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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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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Tue, 07 Jul 2026 07:49:1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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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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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참 좋은 시절이었지!</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15</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a1dd3a053aaa1869eb2167bc68a4d991cb43cac0.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505px;">﻿&nbsp;&nbsp;&nbsp;&nbsp;&nbsp;&nbsp; 그림 출처: 나무위키나이를 먹고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면 바뀌는 것도 많다. 젊었을 적에는 술, 담배를 억수로 많이 했지만 지금은 멀리서 누가 담배 연기만 날려도 피하고, 술은 한 달에 한 번 마시는 정도이고 그것도 소주 반 병을 넘지 못한다.<br>젊었을 적에는 그 여인을 보지 못하면 못 살 것 같았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불타오르던 정염은 사라지고 이제 식은 재만 남았다. 젊었을 적에는 읽을 만한 책이 나오면 없는 돈, 있는 돈 다 끌어모아 구입하곤 했지만, 지금은 아파트 공간만 차지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책에 대한 집착은 지금 세대의 아이패드 열광을 훨씬 능가했다.<br>젊었을 적에는 친구와의 의리를 죽자 사자 지키려 했지만, 그간 나를 무시한 *, 나를 배신한 *, 나에게 뒷담화하며 희희덕거리던 재수 없는 * 등등에게 몇 차례 생선회 칼로 등에 찔리고 나니, 인간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것 같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은 유도 아니더라.<br>젊었을 적에는 아파트 평수가 열댓 평 안 되고 그 안에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세 배가 넘는 공간에서 아내와 둘이서만 살아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뿐이다. 오만 가지 쓰레기 같은 책, 데스크톱과 노트북, CD와 운동기구 등이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내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비슷하다는 느낌뿐이다.<br>젊었을 적에는 어쩌다가 택시만 타도 기분이 좋았지만, 나이를 먹으니 과분한 차를 타고 다녀도 늘 더 좋은 차들이 눈에 밟혀 내 차 바꿀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럼에도 엄처시하라 함부로 행동을 못 하는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할 뿐이다.<br>젊은 총각 시절에는 옆에 애인만 있으면 좋았고, 마누라가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지만, 이제 70을 넘긴 지금은 마누라는 그냥 치마 걸친 남자로 보이고, 마누라도 가끔 나에게 &ldquo;형, 술 한잔 할까?&rdquo; 하고 썰렁한 친구처럼 대한다.<br>젊었을 적에는 여자를 대동하고 다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호기를 부려 내가 다 비용을 지불하려 했지만, 지금은 수입도 별로 없고, 알량한 연금 몇 푼으로 그저 병원비와 약값 충당하기 바쁘고, 인터넷과 휴대폰 사용료, 넷플릭스 비용과 소소하게 가입한 휴대폰 앱 사용료 내기도 힘들다. 적지 않은 수입이 있는 마누라에게 SOS를 타진하면 소 닭 보듯 하면서 오히려 생활비 내라고 닥달하고, 외식이나 여행 등 비용이 발생하면 무조건 더치페이하자고 한다. &ldquo;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rdquo;고 했는데, 마누라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인색해지고 고약해진다.<br>젊었을 적에는 친구 결혼식에 가도 너나 할 것 없이 호주머니가 가벼운 시절이라 별로 부담이 들지 않았고, 상갓집 갈 일도 별로 없어서 부의금 낼 일도 없었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여전히 반 조세성 비용 지출이 적지 않다. 친구 자제들 결혼식장들을 주말마다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축의금 봉투 마련하느라 잘하던 술, 담배조차 줄이기도 했다. 지금은 친구들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제들 결혼식이 줄을 잇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구들 부모들과 당사자들 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봉투 이름이 더욱 다양해지니 민간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당연히 내야 한다는 세금성 비용이 심하게 압박해 온다. 이 밖에도 사고 몇 번 난 뒤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동차 보험료와 자질구레한 건강보험료, 마누라가 나 몰래 들어 놓은 실손보험료 등을 대느라 등골이 빠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br>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수입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감당했지만, 지금은 수입도 변변찮은데 그 액수가 커지니 당최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 이럴 때는 이것저것 보기 싫다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지방의 조그만 도시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친구 *이 부러울 지경이다.<br>사정이 이러하니 노년의 무슨 여유가 있고, 행복이 있겠는가? 그러니 노년이 되면 유유자적 여가와 취미 생활을 즐기기보다는 차가운 길바닥 위에서 등에는 가스통 메고, 양손에는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서 악다구니를 펴는 것이 아닌가? 못 살겠다, 못 살겠다. 다 바꿔 버리자, 옛날이 좋다. 아, 그 옛 시절이 참 좋았지! (Es war sch&ouml;ne Zeit!)﻿&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20:43: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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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 땅의 西洋化勢力이 逆說的으로 枯死시키는 西洋學問</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14</link>
			<description><![CDATA[제공해주신 영상의 핵심 문제의식(&lsquo;무리한 서양화 세력이 오히려 한글 전용을 통해 서양 학문의 토양을 말라죽게 만든 역설&rsquo;)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아 작성한 지적인 에세이입니다. [제미니Gemini]<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2b98cffc07029717e15dbdeb0015976327fce212.jpg" class="fr-fic fr-dib">20세기 이후 우리 사회를 관통한 가장 거대한 거대 담론은 단연 &lsquo;서양화(西洋化)&rsquo;였다. 해방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는 생존과 부강을 위해 서양의 제도와 기술, 그리고 그들의 학문적 성취를 맹목적일 만큼 빠르게 흡수해 왔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 동양 철학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이라는 오명 속에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도 했다. 이 땅의 서양화 세력들은 동양의 흔적을 지우고, 그 자리에 서양의 합리성과 지성을 심어 넣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지적 토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이하고도 슬픈 역설(아이러니)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동양 철학을 고사시키고 서양 학문을 뿌리내리려 했던 이들의 기획이, 도리어 서양 학문의 토양을 스스로 말라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lsquo;언어의 소통 차단&rsquo;과 무리한 &lsquo;한글 전용&rsquo;의 맹점이 자리 잡고 있다.학문이란 본디 개념의 정교한 벽돌로 쌓아 올린 성채다. 특히 근대성의 뼈대를 이룬 서양 철학은 단어 하나하나가 치밀한 논리적 정의를 품고 있다. 하지만 이 땅의 서양화 세력들은 동양의 정신을 지우겠다는 일념 하에 한자(漢字)를 배척하고 문자 생활을 극단적인 한글 전용으로 몰아갔다. 그 결과 서양의 난해한 철학 개념들은 정교한 번역어를 잃은 채, 뜻이 모호하고 붕 뜬 한글 표기 속에 갇혀버렸다.예컨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등장하는 어떤 지적 능력을 한글로만 &lsquo;예지력&rsquo;이라 표기했을 때, 한자 문화권의 지적 맥락이 거세된 대중은 이를 흔히 &lsquo;미래를 예측하는 초능력&rsquo;쯤으로 오해하곤 한다. 