp;제3의 눈은 우주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관이기 때문이다.&nbsp;두 개의 눈이 빛을 받아 들여 전기신호로 바꾸듯이 원래 송과선은 우주의 빛을 받아들이던 곳이다.&nbsp;하지만 우리는 그 제&nbsp;3의 눈이 굳어져 닫혀 버렸으니 텔레파시 능력 등을 가질 수 없다.&nbsp;제&nbsp;3의 눈이 그려져 있는 앞의 그림이 기괴해 보이듯이 인간의 눈은 원래 세 개이고 제&nbsp;3의 눈에 엄청난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기괴하고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다.&nbsp;제&nbsp;3의 눈이 열려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면 투시 등 상상을 초월할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해서,&nbsp;수련 이야기는 접어둔다 치더라도 바타이유가 말하는 제&nbsp;3의 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nbsp;상상해 보자.&nbsp;만일 퇴화되었던 제&nbsp;3의 눈이 자라나 이마를 뚫고 나오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두 개의 눈으로는 결코 마주할 수 없었던 것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될 것이다.&nbsp;여기서 바타이유가 제&nbsp;3의 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투시 같은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두 가지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nbsp;바타이유는 태양과 죽음을 응시하지 못하고 눈을 돌리는 기존의 두 개의 눈이 아니라 태양과 죽음을 응시할 수 있고 그리하여 볼 수 없는 것,&nbsp;불가능한 것,&nbsp;신성한 것을 마주보게 되는 제&nbsp;3의 눈을 갈망했다.&nbsp;하늘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태양이라면 눈은 두개골의 정점에 있다.&nbsp;태양과 눈은 수직적인 구조 속에 있다.&nbsp;바타이유에 따르면 인간은 땅에 바짝 몸을 붙이고 사는 생명체와 다르다.&nbsp;주지하다시피 직립의 인간은 수평적인 시각을 갖고 사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수직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nbsp;수직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인간은 정신적이고 관념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을 신봉해 왔다.&nbsp;제&nbsp;3의 눈도 수직적인 시각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nbsp;바타이유가 수평적인 시각과 수직적인 시각을 언급하는 이유는 죽음본능과 폭력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다.&nbsp;인간 특유의 수직적 자세를 수평적으로 회전시켜 낮게 전락시키려는 충동을 두고 바타이유는 죽음 본능이자 폭력이라고 부른다.&nbsp;수직적 시각이 수평적 시각으로 변하고 정신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동일하다.&nbsp;그러나 그렇게 변하는 것이 폭력이라 하여 바타이유가 정신적인 것,&nbsp;상징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nbsp;정신보다는 몸에 깃든 신성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nbsp;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곳을 송과선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인간은 두 개의 눈처럼 정신과 육체 두 개로 대별할 수 없는 존재다.&nbsp;양안시차 이야기(좌안과 우안이 공간적으로 약간 다른 위치에 있으므로 물체를 바라볼 때 약간씩 서로 다른 영상을 관측하게 되는 것)가 있듯이 두 개의 눈 또한 우리가 생각하듯이 대칭적이지도 않다.&nbsp;게다가 그 대칭성을 파괴하는 제&nbsp;3의 눈도 있다.&nbsp;인간을 정신과 육체 두 개로 대별하는 것은 육체보다 정신을 우선시하려는 수직적인 시각의 발로다.&nbsp;수직적인 시각과 정신적인 것은 수평적인 시각과 동물적인 것으로 전락해야 한다.&nbsp;그리하여 금기를 위반하고 거기서 인간의 신성성을 발견해야 한다.&nbsp;우리는&nbsp;&lsquo;원숭이 똥구멍은 빨개&rsquo;라고 하며 키득거렸지만 바타이유는 거기서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색을 발견한다.&nbsp;그것도 신성한 쾌락의 색을.&nbsp;&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10:49:4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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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의 차이</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49</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의 차이<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815882e2577cb79836112d202842b1a7a348b981.jpe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142px;">&nbsp;아파트 올라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아이가 말했다. &ldquo;착하고 아름다운 생활이라고 써야 하는데 착하고를 안 써서 틀렸어,&nbsp;그래서&nbsp;87점 받았어.&nbsp;현이는&nbsp;91점이라던데.&rdquo;&nbsp;벌써&nbsp;10년도 훨씬 전에&nbsp;『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라는 책을 썼지만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nbsp;러시아 드라마에&nbsp;라는 게 있다.&nbsp;겉으로는 우리나라 예전 드라마&nbsp;와 유사한데 선생인 학생 돈을 갈취하고 학부모한테서 뇌물을 받는다.&nbsp;두 드라마를 가지고 러시아에서 한국어 배우러 온 학생하고 대학원 수업을 하는데 러시아에는&nbsp;SKY&nbsp;대학 같은 얘기는 없다고 한다.&nbsp;교육에서 철저한 신분제가 관철되는 곳은 우리나라나 일본 두 나라 정도인 모양이다.&nbsp;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배움을 가르치지 않는다.&nbsp;대한민국 교육은 철저하게 재현 교육이기 때문이다.&nbsp;기술 교과목에서 톱니바퀴 종류를 가르치고 팬티와 슬립이 같은 종류의 속옷인가를 묻는다.&nbsp;대한민국 교육이 주입식 교육이고 반복 학습 교육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nbsp;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교육은 재현교육이다.&nbsp;시험 전 날 외웠던 것을 다음 날 시험지 위에 오바이트 하듯 쏟아내면 그만이다.&nbsp;인간의 뇌는 관심 없는 것은 워킹 메모리에서 지워버리건만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nbsp;관심 없어도 점수 올려&nbsp;SKY&nbsp;대학 가자면 소용없다.&nbsp;무조건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 한다.&nbsp;그것이 지식인줄 아는 모양이다.&nbsp;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골든 벨 프로그램이나 장학퀴즈에 나오는 정보에 불과하다.&nbsp;지식이란 정보들을 가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져야 지식이라 할 수 있다. &lsquo;폭탄을 맞으면 죽는다&rsquo;는 것은 정보다.&nbsp;폭탄을 어떻게 만들고 어디에 쓸 것이며 폭탄이 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nbsp;대한민국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기만 한다.