대중소설이라면 문맥의 흐름으로 단어의 숨은 뜻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한 문장 자체의 사유가 심오한 철학적 텍스트에서는 단어의 모호함이 곧 사유의 단절로 이어진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은 뜨거운데, 정작 서양 철학 서적을 펼치면 뜬구름을 잡는 듯한 무력감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의 고도로 훈련된 법조인이나 지식인들조차 "번역된 철학책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것은 결코 그들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개념의 도구가 부실하기 때문이다.재미있는 것은, 이 와중에 본래 고사당할 위기에 처했던 동양 철학은 역설적으로 그 명맥을 단단히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 학문은 본래 원문이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를 공부하려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한자라는 언어적 도구를 쥐어야만 했다. 배척하려 해도 배척할 수 없는 원전의 힘 덕분에, 동양 철학은 오히려 오염되지 않은 개념을 유지하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고유한 생명력을 보존해 왔다.반면, 서양 학문을 대중화하고 사회의 보편적 교양으로 정착시켜야 했을 인문학자들은 원어(영어, 독일어)라는 자신들만의 성채 안으로 숨어버렸다.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대중이 무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식의 선민의식은 인문학을 삶의 스승이 아닌, 소수 전공자들의 전유물인 &#39;기능적 도구&#39;로 타락시켰다. 이공계가 영어 원서를 읽으며 기술 엘리트 사회를 구축한 것처럼, 서양 철학 역시 대중의 삶과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된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우리가 서양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서양 학문의 가치를 부정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lsquo;지피지기(知彼知己)&rsquo;의 관점에서 서양의 근대 사상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서양의 학문은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제도를 만드는 원동력이었으며, 우리는 이를 온전히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서양 학문의 껍데기만 요란할 뿐이다. 좌파니 우파니, 자유니 민주니 하는 서양식 개념들을 저마다 외쳐대지만, 그 사상적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해 낸 이는 드물다. 서양화라는 미명 하에 정작 서양의 깊은 지성은 심지 못하고, 우리의 정신적 토양만 황폐해진 꼴이다.진정한 학문적 주체성은 무리한 외형의 서양화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의 글과 풍습, 전통이라는 굳건한 뿌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서양의 학문적 성취를 정교하게 번역하고 소화해 낼 때, 비로소 진정한 지적 도약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양을 지우는 서양화가 아니라, 서양의 지성을 우리의 언어로 부릴 줄 아는 깊이 있는 포용력이다. 개념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이 땅의 지식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언어와 학문을 대하는 진지하고도 본질적인 성찰이다.<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1e81f27e3701ff3eb0d55508cc8d3028fe7a0d1d.jpg">챗지피티(chatGPT)<br><br><br>출처영상 :&nbsp;https://www.youtube.com/watch?v=2DkD4AL-I5g&t=2s&nbsp;]]></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20:35: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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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하메네이의 장례식을 보며</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13</link>
			<description><![CDATA[이란은 명목상 삼권 분립이 확립된 민주정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라흐바르(최고지도자)가 삼권 위에 군림하여 정부나 국회가 통과시키는 어떠한 법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군통수권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군직의 대부분의 직책을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란 국민이 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인준을 해줄 수 있지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다만 대통령과 국회의원 및 라흐바르를 선출하는 율법 전문가 회의에서 후보를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인사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라흐바르는 사실상 이란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 특유의 신정 체제에서는 라흐바르가 국가 원수이고 대통령은 사실상 정부 수반에 불과하다. 따라서 라흐바르는 국가 내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란의 최고권력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라흐바르이다.&nbsp;<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2e0cc2fbc3ccc88ac20330173a7dd0fdbf866fb7.jpg" class="fr-fic fr-dib">2026년 7월 4일 이란 테헤란에서 벌어잔 알리 하메네이의 장례식, 출처 : BBC신정 체제 이란의 두 번째 최고 권력자였던 알리 하메네이는 직접 정책을 입안하거나 추진하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Assembly of Experts)에서 그가 선출되었고 그의 승인 없이는 어떤 결정도 집행되지 않는다. 하메네이의 글과 연설로 볼 때 이란 국내외 정치적인 목적과 목표를 가장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하메네이의 막강한 권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2000년 8월에 하메네이가 보낸 서한 한 통으로 인해 의회에서 논의되던 언론을 개혁하자는 법안이 철회되었다. 2003년 6월 언론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미국의 사주를 받는 용병들이라 이들을 지칭하여 이들에 대한 시위 진압을 지시했다. 이러한 지시 한마디에 모든 이란 내의 정부 조직들이 긴밀하게 움직였고 결국 해당 시위는 쉽게 진압되었다. 이러한 부분들은 하메네이가 얼마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그래서 이란 대통령들이 아무리 개방적이고 서방에 우호적이라 해도 최고권력자인 하메네이가 용인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br>이슬람 혁명 수비대와 종교경찰들은 그동안 숱한 시위와 통제를 자행하면서 인권 탄압을 했다. 이란의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이란의 기자들에 대한 엄청난 탄압을 명령했으며 이를 기준으로 강력한 통치를 했다. 실제로 수많은 언론인들과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 그리고 민간단체 회원들이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더불어 2009년 경제난, 실업율, 신정 정치 등에 이란 국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분명 미국의 보이지 않는 개입 또한 있었을 것이다. 하메네이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하메네이의 이러한 탄압은 세계적 비난을 받았지만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폭동에 준하는 시위는 국가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참고로 독일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 도이칠란트(FTD)에서도 장기 집권으로 인권을 탄압하는 지도자로 당장 2012년에 물러나야 할 지도자는 북한의 김정은과 함께 하메네이가 지목되었다. 그리고 2008년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세계 최악의 독재자로 선정됐을 정도였다.&nbsp;<br>2014년 들어서는 이란에서 하루에 3명 꼴로 처형이 이루어질 정도로 사형이 늘어났다. 물론 그 중에는 범죄자도 있지만 상당수가 양심수이거나 정치범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가 이를 증언했는데 당시 이란에서는 샤리아 법으로 인한 인권 유린이 지속적으로 발생되었다. 그러면서도 하메네이는 유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테헤란에서 여성들의 히잡은 10년 전인 2016년에도 잘 쓰지 않았다. 