&nbsp;교사도 교수도 그저 정보를 전달하기만 할 뿐이다.&nbsp;그리고 한술 더 떠 그 정보에 대한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ldquo;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rdquo;&nbsp;운운 하는 말이 가장 전형적인 언사다.&nbsp;톱니바퀴 종류처럼 폭탄의 종류만 외워 해답만 찾으면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다.&nbsp;지식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nbsp;Knowledge인데 이 단어는 안다know는 것이 모였다ledge는 것이다.&nbsp;즉 정보의 축적이다.&nbsp;아는 게 많다고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다.&nbsp;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nbsp;배운다는 것은 마치&nbsp;&lsquo;수영&rsquo;과 같은 것이다.&nbsp;우리는 수영을 배운다고 말하지 수영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ldquo;수영에 대해 좀 알지&rdquo;라고 말하는 것은 수영을 많이 배웠다는 뜻이다.&nbsp;그렇다면 수영이란 무엇인가?&nbsp;헤엄치기다.&nbsp;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문제가 있다고 치자.&nbsp;그 때 임진왜란과&nbsp;1592년 사이에는 재현과 일치관계가 존재한다.&nbsp;마치 거울처럼.&nbsp;거울의 저 쪽에서 나온 정보를 맞추기만 하면 점수가 올라간다.&nbsp;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이 쌓이면 나는 졸지에&nbsp;&lsquo;걸어 다니는 사전&rsquo;이 된다.&nbsp;배움에는 이러한 일치관계나 재현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nbsp;헤엄치기란 무엇인가?&nbsp;그것은 인간의 신체와 물이 만나고 마주치는 과정이다.&nbsp;헤엄치는 인간의 신체와 물결 사이에는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가 존재한다.&nbsp;신체의 운동과 물결의 운동 사이에 일치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신체가 그 미세한 물결의 흐름에 일일이 자신의 몸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nbsp;누가 반드시 가르쳐줘야만 헤엄치기가 가능한 사람이 있지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개구리헤엄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헤엄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nbsp;배움에는 많이 알고 있는 교사가 필요 없다.&nbsp;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nbsp;『차이와 반복』에서 올바른 교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nbsp;우리는&nbsp;&lsquo;나처럼 해 봐&rsquo;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nbsp;오로지&nbsp;&lsquo;나와 함께 해 보자&rsquo;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nbsp;다&nbsp;나처럼 해 보라는 얘기는 나를 따라 내가 하는 대로 나를 재현하라는 뜻이다.&nbsp;이 사람은 참된 교사가 될 수 없다.&nbsp;배운다는 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만나 일어나는 신체의 활동이지 어떤 해답의 규칙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nbsp;따라서 배운다는 것은 학생이 세상과 마주치는 것이고 학생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nbsp;들뢰즈의 얘기를 다시 들어 보자.&nbsp;하나의 물결과 몸짓에서도 다른 물결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포괄하는&nbsp;차이,&nbsp;이 차이를 그렇게 구성된 반복의 공간으로 운반하는 반복이다.&nbsp;배운다&nbsp;는 것,&nbsp;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nbsp;것이다&nbsp;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교사가 학생에게&nbsp;&ldquo;눈 깔아&lsquo;라고 명령하고 학생의&nbsp;&rsquo;문제 제기&lsquo;를 원천 봉쇄한다.&nbsp;배움의 기회를 원천봉쇄하면서 정보만 축적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다.&nbsp;문제를 발견해도 그것을 제기하고 해결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 학생들에게 창의성이 생겨날 턱이 없다.&nbsp;미국의 어느 학교에서는 플로리다 반도에 석유를 실어나르는 배가 뒤집혀 바다가 오염되었을 때 이 문제에 미국의 각 주는 어떻게 대처했고 미국 정부,&nbsp;각 마을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학생들에게 알아보라고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nbsp;-&nbsp;도서관 이용법 등&nbsp;-&nbsp;을 제시해준 후 기말고사 쯤에 발표하게 한다.&nbsp;그 동안 수업도 시험도 모두 없다.&nbsp;요즘 같은&nbsp;SNS&nbsp;시대에 정보는 학생들이 의심만 품으면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다.&nbsp;문제는 그 정보를 가공하고 활용하는 능력의 부족이다.&nbsp;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수십 년 전에 자기 집 차고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수많은 컴퓨터를 버리고 태워버린 일은 유명한 일화 아닌가.&nbsp;배움에는 정답이 없다.&nbsp;올바른 답은 없고 요즘 말로 말하면&nbsp;&rsquo;착한 답&lsquo;만 있을 뿐이다.&nbsp;인지과학에&nbsp;&lsquo;발제적 지식&rsquo;이라는 말이 있다.&nbsp;영어로는&nbsp;Enactive Knowledge라고 하는데&nbsp;Enaction은 인지과학에서 중요한 용어다.&nbsp;여기서&nbsp;enactive를 번역한 발제라는 뜻은 수업 발제할 때의 발제가 아니라 행위로부터 산출된 것이라는 뜻이다.&nbsp;인간은 뭔가를 느끼고 나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지과학에서는 느끼기 전에 먼저 행위,&nbsp;움직임이 있다고 본다.&nbsp;영어 단어의&nbsp;emotion에는&nbsp;motion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nbsp;흔히 정서로 번역되는&nbsp;emotion은 움직임을 뜻하는 단어다.&nbsp;느낌feeling은 정서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다.&nbsp;움직임이 먼저 있고 나서 감정feeling이 생겨나는 것이다.&nbsp;환경 안에서 지각&nbsp;-&nbsp;행위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정보인 발제적 지식에서 인간은 외부의 움직임에 나의 신체만 맞출 줄 알면 된다.&nbsp;이것은 정보,&nbsp;지식,&nbsp;죽어 있는 페이퍼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nbsp;신체를 움직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발제적 지식이다.&nbsp;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하거나 스포츠를 하면서 혹은 대상을 조작하는 모터 기술 등이 발제적 지식에 속한다.&nbsp;우리는 이러한 발제적 지식을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nbsp;공대 학생들만 자전거를 타는 것은 아닌데도 이것은 공대의 몫이라고 방기한다.&nbsp;발제적 지식은 지식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배움의 영역에 속한다.&nbsp;자전거를 타는 과정을 배우고 그것이 세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배운다는 측면에서 자전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헤엄치기처럼 자전거를 배우는 것이다.&nbsp;시쳇말로 하면&nbsp;&lsquo;산 교육&rsquo;이다.&nbsp;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아니 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문제 풀이 식 교육이 관철된다.&nbsp;거기에서는 문제 제기의 능력만이 아니라 사유의 능력이 거세된다.&nbsp;신체가 물결과 마주치듯이 대상과 마주쳐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대한민국 교육에서 불가능하다.&nbsp;어려서부터 국어,&nbsp;영어,&nbsp;수학 등 많은 교과목 뿐만 아니라 피아노,&nbsp;태권도,&nbsp;골프 등을 가르치며&nbsp;&lsquo;만능 엔터테이너&rsquo;가 되기를 강요하는 곳에서 생각하고 사유할 줄 아는 능력이 탄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nbsp;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nbsp;고양이는 평상시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다가 위협이 생기면 이를 드러내며 저항한다.&nbsp;살고자 하는 본능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nbsp;교육은 아이들의 머릿속에 발톱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다.&nbsp;사유란 발톱과 같다.&nbsp;그러자면 뭔가가 아이들의 머릿속을 침입해야 한다.&nbsp;인문학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생각과 사유의 힘이 고양이 발톱처럼 머릿속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소명이다.&nbsp;생각하고 사유할 줄 아는 능력의 탄생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nbsp;그것이 인문학이다.&nbsp;얼마 전부터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nbsp;인문학의 위기니 하면서 대학이 장사 안 되는 과는 없애거나 통폐합한 후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nbsp;그러나 이 바람은 붕괴한 인문학을 재생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경제 경영에 활용하자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nbsp;최근 삼성에서는 인문학 인재까지 뽑는 모양이다.&nbsp;인문학 인재란 무엇일까?&nbsp;책을 많이 읽어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이 인문학 인재일까?&nbsp;아니면 그것은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또 다른 형태일까?&nbsp;인문학은 앎의 넓이보다 배움의 깊이가 있고,&nbsp;생각,&nbsp;사고,&nbsp;사유의 불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며 인문학 인재 등의 이야기는 이 점을 토대로 시작되어야 사상누각이 되지 않는다.&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10:26: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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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문학을 요리하자</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4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dee9fe893d696f6c48f5f7d02d0ff943edd8ced0.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196px;">&nbsp;재떨이에서 혼자 타고 있는 담뱃잎에서 나오는 연기는 크기가 매우 작은 탄소성분의 미립자들이다.&nbsp;이 미립자들은 지름이 빛의 파장과 엇비슷할 만큼 작다.&nbsp;이런 미립자들을 빛이 통과할 때에는 가시광선의&nbsp;7가지 색 가운데 파장이 짧은 청색계통 빛이 가장 강하게 산란된다.&nbsp;그 때문에 우리 눈에 파란 빛으로 보이는 것이다.&nbsp;공기 분자나 미세한 먼지밖에 없는 맑은 날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nbsp;그러나 이 연기를 빨아들이면 몸속의 수증기가 연기 미립자를 핵으로 삼아 뭉침으로써 아주 작은 물방울을 형성하게 된다.&nbsp;입 밖으로 나온 이 입자들의 크기는 빛의 파장보다 조금 더 크다.&nbsp;그렇게 되면 청색광뿐 아니라 모든 파장의 빛이 작은 물방울들에 이리 저리 부딪히면서 반사돼 결과적으로 하얀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nbsp;하늘의 구름이 하얀 것과 같은 원리다.&nbsp;이것은 담배연기의 광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다.&nbsp;그러나 이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풀어 보면 어떻게 될까.&nbsp;담배연기의 광학적 메커니즘 같은 자연과학적인 설명이 인문학으로 들어오게 되면 사람이 연관된다.&nbsp;담배연기가 하얀색으로 보이든가 파란색으로 보이든가 하는 것은 인문학에서 문제되지 않는다.&nbsp;담배를 깊게 내뿜는 사람에게서 일상의 고뇌를 보거나 재떨이의 담배꽁초들을 보고 삶의 여러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이다.&nbsp;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 혹은 인간에 관한 사고를 하자는 것이다.&nbsp;사회과학에도 경제주체인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 때의 사람은 도화지 위에 크레용으로 그려진 사람일 뿐이다.&nbsp;사고하고 지각하고 인지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생생한 인간이 등장하는 곳은 인문학뿐이다.&nbsp;자연과학에서 사람은&nbsp;40조개의 세포로 구성된 세포덩어리이거나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나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nbsp;최근 마음의 과학이 등장하면서 뇌&nbsp;-&nbsp;신체&nbsp;-&nbsp;마음의 삼각관계를 연구하고 있지만 사람의 손을 만질 때 느껴지는 손의 따듯한 온기가 마음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nbsp;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nbsp;닉 레인이 쓴 책&nbsp;『미토콘드리아』처럼 사람이 박테리아에서 진화한 것이라는 자연과학적인 주장은 인문학이 사람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관념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것이다.&nbsp;그런데 문제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인문학에 등장하는 그 사람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nbsp;인문학이 어려운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듯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의 속성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nbsp;우리나라 말에 천지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인간이다.&nbsp;인‘간’의 사이 간 자처럼 사람은 하늘과 땅&nbsp;‘사이에’&nbsp;존재한다.&nbsp;즉 사이존재가 인간이자 사람이다.&nbsp;그렇다면 사람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nbsp;우리는 인문학 하면 인간이란 그 본성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여긴다.