필자 또한 그 시기에 이란 테헤란을 두 번 방문했는데 머리카락과 목선이 드러나는 두건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풀어줄 때는 풀어주고, 엄격해야 할 때는 매우 엄격했다. 공화주의라기보다는 공화주의를 내세운 왕정이나 다름없었다. 하메네이는 극심한 반이스라엘 성향이고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이었다. 파타와 하마스, 팔레스타인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펼치던 인물들이 이란에 오면 성대히 대접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후를 위협하던 하마스와 레바논 헤즈볼라를 공식적으로 후원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전쟁을 벌일 때도 하메네이가 적극적으로 하마스와 가자 지구 주민들에게 도와주었다.&nbsp;<br>그러다보니 미국은 테러단체 후원국이라 비난했으며 이스라엘에게서는 악의 세력을 지원하는데 악의 진원자로 여겨져 온갖 증오를 받았다. 2019년 11월에는 반(反) 정부 시위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최소 180명, 최대 450명이 4일&nbsp;사이에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정도 숫자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같은 진압을 하메네아가 명령한 것으로 판단되어지지만 실제로 그러한 명령은 하메네이가 내렸는지 또한 알 수 없다. 내정 문제는 대통령의 권한이고, 그가 임의로 바시지 민병대에게 명을 내렸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21년에는 경제난과 물 부족 사태에 대한 미해결, 이어 각종 문제가 발생하자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인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을 유발되었다. 이는 코로나 등으로 인해 좋지 않은 경기를 보여왔던데다 그동안 쌓여 왔던 미국의 제재가 합쳐져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친팔레비 왕정주의자들과 미국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국민들을 선동하여 2021년과 2022년에 연쇄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nbsp;<br>이에 테헤란에는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여 군을 배치하고 다른 도시에서는 심지어 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도 하는 등 피해가 지게 되었다. 2026년 1월 8일에는 2025~2026년 이란 반정부 시위로 인해 공공기관이 점령당하고 모스크와 마드라사가 불에 탔으며 시위 규모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확산되었다. 이에 인터넷 차단 조치와 함께 이슬람 혁명수비대를 주도로 하여 진압 작전을 진행했고, 가까스로 진압되었지만 트럼프의 쿠르드족 사주 및 색깔혁명 시도의 정황이 드러나면서 이란 시위 자체가 순수한 민주주의 시위가 아닌 폭동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15시간 만에 관저에서 일가족과 함께 폭사당하며 36년간 이어졌던 그의 통치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의 차남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라흐바르 지위를 승계했고, 결국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메네이를 죽인 것은 오히려 이란 시민들을 단합하게 만들었다. 이란 내에서 하메네이는 순교자가 되었고, 이틀 전부터 진행되고 있는 하메네이의 장례식에는 무려 2,000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그를 추모했다.<br>나는 전에도 얘기했지만 하메네이를 좋아하거나 그를 추모하지 않는다. 사실 시아파를 연구했던 수니파 무슬림으로써, 그는 최악의 인물이자 독재자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과 중동 내의 이란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미국이나 서방 세력과 싸웠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권력을 위한 영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그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탄압했다. 물론 그 숫자가 1만, 2만, 4만, 혹은 7~10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통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독재가 들어가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은 필히 따르는 법이다. 그렇지만 같은 무슬림일지라도 자신과 종파가 다른 수니파 무슬림의 피를 많이 묻혔다. 지도자로써 누구나 공과 과가 존재하며 이를 연구하고 평가하는 것은 우리 같은 역사학자의 몫이다. 다만 그를 온전히 추모할 수 없다는 것은 1. 같은 무슬림들을 살해했고, 2.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에 대한 탄압이 혹독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하메네이에 대해 추모를 하지 않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이란이 모즈타바와 신정 정권에 오히려 시민들이 결속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현재 유리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메네이의 장례식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그에 대한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13:39: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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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6 《존재의 성향과 공동체의 책임에 대하여》</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12</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f2a113f34642fc43749d37eb73c783c76ae2a799.jpg" class="fr-fic fr-dib"><br>&nbsp; ●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존재의 성향과 공동체의 책임에 대하여》&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조율여백 이수진&nbsp;이 글은 완전한 진리라고 주장하기보다, 제가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경험과 학습, 그리고 성찰을 거치며 형성하게 된 하나의 관점입니다.<br>저는 인간의 성향을 매우 단순화하여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이해해 보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인간은 훨씬 복합적이며, 한 사람이 삶의 과정에서 여러 성향을 함께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분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사고 틀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br>첫 번째는 희박한 선의와 의미에도 깊이 공명하는 존재들입니다.<br>이들은 역사 속에서 남겨진 작은 흔적이나 누군가의 성실한 노력, 희생과 감내를 단순한 과거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매우 작은 흔적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느끼고 감사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이어 가려 합니다.<br>이러한 공명은 결국 조화와 공존, 그리고 더 널리 이로운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br>두 번째는 배움과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br>이들은 때로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도 하지만, 주변 환경과 경험, 그리고 다른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 조금씩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br>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부당한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닌 존재들입니다.<br>저는 이러한 존재들이 공동체 안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회는 이들을 배척하기보다,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여깁니다.<br>세 번째는 타인의 노력과 선의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거나 파괴하는 성향을 보이는 존재들입니다.<br>저는 현실 속에서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도 감사나 공감, 책임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거짓과 왜곡, 기만을 반복하며 타인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주는 사례들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br>물론 모든 사람을 이러한 범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반복적인 착취와 폭력, 사기와 권력 남용처럼 공동체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위는 분명 존재합니다.