&nbsp;대학에서 인성교육 운운하듯이 인간성,&nbsp;인성을 인문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듯하다.&nbsp;물론 훌륭한 인성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nbsp;인문학은 앞서 말했듯이&nbsp;‘사이’를 사고하는 것이다.&nbsp;인문학이 사람을 사고하는 곳인 이유는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nbsp;여기서 하늘은 자연과학의 영역이고 땅은 자연과학의 영역이다.&nbsp;따라서 인문학은 사람처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존재한다.&nbsp;사람만 사이존재가 아니라 인문학 자체가 사이존재인 것이다.&nbsp;그렇다면&nbsp;‘사이’란 무엇인가?&nbsp;인문학이 사이존재라는 뜻은 인문학이 하나의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nbsp;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nbsp;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nbsp;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존재하기에 인문학은 어디 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는다.&nbsp;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람도 하나의 속성이나 내용으로 환원시킬 수 없듯이 인문학은 그 인문학이라는 공간에 사람이 등장하되 그 사람의 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nbsp;사실 한 길 사람 속이라 하지만 사람 속은 몇 길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nbsp;사람의 입이 음식을 먹는 데에도 쓰이고 테이프를 끊는 데에도 사용되듯이 인문학은 사회과학일 수도 있고 자연과학일 수도 있다.&nbsp;어디에다 쓰느냐,&nbsp;다시 말해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구름처럼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것이 인문학이다.&nbsp;흔히 인문학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nbsp;인문학이 어려운 이유는 사과라는 단어가 밭에서 자라나는 물질로서의 사과를 지칭하듯이 그러한 지칭관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어려운 것이다.&nbsp;인문학에 특정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인문학이 사이존재라는 것은 인문학이 앞서의 입 이야기처럼 배치라는 뜻이다.&nbsp;구름이 산의 형상으로 호랑이 형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듯이 인문학 또한 배치방식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nbsp;그래서 인문학이란 배치이자 구름의 배치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구름이기도 하다.&nbsp;인문학을 요리하기가 어렵고 인문학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도록 요리한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렵다.&nbsp;이것은 인문학의 속성,&nbsp;딱히 어느 한 곳을 고정시킬 수 없는 인문학의 속성에서 비롯한다.&nbsp;인문학은 사회과학,&nbsp;자연과학,&nbsp;인문학이 어우러지는 곳이다.&nbsp;그리고 인문학은 사이존재이기에 지식들이 어우러지는 사이,&nbsp;간극에 존재한다.&nbsp;그 간극에서는 사회과학,&nbsp;자연과학이 서로 각자의 경계를 넘어 월경越境한다.&nbsp;한국 음식만 유별나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문학을 요리에 비유하자면 돼지고기,&nbsp;양파,&nbsp;고추장,&nbsp;육수 등이 서로 어우러져 서로의 경계를 부수고 간극 안에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깊은 맛을 내는 것이 인문학이다.&nbsp;사이존재란 이렇게 상호 삼투하는 것이다.&nbsp;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공감共感이란&nbsp;sympathy가 아니라&nbsp;empathy다.&nbsp;공‘共’이란 곁에서 어우러진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nbsp;양파의 맛이 돼지고기 안으로 스며들어야 하고 육수의 향이 고추장 안으로 스며들어야 한다.&nbsp;한국 음식에만 젓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상호침투가 이루어지다보면 무엇이 멸치이고 무엇이 양념인지 모르는 경지에 도달한다.&nbsp;상호 침투가 정점에 도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nbsp;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서로가 변한다.&nbsp;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의 변화에 다름 아니고 경영계에서 인문학에 주목하는 것도 상호침투의 결과이자 하나의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지 않는 인문학의 속성 탓이다.&nbsp;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nbsp;몽타쥬라는 말은 누구나 잘 아는 단어다.&nbsp;그런데 이 단어는 범죄자의 얼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쓰이는 촬영기법을 뜻한다.&nbsp;이 기법으로 영화를 처음 만든 사람은&nbsp;을 만든 그리피스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러시아의 영화감독인 에이젠쉬쩨인이 만든 말이다.&nbsp;기원을 더 추적해보면 에이젠쉬쩨인은 이 말을 한자에서 얻어왔는데 가령 똥 분糞자는 쌀 미米&nbsp;자와 다를 이異&nbsp;자가 합쳐진 말이다.&nbsp;여기서 똥 분을&nbsp;A,&nbsp;쌀 미를&nbsp;B,&nbsp;다를 이를&nbsp;C라 하자. B는&nbsp;C와 모양이 다르고&nbsp;A는&nbsp;C와 형태가 다르며&nbsp;A도&nbsp;B와 글자가 다르다.&nbsp;각각 다른 모양을 한&nbsp;B와&nbsp;C가 서로 스며들어&nbsp;B와도 다르고&nbsp;C와도 다른 글자&nbsp;A가 만들어진다. B에 없던, C에 없던 전혀 새로운 글자&nbsp;A가 탄생한 것이다.&nbsp;이 때&nbsp;A를 가리켜 몽타쥬라 한다.&nbsp;그렇다면 인문학은 무엇인가?&nbsp;그것은 다름 아닌 똥 분 자인 것이다. A안에는&nbsp;B와&nbsp;C가 들어 있고 음식처럼&nbsp;B와&nbsp;C가 서로 스며들어 나타난 결과가&nbsp;A다. A가 인문학인 것이다.&nbsp;이것을 요즘엔 통섭이라 부른다.&nbsp;영어로&nbsp;‘함께 같이 위로 뛴다’는 뜻에서 나온&nbsp;consilience를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통섭으로 번역한 것인데,&nbsp;굳이 윌슨 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인문학의 운명은 통섭이자 몽타쥬다.&nbsp;이 몽타쥬 개념을 문학과 사회과학으로 끌어들여 이야기한 사람이 러시아의 사상가 미하일 바흐친이다.&nbsp;그는 아이(생명, B)를 임신한 노파(죽음, C)의 이미지를 가리키는 그로테스크 개념,&nbsp;전혀 새로운 글자인&nbsp;A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카니발 개념을 만들었다.&nbsp;그 자체가 영화,&nbsp;문학,&nbsp;사회과학이 서로 경계를 넘나들고 마치 구름처럼 영화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사회과학으로 이동 배치되는 것을 보여준다.&nbsp;이렇게 사이란 상호 접속이고 인문학은 다른 것들과 상호 침투한다. ‘나는 접속한다,&nbsp;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말도 있지 않은가. 21세기의 화두는 접속이자 상호 침투다.&nbsp;인문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한 길 안에 수많은 길이 있고 접혀진 부채 안에 여러 부채살이 있기 때문이다.&nbsp;한마디로 인문학은 특정 영역이 없고 모든 것을 다 다루고 포괄한다.&nbsp;에이젠쉬쩨인도 바흐찐도 아닌 필자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인문학은 발효되어 정체성이 각자 상실된 발효식품이다.&nbsp;&nbsp;]]></description>