<br>이러한 경우에는 단순한 선의나 설득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br>그래서 저는 공동체가 합당한 제재와 책임의 원칙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특히 사회의 운영 과정이 보다 공개되고 투명해지는 것, 즉 오픈화가 이루어진다면 권한의 남용과 월권을 줄이고, 부당한 행위에 대해 보다 공정한 검증과 책임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br>결국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더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입니다.<br>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감사를 배우고, 타인과 교감하며,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조금씩 더 조화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br>반대로 거짓과 왜곡, 그리고 부당함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신뢰와 질서는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br>그래서 저는 인간 사회에는 공명과 포용, 그리고 동시에 책임과 제재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공동체는 부정함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합당한 범위 안에서 관리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br><br>]]></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10:09:1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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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 반려로봇 市場 '중급형'에 수요 몰려</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11</link>
			<description><![CDATA[중국의&nbsp;伴侶人造人間의 가격등급은 우리 돈&nbsp;2천만원에서&nbsp;2억원까지 있다고 하는데 등급은 셋으로 나뉘었다.사용자를 기억하고 소통하는 인공지능 기능은 모든 모델이 같다고 한다.다만 등급에 따라 몸이 다른데 기본형은 상체만 있는 것이고 중급형은 온전한 사람 모양이지만 걷지는 못하고 고급형은 보행이 가능하며 고객이 모습을 주문할 수 있다.궁금한 것은 사용자의 선호도 였다. 답은 중급형에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상반신만 있는 상담전문형 로봇을 구매하는 &lsquo;점잖은&rsquo; 고객은 적었고 고급형은 특정목적에 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nbsp;<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7a73c0b2b2702627b7a9fb36043f3d9d256e7d6e.jpg" class="fr-fic fr-dib">（超仿生人形机器人&ldquo;优世界U1 Ultra&rdquo;机器人。图源官网）&nbsp;다음은 인공지능 딥시크의 해설&nbsp;💰&nbsp;가격 차이의 핵심: &#39;반쪽 로봇&#39; vs &#39;걷는 로봇&#39;가격이&nbsp;2천만 원에서&nbsp;2억 원까지 나는 이유는&nbsp;&#39;몸체(하드웨어)의 완성도&#39;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납니다.모델명 한국 기준 예상 가격 가장 큰 차이점U1 Lite (보급형)&nbsp;약&nbsp;2,160만 원&nbsp;상반신만 있습니다.&nbsp;허리 아래는 없어서 앉아있는 형태로만 사용 가능합니다.U1 Pro (중급형)&nbsp;약&nbsp;3,060만 원&nbsp;완전한 사람 형태입니다.&nbsp;피부 질감이나 표정 구현이 매우 정교하지만,&nbsp;아직 스스로 걷거나 집안일을 하지는 못합니다.U1 Ultra (최고급형) 남성형 약 1.78억 원 여성형 약 1.58억 원, 걷는 것이 가능하며 외형을 고객이 직접 주문 제작할 수 있습니다(좋아하는 연예인이나 가족 얼굴로 맞춤 제작 가능).❓&nbsp;그럼&nbsp;&#39;저가&#39;&nbsp;제품(U1 Pro, 3천만 원대)은 어떤 수준일까요?질문하신 대로, 3천만 원짜리도 결코 싼 가격은 아닙니다.&nbsp;따라서 기본적인 피부 촉감(실리콘 재질),&nbsp;표정 변화,&nbsp;손동작,&nbsp;대화 시 고개나 눈동자 반응 등은 최고급형과 거의 동일하게 갖춰져 있습니다.가격 차이가 나는 핵심 포인트는 2가지입니다:다리(보행) 유무: 3천만 원짜리는 다리가 있지만 &#39;장식&#39;에 가깝고, 2억 원짜리는 진짜로 걸어다닙니다.외형 커스터마이징: 3천만 원짜리는 회사가 정해놓은 기본 얼굴과 헤어스타일만 선택 가능하지만, 2억 원짜리는 피부 톤부터 눈동자 색, 얼굴형까지 완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nbsp;🧠 &#39;기억력(성능)&#39;&nbsp;차이는 없나요?놀랍게도&nbsp;&#39;기억력&#39;이나&nbsp;&#39;대화 능력&#39;, &#39;감정 인식 능력&#39;은 모든 모델이 똑같습니다.이 로봇의 핵심은 &#39;감정 교감&#39;이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AI 두뇌(소프트웨어)는 전 모델에 동일하게 탑재했습니다.즉, 2천만 원짜리나&nbsp;2억 원짜리나 사용자의 말투,&nbsp;취향,&nbsp;하루 일정을 똑같이 기억하고&nbsp;20여 가지 감정을 인식하는 수준은 완전히 동일합니다.&nbsp;🏠 &#39;저가&#39;&nbsp;제품의 현실적인 한계정리하자면, 3천만 원짜리&nbsp;U1 Pro는&nbsp;"매우 정교한 감정 교감이 가능한 움직이는 반신 인형"에 가깝습니다.잘하는 것: 눈 맞추며 대화하기, 표정 짓기, 손 흔들기, 사용자 감정 읽어주기, 하루 일정 리마인드 해주기.못하는 것: 집안 청소, 설겆이, 옷 개기, 계단 오르내리기, 혼자서 걸어서 방문 열기.전문가들은 현재 이 로봇을 &#39;필수 가전&#39;이 아닌 &#39;고급 감성 장난감&#39; 단계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기술 자체는 매우 혁신적이지만, 아직은 &#39;생활 속 도우미&#39;보다는 &#39;교감형 펫&#39;에 가깝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혹시 특정 모델의 더 자세한 스펙이 궁금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nbsp;(질문)가격의 차이가&nbsp;&#39;하드웨어&#39;이고 소프트웨어는 같다는 것이 놀랍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nbsp;소프트웨어는 탑재하는데 비용이 안들고 현실적으로 기존 소프트웨어 시장의 성능에 따른 가격차이는 고의로 성능제한을 하는 등&nbsp;&#39;비생산적&#39;인&nbsp;分類이니 모든 모델에 공평하게 보급된것은 당연하고 잘된 조치인듯 합니다.궁금한 것은&nbsp;..&nbsp;물론 앞으로 더 추이를 지켜봐야 하겠지만&nbsp;..&nbsp;고객의 선호가 어느 제품인가 입니다.&nbsp;어느 등급의 제품의 판매고가 많은지요.&nbsp;상반신만 있는 기본모델을 구매하는&nbsp;&#39;점잖은&#39;&nbsp;고객은 어느 만큼 있는지요.웹 페이지&nbsp;11개 읽음고객님의 생각대로, U1&nbsp;시리즈의 예약 판매 데이터를 보면&nbsp;&#39;상반신만 있는 기본 모델(Lite)&#39;을 구매하는&nbsp;&#39;점잖은&#39;&nbsp;고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가격대별 판매 비중과 고객 선호도에 대해 정리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예약 판매 데이터로 본 고객 선호도출시 직후&nbsp;U1&nbsp;시리즈의 전 채널 예약 주문은&nbsp;13,361대를 돌파했습니다.&nbsp;이는 지난해 전체 판매량(1,079대)의&nbsp;10배가 넘는 수치입니다.&nbsp;하지만 판매 비중은 가격대별로 극명하게 갈렸습니다.&nbsp;압도적&nbsp;1위: U1 Pro (중급형,&nbsp;약&nbsp;3,060만 원)전체 예약의 약 95%가 이 제품에 몰린 것으로 추정됩니다.&nbsp;완전한 사람 형태(상하체 모두 있음)에 피부 질감과 감정 교감 기능을 모두 갖췄으면서, 가격이 수억 원대 최고급형에 비해 현실적인 덕분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평가받았습니다.&nbsp;극히 일부: U1 Ultra (최고급형,&nbsp;남성형&nbsp;1.78억 원&nbsp;/&nbsp;여성형&nbsp;1.58억 원)걷기가 가능하고 외형을 완전히 주문 제작할 수 있는 최고급형이지만, 가격 부담 때문에 선택 비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nbsp;이 모델의 주요 구매층은 일반 소비자가 아닌 연구 기관, 고급 상업 전시 업체, 또는 자산가 수준의 &#39;하이엔드&#39; 체험 수요자로 분석됩니다.&nbsp;의외로 낮은 관심: U1 Lite (보급형,&nbsp;약&nbsp;2,160만 원)고객님의 질문처럼 &#39;상반신만 있는 기본 모델&#39;의 선호도는 예상보다 낮았습니다.가장 저렴한 가격대임에도 불구하고, 반쪽짜리 로봇에 2,000만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할 메리트를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이 모델을 &#39;고급 스피커&#39;에 비유하며 체험의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초기 예약 물량의 대부분은 Pro와 Ultra에 집중되었고, Lite 모델은 상대적으로 외면받은 셈입니다.&nbsp;👥&nbsp;실제 구매자들은 누구일까?흥미롭게도,&nbsp;이 고가 제품의 주요 구매층은&nbsp;&#39;젊은 남성&#39;이라는 통념과 달랐습니다.주 고객층: 35~50대 경제력 있는 독신 중산층, 혼자 사는 중장년층이 전체 예약자의 60%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을 덜고, 감정적 교류에 집중할 수 있는 &#39;로봇 동반자&#39;로서의 가치에 주목했습니다.&nbsp;기타 주요층: &#39;치유&#39;나 &#39;수집&#39;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젊은 2차원(서브컬처) 문화팬이나, 외로움을 달래줄 동반자가 필요한 60대 이상의 실버 세대도 주요 고객층으로 꼽힙니다.&nbsp;💎&nbsp;종합 정리결국 가격에 민감한&nbsp;&#39;합리적 구매자&#39;는&nbsp;3,000만 원대의 완성형(U1 Pro)을 선택했고,&nbsp;극소수&nbsp;&#39;하이엔드 구매자&#39;만이&nbsp;1억 원대의 최고급형(U1 Ultra)을 선택했습니다.그리고 &#39;저렴한&#39; 반쪽짜리 모델(U1 Lite)은 상대적으로 외면받은 셈입니다. 이는 고객들이 &#39;반쪽짜리&#39;라는 물리적 한계를, 2,000만 원 이상의 가격으로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워했음을 보여줍니다.]]></description>