			<author>이득재</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08:46:59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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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윤구병의 &lt;꿈꾸는 형이상학&gt;을 읽고</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4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861b832753697b26211fc06a66af217cd3e0f7f7.jpg" class="fr-fic fr-dib">형이상학에 대한 단상들<br><br>- 『꿈꾸는 형이상학』(윤구병, 보리출판사, 2020)을 읽고서<br><br>---『꿈꾸는 형이상학』을 읽고나서 쓴 것들인데 순서를 재배치 한 것이다.<br><br>*<br><br>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에서 형이상학의 대상은 공간과 시간, 인간의 현존 상태에서 도덕과 아름다움, 자유와 필연, 음덕(기적, 은총)과 같은 우발적 사건들과 운명, 그리고 이런 바탕으로서 자연과 신들도 대상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것들을 다루는 &lsquo;생각하는 자아(인간)의 다양한 역량&rsquo;인데 감각, 감정, 오성, 지성, 이성, 추리, 추억, 기억 등을 다루는 인식론이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 낸 구성, 구축, 조성, 상상을 통해, 틀(도식)과 계열, 체계를 다루는 논리학, 수학, 물질과학, 생명과학일 것이다. 그리고 늦게서야 사람이 사는 터전에 대해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고, 연결들의 고리든 그물망이든, 조직화하여 만들어가는 공동체에서 사회, 노동, 국가, 체제, 그 안에서 재화의 축적와 분배, 탐욕을 추구하는 폭력과 통제도 있지만, 공감과 공명을 통한 평등과 평천하를 추구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요즘에 덧붙여서, 터전에서 즐기며 화해하고 경쟁하는 놀이들, 운동, 음악, 예술 등을 다룰 수 있으며, 살아가는 지역에 따라 달리 생성된 놀이와 다음측정을 향한 문화론도 보태야 할 것이다.<br><br>이 책 『꿈꾸는 형이상학』을 읽으면서, 형이상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길라잡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이전에도 철학 입문서가 여러 종류가 있지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우선 『철학의 제 문제』(소광희, 이석윤, 김정선 저, 1973)가 있었고 이는 독일 관념론에 영향 아래 서양철학 또는 앵글로색슨 철학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라틴계의 입문서로서 프랑스 고교 4학년에게 철학입문으로 쓴 베르제즈와 위스망의 『인간학 철학 형이상학(1)』(1999), 『인간과 세계(2)』, 『지식과 이성(3)』, 『실천과 목적(4)』(남기영 번역)이 있는데, 프랑스 고등학생 전부가 철학을 교과과정으로 만든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하다. 두 입문서는 앵글로색슨의 사고방식과 라틴계의 사유방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br><br>이와 달리, 여기 이 책은 우리 땅에서 우리 입말로 쓴 책이라는 점에서 우리 방식의 배치와 용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사의 지위에서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여기 이 책을 통해서 성찰하고 숙고할 수 있으리라. 이런 시금석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기는 매우 어려움에도, 저자는 우리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통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음 시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썼을 것이다.<br><br>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말로 우리사유를 할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참조로, 그 책을 읽는 분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지나가듯이 읽어보게 한 것을 한 꼭지 만들었다. https://cafe.daum.net/milletune/REM4/181 (59UMF)<br><br>**<br><br>형이상학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철학의 기본 설정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어쩌면 하나의 화두, 태극, 니르바나, 선의 이데아와 같은 것일 수 있는데, 이를 다루는 방식은 어느 학문들에서나 둘로 갈라져서 다루게 되는가 하는 의문도 포함한다. 그런데 서양철학에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 자연의 도식과 체계를 찾는다고 하면서 변장된 신학을 동원하고 있다. 이런 두 방식이 서양철학사가 걸어온 길인지 모른다.<br><br>지식의 체계 안에서 자연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플라톤의 &lsquo;선분의 비유&rsquo;처럼 분할을 생각하고, 또 무한히 분할하는 방식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 방식으로 우선 자연 또는 존재의 단위와 원리를 찾는데 관심이 있었고, 그런 관심이 인식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연을 겉에서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게다가 생물학에 마주하면서, 인간이 생물들의 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성에 이르렀다고 한다.<br><br>인간이 자연을 다루면서 인간의 방법으로 다루어도 잘 다루어지지 않은 생명과 영혼이 있듯이, 이런 반성의 시대에 지식이 다루는 것이 총체적 자료들일까 하는 고민을 안았던 것 같다. 우선 벩송은 분할하여 단위로 다루는 것이 공간의 입장이며, 물체의 결합과 해체, 움직임과 정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의 내재성과 연관 있는 세 가지를 물리화학적 또는 수학적 방법으로 풀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이 세가지 영역으로, 도덕에서 착하다(훌륭타), 미학에 아름답다(이쁘다), 종교에서 음덕(은총)이라 했다. 이를 다루는 방식은 기억과 유전으로 다루어야 하고, 그 방법이 직관이라 했다.<br><br>다른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사물과 대상들을 그림처럼 사실(만들어진 것)을 언어로 배치와 배열로 다룰 수 있다고 &ldquo;철학-논리 논고(1921)&rdquo;에서 쓰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대상이 윤리학, 미학, 종교라고 거의 끝부분에 간단하게 썼다.<br><br>다시 소크라테스 이래로 훌륭타, 이쁘다, 스스로 이뤄지다는 것을 정의하기가 불편하지만, 인간이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고 하고, 이런 면에서 지혜를 사랑한다고 한다. 물체로서 다루거나 영혼으로 탐색하거나 간에, 인간은 이런 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으면서, 철학의 임무가 정의하고, 원리를 찾고, 공리든 공준이든 가정하고서 물음에 대해 해답을 찾는 것으로 보았다. 2천 5백 년의 시대를 거치면서, 수학, 과학, 논리 등의 지식은 도덕, 예술, 믿음의 지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br><br>형이상학 또는 &lsquo;자연의 배후학&rsquo;를 알려는 긴나긴 노력에서, 자연이 자기의 자치와 자율의 힘(충력, 엘랑)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판단하고 또는 기호화하고 나아가 어떤 상징이나 표시(기표)를 만들고, 그리고 인간은 이것들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면서 공동체의 안정를 유지하고자 하였다.