			<author>박경범</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02:55:39 +0900</pubDate>
		</item>
		<item>
			<title>러시아와 그루지야, 그리고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은 남부 러시아 지역 분쟁</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10</link>
			<description><![CDATA[최근 벌어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그리고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지역에 대한 오래된 영토 분쟁과 민족 분쟁, 무엇보다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이 지역의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루지야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및 중앙아시아로 통칭되는 광대한 지역은 대개 이와 같은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는 제국주의적인 팽창에 몰두하였으며, 실질적인 지도에 없는 땅인 중앙아시아 지역을 자국의 세력권에 넣기 위해 경쟁하고 충돌했다. 이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은 과연 달라졌는지 의문에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는 여전히 매우 낮은 편이며, 주로 자원 확보나 개발 등 경제적인 부분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nbsp;<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479138826076f661106c599706e331a06ed84a15.jpg" class="fr-fic fr-dib">18세기 고지도 속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and-Lithuania)의 영토와 행정 구역을 보여주는 지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제국주의와 냉전 시대에 걸쳐 발생한 그레이트 게임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오랫동안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영국과 러시아가 경쟁을 벌였던 신장과 티베트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독립을 꿈꾸었으나 중국으로부터 갖은 압제를 겪으며 아직도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며, 전략적 요충지로 영국과 러시아가 장악하려 했던 아프가니스탄은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다. 카프카스 지역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도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가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자원 쟁탈 지역이 되고 있다. 이에『실크로드의 악마들(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의 저자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현재 &lsquo;새로운 그레이트 게임&rsquo;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시금 국제적 격랑에 놓여 있는 이 지역은 그 향방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지구의 축소판과도 같다.<br>홉커크는 당시 발간된 국제 정세를 다룬 문헌이나 영국과 인도, 러시아의 정부 문서, 그레이트 게임에 참여했던 개인들의 여행기나 논문 등 방대한 자료를 두루 섭렵하면서도 역사적 서술의 전형에서 벗어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거대한 제국주의적 흐름 속에서 분투했던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행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애국심이나 개인적 야심을 위해 험준한 산맥과 황량한 사막을 따라 이동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에 참여했던 이들은 자국의 제국주의적 목적에 봉사하게 된다. 탐험가이자 첩자, 군인이자 야심가였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묘비명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에 묻혔는가 하면 일부는 고국에 돌아와 명성과 권력을 얻기도 했다.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경쟁과 갈등 관계를 표현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영국 동인도 회사 제6 벵골 원주민 경기병대 소속의 정보 장교인 아서 코넬리(Arthur Conolly) 중위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루디아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소설『킴(Kim)』(1901)에 나온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nbsp;<br>고전적인 그레이트 게임의 시기는 1813년 러시아-페르시아 조약 체결 이후부터 시작되어 1907년 영국-러시아 협약 체결로 종료되었다. 이보다 강도가 덜한 2차 그레이트 게임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은 동방 최대의 보물이라 불리던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섰고 &lsquo;해가 지지 않는 나라&rsquo;로 지칭되어질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영국에게 인도를 식민지로 유지하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 이후 국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도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이 지역은 지도상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는 땅,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방어선, 본국이나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팔기 위한 시장으로 인식되었을 뿐 독자적인 전통이나 역사를 지닌 지역이 아니었다.<br>그레이트 게임은 애초에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대영제국이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던 제정 러시아는 쉽사리 국가 차원의 전쟁에 뛰어들 수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개인들의 참여로 시작되었다. 애국심과 야심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은 순례자나 현지인 말 장수로 변장하고 험난한 지형을 탐사하며 지도를 그리고, 지역의 부족들과 지도자들을 만나고 정세를 살폈다. 이후 본국에 돌아와서는 상대 국가의 위협을 강조하는 책과 논문을 작성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정부가 지금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정복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처음에 이들의 견해는 무시되고는 했으나 점차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lsquo;러시아 공포증&rsquo;이 만연하여 중앙아시아 점유에 소극적이었던 정부를 압박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23:0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초기 북한 정권에 정착한 고려인들</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9</link>