<br><br>이런 과정들을 보건데, 자연의 자기생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적 지성과 같은 인간 지성이 모든 답을 찾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 환경속에서 비례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던 쪽들이 있다. 이들은 단위와 통일성을 통해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루었다. 이런 사유방식을 사회에 적용하여 거래에 소중한 비례중항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질성의 생성과 발산이 통일성이라기보다 다양체라고 보았고, 공동체에서 삶은 거래보다 분배가 먼저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 사회 집단이 사실들의 모입(집합)이라기보다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연관 또는 연결방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쪽들도 있다.<br><br>어째거나 19세기 후반에서부터 자연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활동이 물체의 집합들과 다르다고 여기면서, 물체를 통한 생물학이 아니라 생명체의 다곱성을 통한 사회학과 심리학을 찾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비해 지성(이성)이 천문학, 물리학, 화학, 분자와 전자운동에까지 파고들어 수학적 도식 또는 상징화(기호화)와 함수계산을 통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쪽이 여전히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이 후자는 생물의 내부 움직임도 상징화가 가능하리라고 여기면서 다루었는데, 아직도 생명과 영혼에 대한 수학적 함수든 기호화든 이루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생명이 물체(신체)를 지니는 한에서 수학적 또는 역학(정역학이든 동역학이든)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설명하려 들고, 나아가 0과1의 체계 속에 인간의 두뇌활동까지 해명하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자들은 생명과 영혼에 관한 한 해명의 틀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포섭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고들 한다. 이런 양자의 사유는 대결(길항관계)이라기보다, 서로 상반된 방향의 힘이, 마치 지구 자성의 남극과 북극처럼, 또는 마치 플로티노스의 유출과 전향의 두 방향처럼, 방향이 달리하는 힘들의 진행으로 여기는 것은 현존에서 공연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양자의 사유가 이원성에서 출발하기보다 다원성으로 다루어 조직화와 유기체화에서 연대적, 대칭적, 상보적 등의 표현들은 다발 속에서 가지들 사이의 정도의 차이로 여기기도 한다.<br><br>철학사에서 한편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에서처럼 단위로서 수와 원자의 결합과 조립에서 체계를 만들고 그 틀과 그물망 안에서 소통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이들이 비례중항을 구하는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자. 다른 한편 삶에서 연결의 다곱성과 다양체에서 단위로서 리좀과 덩이로서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조화중항을 찾는다고 여기며, 여기서는 모듈레이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보자. 이 둘 사이에 대칭도 평행은 아니지만 어떤 연대성이 있을 수 있으며, 자연의 생성과 발생의 다발에서 각 부문들로부터 형상화 또는 도식화를 이룰 수 있고, 다발로서 여러 조직화와 체계화가 이루어지는 터전에서 거래가 아닌 분배의 조화를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한다.<br><br>인간은 이제까지 하나의 단위도 하나의 통일성을 찾지 못했다고 여기는 자연론자는 자연이 창조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을 좀 더 깊이 노력하여 찾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지성에 의해 수학과 논리, 물리와 생물에 대한 일정 부분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거꾸로 반문한다. 자연에 대한 탐구가 같은 대상을 동일하게 다루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자연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 속에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여긴다. 아마도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는 도덕에 있을 것 같다. 후자 편은 이익과 탐욕이 들어있는 데 비해, 전자에서는 공화와 공감에 있다고 해햐 할 것이다.<br><br>형이상학(자연배후학)의 탐구는 자연의 자발성이 창조해낸 것에 대해, 그 속에서 그 많은 생명체들이 창조된 것에 대해, 그들 사이에 조화중항에 비추어서, 인간이 총체적으로 진지하고 겸손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유하게 되면, 다른 생명체가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을 본능이라고 부르기 보다, 그 생명체가 지닌 직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도 여러 다른 생명체들의 직관들과 더불어 &ldquo;다음측정&rdquo;을 찾아가면서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는가. 함께란 결국 도덕론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는 태어나는 이들도, 살아가는 이들도, 자연의 흐름을 익히는 학습이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교육이 중요하다. 자연 배후학, 교육, 그다음으로 자연 또는 지구라는 공동의 판을 공감과 공명으로 살아가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리라. 원래 형이상학에 제시하는 화두는 함께 어우러져 잘살자는 것이 아닌가. (59UMF)<br><br>***<br><br>프랑스 철학책들은 읽어보면 저자가 용어를 통상 용어와 달리 쓰는 것 같고, 또한 용어들을 저자 자신의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쓴다. 게다가 저술의 뒤에 용어 찾기(인덱스)가 없다. 나로서는 새천년 초반에 2년에 걸쳐 세미나를 통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9)』을 읽었었다. &ldquo;함성&rdquo;이란 단어에 주목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단어가 거의 마지막에 나온 것에 놀랐다. 바디우가 들뢰즈의 사후에 그에 대한 비평의 글로서 『들뢰즈, 존재의 함성(Deleuze. La clameur de l&#39;&Ecirc;tre, 1997)』&ldquo;&rdquo;을 썼다. 바디우는 잘 읽었다고 해야 하나(?)<br><br>프랑스 철학저술들이 이런 색인이 없다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나서, 그것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어도 어느 구석에 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경우가 태반이다. 노트 없이 읽어놓으면 읽은 것이 못되고 또는 참조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형님의 이 책도 용어색인을 만들지 않아야 할 것 같다. 