			<description><![CDATA[대조국 전쟁이 끝나자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소련군은 그곳의 조선인들과 함께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곳의 조선인들은 국가 건설은커녕 행정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일제 부역자들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일부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구역 당ㆍ공산주의청년동맹ㆍ콜호즈(집단농장)ㆍ기업체ㆍ교육기관ㆍ군 등에서 일하며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nbsp;<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b0f5d2d60e055f04c3960e935f5c87cc355e3b08.jpg" class="fr-fic fr-dib">1938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Kyzylorda) 사범대학 문학부에 재학 중이던 고려인 1학년 학생들과 교수진의 단체 기념사진, 출처 : OhmyNews1945년부터 49년까지 약 500명의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 하에서 민족적 억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민이었다. 북한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이들은 자신이 &lsquo;파견&rsquo;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lsquo;귀향&rsquo;한다고 생각했을까? 북한에 파견된 고려인들은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련에서 포시에트 구역 공산청년동맹(콤소몰) 비서로 일한 바 있는 허가이는 1946년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의 규약과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당 중앙위원회 제1 비서와 부위원장에까지 오른 조선로동당의 산파였다.&nbsp;<br>사마르칸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기석복은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의 주필로 일하며 선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찬가지로 타슈겐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유성훈은 내각 간부학교 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옴스크의 고리키사범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조기천은 1947년 서사시 ｢백두산｣을 발표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이 되었다. 소련 중앙은행 산하 재정대학을 졸업하고 동 은행 포시에트 지부장을 지낸 김찬은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일하면서 1947년 화폐개혁을 주도했다.&nbsp;<br>로스토프의 운수대학에서 철도운수를 전공한 박의완은 1948년 초대 내각의 교통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근무한 리동화는 조선인민군 군의국장을 맡아 한국전쟁 시기 야전병원에서 동분서주하였다. 한국전쟁 때 북측 대표로 휴전회담에 참석한 남일 또한 잘 알려진 파북 고려인 중 한 사람이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22:53:15 +0900</pubDate>
		</item>
		<item>
			<title>모스크바의 비운의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 이야기</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8</link>
			<description><![CDATA[보리스 고두노프는 당시 슬라브 족 통치 지역에서 카톨릭 교회의 탄압을 받고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등 매우 온건하고 모스크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키예프와 기타 슬라브 족 사회에서 그는 차르로써 즉위의 정통성을 의심 받는 상태였고 처음 키예프 루스와 유리 돌고루키 후예 단절의 이유가 되었던 황태자인 드미트리의 죽음 자체가 고두노프가 살해한 것으로 전 슬라브 족장들의 의혹이 고두노프 통치의 장애가 되었다.&nbsp;<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fcca055380ff44ab2fc37a96055a6c642ce33e94.jpg" class="fr-fic fr-dib">Парсуна с изображением Бориса Годунова кон. XVII в.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А. С. Пушкина &laquo;Михайловское&raquo;고두노프는 반대 세력을 지배하에 두었지만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그의 일족이 멸족이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600년대 말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재상 레프 사피에하(Lew Sapieha) 및 폴란드의 대귀족 스타니스와프 바르시츠키(Stanisław Warszycki)가 이끄는 외교사절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한 전체 슬라브 족 간의 동맹인 동군연합(Personal union)을 제안했다.&nbsp;<br>만약 세 나라의 군주 중 한 명이 후사 없이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다른 쪽 나라 군주가 양국의 왕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차르인 고두노프는 동맹 안을 거부하고, 1500년의 리투아니아 전쟁을 끝낸 얀 자폴스키의 휴전(Treaty of Jan Zapolski)을 1622년까지 연장하면서 불안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선택했다.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 및 연방의 마그나트(Magnat)로 알려진 폴란드 왕가의 대 귀족들은 자국 군이 소규모이고, 국고는 독일기사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금액을 동원했기 때문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nbsp;<br>더구나 전쟁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 루스에 대해 본격적인 침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스 지역의 정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지그문트 및 마그나트들 등의 일부 귀족들, 특히 러시아 국경부근에 영토 및 병사를 가지고 있던 마그나트들은 차르 계승 문제에 대한 키예프 내부에서 분열에 대한 혼란에서 어떠한 이익을 얻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내전 상태에 놓여있던 모스크바를 위시한 슬라브의 보야르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위의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nbsp;<br>스스로 차르가 되기 위해 지원을 얻으려는 귀족도 있었지만 서쪽의 폴란드 귀족들과 당시 리투아니아 제국 의회에서 선거로 왕정이 성립되어 민회가 이를 견제하는 등의 상호 견제 장치가 있었다는 것에 매료되어 폴란드 정치가들의 힘을 빌려 폴란드와 연방과 동맹을 맺는 것을 생각한 귀족들도 존재하고 있었다.&nbsp;<br>거기에 북쪽의 스웨덴과 깊은 교류를 가지면서 상당한 부(富)를 취득한 귀족도 있었으나, 여러 종합적인 상황들로 인해 야코브 드 라 가르디(Jacob De la Gardie)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 마침내 슬라브 족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 루스 연합을 침공하게 되었고 스웨덴, 폴란드 연합군과 러시아 간의 전쟁인 대북방 전쟁(Северная война)을 초래하게 되었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22:45:42 +0900</pubDate>
		</item>
		<item>
			<title>러시아 내 한국 기업들,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7</link>
			<description><![CDATA[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이고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가는 자들이 한국은행이나 윤석열 정부 인사들과 같은 자들이다.&nbsp;<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2853755fb93bd3241a0feb85cce13d5d5bf2aea1.jpg" class="fr-fic fr-dib">Компании из Кореи готовятся возвращаться в Россию, 출처 : Коллаж 24 Канал외교나 경제 교류, 무역은 철저한 실리와 실익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학자로써 갖는 원칙과 소신이다. 경제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철저한 실리와 실익을 위해 러시아와 단절하는게 옳은 일인가를 묻고 싶다. 러시아와 단절하면 러시아 만큼의 교역과 이득을 취할 시장을 어디로 확보할 것인지 대안은 있는가?<br>국가 간의 투자나 경제적인 가치, 교류의 활성화 등으로 완전한 정착 및 안정성을 평가하는데 예를 들어 우리 대한민국은 베트남 하나 확보하는데 10년 넘게 걸렸고 러시아를 확보하는데 20년이 걸렸다. 국가 간의 투자나 경제적인 가치, 교류의 활성화 등 정착과 안정화에 이르기까지는 적어도 평균 15년은 걸린다.&nbsp;<br>아무 나라나 가서 MOU 맺고 공장이나 시설 하나 만들면 그걸로 정착과 안정성을 논할 수 있는가? 러시아와는 20년 걸린 세월로 세계 최대 영토와 더불어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가능성 있는 나라 투자에 성공했다. 지금 삼성은 러시아에서 제품의 품질, 서비스, 매출 등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이나 LG가 시장성이 풍부한 어느 나라에서 압도적인 지표로 1위 찍는 것 본적 있는가?&nbsp;<br>정부가 러시아와 단교하자는 것 아니면 이럴 수가 없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자동차 공장이나 칼루가의 삼성전자 공장이 계속 문닫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어쩌고 보면 정부가 러시아에 복귀하려는 기업들을 계속 압박하는 것이기 때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22:40: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일본이 김좌진, 홍범도 장군보다 더 무서워한 장군, &quot;시베리아의 호랑이&quot; 김경천 장군</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6</link>
			<description><![CDATA[김경천 장군은 일본의 기마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 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middot;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1919년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김경천은 일본 육사 3년 후배 이청천과 함께 만주 삼원포에 위치해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갔다.<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8e4499ac9b167788fd216f328a7769f7240b80c3.jpg" class="fr-fic fr-dib">일제시대 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1888~1942)과 그의 부인 유정화 여사,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일본 육사출신 김경천, 이청천이 그 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들어가자 3.1운동 이후 독립군이 되려던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삼원포로 갔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의 온갖 수단을 강구한 김경천 매장 공작과 중국인과의 외부적 문제, 한국인끼리의 내부적 문제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하던 중 그는 신흥무관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br>이후 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단장 김규면(金圭冕, 1880-1969)에 이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수청(水淸)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nbsp;<br>공민(公民) 나경석(羅景錫, 1890&sim;1959)이 1922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와 6회에 당시 그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nbsp;<br>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그를 인터뷰한 기사를 싣고 끝에 그가 지은 시 "시비리야벌!"을 소개했다.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정책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체포 원인으로는 2가지 추측이 있다.&nbsp;<br>첫째, 연해주 한인 지도자는 이르쿠르츠파, 상해파 둘로 나뉘었는데 당시 상해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과정 중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을 수 있다. 김경천은 파당을 좋아하지 않아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다.<br>둘째,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br>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된다. 김경천은 이 당시 2년 반을 복역한다.1939년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독일인 농장 잡부로 일했으나 4월 5일 재차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6월 25일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언도 받았고,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다고 하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22:28: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제2괘 중지곤 重地坤 </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bcb24c7f104ddb54043aacf9238507895468080d.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191px;">순음유순(純陰柔順)의 도(道)☷ 상괘 : 땅 (坤地)☷ 하괘 : 땅 (坤地)<br>"땅의 형세는 유순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br>1. 卦象의 서사끝없는 수용과 헌신, 스스로를 낮춰 만물을 길러내는 대지의 어머니하늘(乾)이 만물을 창조하는 거대한 시작의 불꽃이라면, 땅(坤)은 그 불꽃을 품어 안아 실질적인 생명으로 길러내는 무한한 포용의 자궁이다. 중지곤(重地坤)은 위아래가 모두 순수한 음(陰)으로 이루어진 괘로, 지극히 부드럽고 유순하며 정적인 대지의 속성을 온전히 대변한다.대지는 스스로를 드러내어 주장하지 않는다. 하늘의 명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밟히고 파헤쳐지면서도 아무런 원망 없이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군말 없이 짊어진다. 그러나 이 유순함은 결코 유약함이 아니다. 만물을 탄생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가장 거대하고 두터운 수용의 에너지다. 중지곤의 서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교훈은 명징하다."스스로를 낮추고 비워내어 세상을 품으라. 먼저 나서지 않고 순리를 따를 때, 비로소 만물을 싣는 위대한 덕(厚德載物)이 완성된다.”<br>2. 주역 본문과 해석<br>•&nbsp;卦辭 (괘사)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 後得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 吉&nbsp;(암컷 빈牝, 바 유攸, 곳 유攸, 갈 왕往, 아득할 미迷, 잃을 상喪)&nbsp;• 곤 원형이 빈마지정 군자 유유왕 선미 후득주리 서남득붕 동북상붕 안정 길[해석]: 곤은 元하고 亨하고 利하고 암말의 貞함이니 군자가 갈 바를 두느니라. 앞서면 미혹되고 뒤따르면 얻으리니 이로움을 주장하니라. 서남쪽은 벗을 얻고 동북쪽은 벗을 잃으니, 편안하게 바름을 지키면 길하다.<br>• 彖傳 (단전)彖曰 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坤厚載物 德合無疆 含弘光大 品物咸亨 牝馬地類 行地無疆 柔順利貞 君子攸行 先迷失道 後順得常 西南得朋 乃與類行 東北喪朋 乃終有慶 安貞之吉 應地無疆&nbsp;(바탕 자資 비롯할 자資, 이에 내乃, 실을 재載, 지경 강疆, 머금을 함含, 클 홍弘)• 단왈 지재곤원 만물자생 내순승천 곤후재물 덕합무강 함홍광대 품물함형 빈마지류 행지무강 유순이정 군자유행 선미실도 후순득상 서남득붕 내여유행 동북상붕 내종유경 안정지길 응지무강[해석]: 단에 가로되 지극하도다, 곤의 원천이여! 만물이 바탕하여 생겨나니 이에 순종하여 하늘을 받든다. 땅은 두터워 만물을 싣고 그 덕이 무강한데 합하며, 머금음이 넓고 빛나며 커서 온갖 사물이 다 형통하다. 암말은 땅의 무리이니 땅을 걸어 다님에 끝이 없다. 부드럽고 유순하여 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로우니 군자가 행할 바이다. 앞서면 미혹되어 길을 잃고 뒤따르면 순종하여 떳떳함을 얻는다. 서남쪽에서 벗을 얻음은 이에 무리와 함께 행하는 것이요, 동북쪽에서 벗을 잃음은 이에 끝내 경사가 있음이다. 편안히 바름을 지켜 길함은 끝없는 땅에 응하기 때문이다.<br>•&nbsp;大象傳 (대상전)象曰 地勢坤 君子以 厚德載物&nbsp;(형세 세勢, 두터울 후厚)&nbsp;• 상왈 지세곤 군자이 후덕재물• 해석: 땅의 형세가 곤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br>3. 6효의 효사와 해석<br>• 初六：履霜, 堅冰至&nbsp; (밟을 리履, 서리 상霜, 굳을 견堅)• 초육 리상 견빙지• 초육은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르느니라• 해석: 변화의 징후를 알아채는 시기이다. 지금 발밑에 밟히는 가벼운 서리는 머지않아 온 세상을 얼려버릴 거대한 겨울(얼음)이 올 것임을 예고한다. 작은 조짐을 보고 다가올 미래의 거대한 흐름과 위기를 미연에 대비하는 통찰의 지혜를 뜻한다.<br>• 六二：直方大, 不習无不利&nbsp; (익힐 습習)• 육이 직방대 불습무불리• 곧고 모나고 대단하니,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해석: 땅의 본성이 가장 온전하게 발현된 상태이다. 억지로 꾸미거나(習) 인위적인 노력을 더하지 않아도, 마음의 중심이 곧고(直) 처신이 내외로 반듯하며(方) 도량이 넓으면(大) 세상사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 순수한 본연의 덕이 지닌 위대한 힘을 말한다.• 유순중정柔順中正한 곤은 六二가 主爻가 되니 그 덕이 곧고 방정하므로 크게 되어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음이 처음 생겨나오는 때이니 아직은 음기가 미약하나, 점차 자라 마침내 극성하기 마련이므로 "서리를 밟아 굳은 얼음"이 되는 것이다.