그 단락 또는 문단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바디우의 비평서를 읽으면서 바디우가 약간 소심하다고 느꼈다. 그 용어를 알았으면, 들뢰즈가 살아 있을 때 책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차이의 반복에서 들뢰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생명 또는 영혼이 생성 또는 발현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에, 존재의 함성이 아니라, &lsquo;생성(창안)의 함성&rsquo;이라 해야 할 것 같다.<br><br>프랑스의 학문계에서, 저술에서 색인을 만들지 않듯이, 프랑스 저자는 또는 사상가는 자기의 글을 자기식 표현대로, 자기 방식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전부 읽지 않으면, 그 저자의 어떤 중요한 용어를 고를 수 없고, 그 단어의 쓰임새를 알지 못하고 그 용어를 인용하면, 그의 의도에 반대를 찬성으로 인용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냥 죽 읽어서 그 내용을 관통하여야, 그가 쓰는 용어들 또는 내용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다.<br><br>언젠가, 푸꼬가 들뢰즈를 읽거나, 들뢰즈가 푸꼬를 읽으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고 깊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둘이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의 평가에 대해 들어서 아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두 철학자는 1900대 초반에 프랑스 철학계의 양대산맥이었던 벩송과 브륑슈비끄의 대립처럼, 서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 같다. 이 둘이 서로 라깡 또는 프로이트의 견해들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두 학자는 다른 계통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럼에도 둘이 한 동안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보기에 들뢰즈가 한자리에서 노마드로 살았고, 푸꼬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노마드로 살았는데, 서로 삶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는 적대적이라기보다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면서 의미화작업을 대립적으로 서술하면서, 마치 벩송과 브륑슈비끄처럼, 서로 달리 담론을 전개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br><br>형님의 저술들은 시대와 화해하지 않고 불협화음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그가 스승 박홍규가 플라톤의 독해를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읽어내듯이, 형님은 세상(우리나라)을 그가 그려보고 싶은 대로 그렸다고 본다. 형님은 현 세상을 자신의 책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저항 운동에도 닿아있다. 분단의 아픔을 불교와 같은 방식으로 치유에서 찾아내려 하기기도 하고,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중생들처럼 스스로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으며, 그 이야기를 아픈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들의 소리를 내고자 했다고 느낀다. 그런 그의 입말은 학문 세계에서 표현하는 단어, 용어, 개념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책을 누가 보겠느냐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아픔의 백성 또는 민중은 제도와 체제 길들여 있었지만 그래도 형님과 같은 느낌으로 읽을 것이다.<br><br>형님은 내재의식의 소리를 밖으로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철학자에 속한다. 그 내재의식의 발현하는 가운데, 형님 만큼이나 폭넓기도 하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이도 드물다. 그러면서도 학문의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 안에는, 허리 잘린 우리도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그도 서울의 분위기에 속했다. 서울의 서양 철학적 풍토는 일본을 통한 계몽이라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의 입말을 따라가면서 불교의 천년 유교의 오백년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상하게도 계몽주의를 따라가서, &ndash; 우리나라의 실학이 자연주의를 수용하지 못하여? - 일제의 학문적 지배와 미제의 과학적 진리에 그도 모르게 은연중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한다.<br><br>그래도 이 두 제국주의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우리 입말로 글을 쓰고 정리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존재론, 형이상학, 우주론 등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이어나온 것이다. 이런 작업은 스승(박홍규)의 구술 책들과 달리 또 하나의 색인 없는 저술들을 만들었다. (59ULA)<br><br>(재배치, 4:26, 59UMH) (5:04, 59umh)<br>시뮬라시옹에서 구성과 구축 물리학적 메카니즘에 가깝다면, 모듈라시옹(modulation) 조성에서 조율과 변조는 생명체의 내부 조절과 변조에 가깝다.<br><br>&ldquo;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rdquo;은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 1911)｣(ES, 1장)에 나오는데 1911년 강연에서이다. 벩송은 이 강연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과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1980)』, ｢3장, 기원전 1만년: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은 벩송의 &ldquo;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rdquo;에서 &ldquo;사실들&rdquo; 대신에 &ldquo;지층들&rdquo;로 바꾸어 진화의 과정을 변조(la modulation)의 과정으로 서술했다. 그 두 흐름의 방향과 내용은 매우 닮았다. 들뢰즈는 사물을 다루는 방법으로 구성과 구축의 관계 방식을 통한 시뮬라크르를 이용하였고, 그 다음으로 내재의식을 다루는 방식으로 조성과 조율의 연관방식(수학에서 고차 함수의 변환들처럼)을 통한 변조(la modulation)를 이용하였다. 이렇게 보면, 들뢰즈는 벩송의 계보이다. (59ume)<br>천하루 26-10-28 18:02<br><br><br><br><br><br><br>&nbsp;<br><br><br>]]></description>
			<author>류종렬</author>
			<pubDate>Sat, 31 Oct 2026 08:46:20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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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포르투나와 비르투</title>
			<link>http://www.essayphilosophy.net/article/1945</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3eb60982e4fbb19b006bbb317f19bc47cf202486.jpg" class="fr-fic fr-dib"><br>우연히 몇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던 이야기다. "성공하는 데 운(運)과 기(技)가 각각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할까?"라는 질문에 한 선배가 당당하게 답했다. 자신의 경험상 운이 90%이고 노력은 10% 남짓인데, 그마저도 후하게 쳐준 것이라는 말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 고등 교육을 받은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잡는 것 모두가 온전히 운이라는 논리다. 그 선배는 생물학적 유전자와 사회적 환경의 절대적 영향력을 당연시하며, 삶의 성패가 우연한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나는 노력이 정당한 대가를 얻는 일은 극히 드물다며, 끝내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다"거나 "금수저, 은수저" 같은 자조 섞인 발언을 이어갔다. 개인의 노력을 사실상 무화(無化)하는 결론이다. 이쯤 되면 고대인들처럼 사주팔자와 운명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 최첨단 사회에 만연한 이 기묘한 숙명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고대인과 근대인을 가르는 핵심 기준은 삶을 이끄는 동력을 '운명'에서 찾느냐,&nbsp;'개인의 노력'에서 찾느냐에 있다.&nbsp;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Oedipus) 신화는 고대인들에게 운명(Fate)을 비켜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nbsp;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키타이론 산속에 버려진다.&nbsp;그러나 갓난아기를 가엾게 여긴 양치기가 이웃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아이를 건네고,&nbsp;목동이 그를 왕실에 바치면서 오이디푸스는 왕자로 자라난다.&nbsp;청년이 된 그는 끔찍한 신탁을 피하고자 스스로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향하지만,&nbsp;세 갈래 길에서 우연히 시비가 붙은 노인을 살해하고 만다.&nbsp;그가 바로 테베의 왕이자 자신의 친아버지였다.&nbsp;이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그는 왕위에 오르고 선왕의 왕비,&nbsp;즉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다.&nbsp;신탁의 저주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건만,&nbsp;바로 그 노력 때문에 신탁이 여지없이 실현된 것이다.&nbsp;20세기의 탁월한 수학자이자 형이상학자인 화이트헤드(A.&nbsp;N.&nbsp;Whitehead)는 명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그리스 비극의 이 가혹한 운명관이 근대 과학을 지배하는 '철(鐵)의 자연법칙'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통찰한 바 있다.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이러한 고대적 운명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근대인이자,&nbsp;근대 정치철학의 새 지평을 연 사상가다.&nbsp;고대인이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na)의 절대적 지배에 굴복했다면,&nbsp;근대인은 자신의 주체적 역량과 기량인 비르투(Virtù)를 신뢰한다.&nbsp;마키아벨리는 인간의 탁월한 역량이 운명의 일방적인 폭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nbsp;해마다 여름이면 범람하여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거센 강물을 떠올려 보자.&nbsp;평소 성실하게 둑을 쌓고 운하를 파두면 운명처럼 반복되던 홍수의 재앙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nbsp;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여신이 운명에 순응하는 노인보다는 과감하게 운명을 개척하는 젊은이를 더 편애하므로,&nbsp;때로는 여신을 거칠게 다루어서라도 삶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실제로 근대인은 삶을 옥죄던 신탁과 신(God)의 섭리,&nbsp;봉건적 신분 질서와 자연환경에 맞서며 스스로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nbsp;항해 중 난파당해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해 보자.&nbsp;그곳에는 그의 생존을 보장해 줄 영국의 종교도,&nbsp;사회적 전통이나 관습도 없었다.&nbsp;그는 오직 자신의 이성으로 생존의 설계도를 그렸고,&nbsp;두 손과 발로 노동을 투여해 그것을 현실에 구현했다.&nbsp;막막하고 적대적이던 무인도는 점차 그의 합리적 통제 아래 놓인 삶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nbsp;자의식의 주체인 근대인 역시 로빈슨 크루소처럼 자신의 이성과 노동으로 종교개혁을 완수하고,&nbsp;계몽주의와 시민혁명으로 중세 봉건 체제를 무너뜨렸으며,&nbsp;자본주의와 산업화를 통해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일구어냈다.&nbsp;근대라는 거대한 실험은 더 이상 운명에 안주하지 않는 인간 역량(Virtù)의 위대한 실현 과정이었고,&nbsp;서구인에게 근대는 무한한 진보를 약속하는 낙관주의의 시대였다.하지만 그 눈부신 발전이 과연 근대인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보장해 주었는가?&nbsp;산업화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nbsp;그 이면에서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극단적 대립과 불평등이 심화되었다.&nbsp;이 모순을 극복하고자 근대의 내부에서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탄생했으나,&nbsp;그 역시 실패한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nbsp;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극대화했지만,&nbsp;동시에 생태계를 파괴하여 오늘날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를 불러왔다.&nbsp;나아가 20세기의 양대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이 쌓아 올린 문명이 인간 자신의 손으로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nbsp;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nbsp;견고해진 자본의 성벽 앞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세습된 부의 격차를 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팽배하다.이 일련의 사태를 돌아보면 인간의 노력과 역량이라는 것에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인간이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세계를 개척해 왔지만, 결국 우리 앞에 되돌아온 것은 통제 불가능한 거대한 위기와 구조적 불평등이라는 산적한 문제더미다. 근대인이 추방했다고 믿었던 포르투나(운명과 우연)가 기후 재앙과 자본의 세습이라는 현대적 가면을 쓰고 다시금 비르투(인간의 노력)를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경제 전문지 이름이 다름 아닌 《포츈(Fortune)》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조차 부와 성공은 '기삼(技三)'의 노력보다 '운칠(運七)'의 요행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해서 붙인 이름이었을까?]]></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Fri, 30 Oct 2026 18:28:1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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