<br>• 六三：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nbsp;&nbsp; (머금을 함含, 빛날 장章)&nbsp;•&nbsp;육삼 함장가정 혹종왕사 무성유종• 아름다움을 머금어 가히 바름을 지키니, 혹 왕의 일에 종사하여 이룸은 없으나 끝마침은 있다.&nbsp;• 해석: 자신의 재능과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감추는 지혜(含章)가 필요한 시기이다. 2인자 혹은 참모의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하되, 모든 공로와 영광은 리더에게 돌린다. 비록 내 이름으로 이룬 가시적인 성과는 없을지라도, 일을 온전히 끝맺음으로써 실질적인 결실과 안전을 보장받는다.&nbsp;• 六三은 하괘의 가장 위에 있고 陰이 陽의 자리에 있어 양의 빛남(章)을 머금고 있는 상태이니, 마땅히 바름을 지켜야 한다. 신하인 음으로서 임금인 양의 일을 쫓으면(或從王事), 이룸의 공은 인군에게 돌아가나 결실의 이로움은 신하가 거두게 된다(无成有終)&nbsp;<br>• 六四：括囊, 无咎无譽&nbsp;(맬 괄括, 주머니 낭囊, 기릴譽 )• 육사 괄낭 무구무예• 주머니 끈을 매듯이 하면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 해석: 극도의 조심성과 침묵이 요구되는 격변기이다. 말과 행동을 철저히 삼가고 주머니 주둥이를 꽉 묶듯 자신을 숨겨야 한다. 칭찬과 명예(譽)를 얻으려 욕심내다가는 도리어 큰 화를 입을 수 있으니, 그저 아무런 허물(咎) 없이 자신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처세가 된다.• 六四는 음으로 음의 자리에 있으나 하괘에서 상괘로 넘어가는 어수선한 때이므로 말 삼가기를 주머니 입구를 잡아매듯 하면 허물이 없고, 행동을 안하니 명예로울 것도 없는 것이다.<br>• 六五：黃裳, 元吉&nbsp; (누를 황黃, 치마 상裳 )• 육오 황상 원길• 노란 치마를 입으면 크게 길하다.• 해석:&nbsp;존귀한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전히 유순한 하체의 덕을 유지하는 유중(柔中)의 미학이다. 황색(黃)은 오행 중 중심인 땅의 색이며, 치마(裳)는 아래에 입는 옷이다. 가장 높은 권력의 자리에서도 스스로를 낮추고 중용의 덕을 실천하니, 천하가 자발적으로 승복하는 최고의 길함(元吉)을 맞이한다.• 六五는 그 位가 비록 人君의 자리이나 坤의 도는 신하로서의 직분을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신하의 본분을 지키면 크게 길한 것이다.<br>• 上六：龍戰于野, 其血玄黃&nbsp; (들 야野)• 상육 용전우야 기혈현황• 용이 들판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노랗다.• 해석: 음(陰)의 세력이 극에 달해 결국 양(陽)의 영역을 침범하고 정면 충돌하는 파국이다. 신하가 왕의 자리를 탐하고, 조력자가 지배자가 되려 할 때 일어나는 비극적인 싸움이다. 하늘의 피(玄)와 땅의 피(黃)가 뒤섞여 들판을 물들이듯, 분수를 잊고 먼저 나서서 주도권을 쥐려 한 오만의 대가는 참혹한 상처뿐임을 경고한다.• 上六은 中을 잃은 데다 음이 극성한 상태이니 양과 맞서서 싸우는 격이며, 그 싸움으로 양은 검고 음은 누런 피를 흘린다(其血玄黃) 坤陰이 極盛에 다다라 乾의 亢龍과 같은 모양이 된다. 두 개의 항룡은 용납되지 않으므로 두 용은 전투가 발생하는데, 밖의 건괘에 상대하기 때문에 용전우야(龍戰于野)라 한 것이다. 野는 밖을 의미한다.<br>4. 역사적 득괘 사례한고조 유방을 황제로 만든 참모, 장량(張良)의 함장(含章) 서사“此卦漢高祖與項王交鋒卜得之乃知身覇天下”중국 초한지 시절, 항우라는 불세출의 거대한 양(陽)의 기운에 맞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동력은 바로 지독할 정도로 두터운 '곤(坤)의 서사'를 실천한 책사 장량(張良) 덕분이었다.장량은 탁월한 지략으로 유방을 위기에서 구하고 한나라의 기틀을 닦았지만, 결코 자신의 공을 앞세워 군주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았다.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함락한 후 화려한 궁궐과 보물에 미혹되었을 때, 장량은 유방의 가벼운 서리(初六) 같은 처신이 불러올 항우의 분노(堅冰)를 경고하며 한걸음 물러서게 했다. 또한 천하가 통일된 후 유방이 개국공신들을 토사구팽하며 숙청하는 서슬 퍼런 칼바람 속에서, 장량은 스스로 "세 명의 제후국을 봉해주겠다"는 유방의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하고, 주머니 끈을 묶듯(六四 括囊)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돌아갔다.자신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철저히 머금고(六三 含章), 공을 이루되 내세우지 않았으며(无成有終), 언제나 뒤에서 군주를 빛내주는 암말의 도(牝馬之貞)를 걸었던 장량. 한나라의 다른 공신들이 권력의 야망을 품다 상육(上六)의 용전우야(龍戰于野)처럼 비참하게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갈 때, 장량만이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며 역사의 가장 아름다운 참모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중지곤 괘가 가진 '비움과 따름의 대지적 지혜'를 완벽하게 증명한 실증적 사례다.<br>5. 실천적 교훈 (占辭 비결)• 先迷後得 柔順爲期 牝馬之貞 靜以待時&nbsp; /&nbsp;厚德載物 不爭而勝 廣納萬川 終見其成&nbsp;• 앞서 나가면 길을 잃고 뒤따라가면 주인을 얻으리니, 부드러움과 유순함을 기약하라. 암말의 곧은 덕성으로 고요히 때를 기다릴지어다.&nbsp;•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실어 나르니, 다투지 않고도 이기게 된다. 만 가지 시냇물을 넓게 받아들이면 마침내 위대한 이룸을 보게 되리라.• 리더십의 전환: 지금은 당신이 전면에 나서서 대오를 이끌 때가 아니다. 훌륭한 조력자, 서포터, 2인자의 포지션을 취할 때 오히려 당신의 가치가 극대화 된다.• 속도보다는 숙성: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先迷). 눈앞의 성과가 더디게 보일지라도 대지가 봄을 기다리며 씨앗을 품듯, 묵묵히 기초를 다지고 수용하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포용과 상생: 주변의 반발이나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맞서 싸우지 마라. 대지가 오물마저 흡수하여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듯, 넓은 도량으로 상대를 품어 안을 때 상황은 자연스럽게 아군으로 돌아선다<br>6.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모두가 '나'를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외치는 '무한 자기PR'의 시대이다. 소셜 미디어는 온통 자신이 얼마나 잘나고, 빠르고, 강한 양(陽)의 존재인지를 과시하는 불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잉된 양의 에너지는 쉽게 피로를 부르고, 타인과의 날카로운 충돌을 낳으며,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번아웃을 유발한다.이 지친 현대인들의 삶에 중지곤 괘는 '적극적 수용성'과 '내면의 두터움'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처세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주역이 말하는 유순함은 결코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약자의 굴복이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온전히 경청할 수 있는 그릇의 크기이며, 실패와 고난을 내면의 자양분으로 흡수해 내는 회복탄력성의 극치다.지금 하는 일이 정체되어 답답하거나, 조직 내에서 조명을 받지 못해 소외감이 드는가? 억지로 흐름을 바꾸려 칼을 휘두르지 마라. 지금은 대지가 되어 에너지를 머금을 때다. 주변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실력을 쌓으며 타인을 돕다 보면, 세상은 마침내 당신이 가진 그 두터운 덕(厚德) 위에 자신의 모든 귀한 것을 싣기 위해(載物) 당신을 찾아오게 될 것이다. 거대한 흐름을 뒤따르는 자가 결국 가장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법이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4:17:51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26.7.5 《연구라는 학문의 방향에 대하여》</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5</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eb640934046e98e6e7fc6b391e1d850842cdb5ac.jpg" class="fr-fic fr-dib">●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br>&nbsp; 《연구라는 학문의 방향에 대하여》&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조율여백 이수진저는 연구란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거나 기존의 사실을 정리하는 작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br>오히려 연구란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결핍과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br>인간과 사회, 문명은 모두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연구는 완전함을 선언하는 일이 아니라, 결핍을 인정한 상태에서 보다 합당한 방향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성찰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1. 최대한의 객관화를 위한 개방적 사료화연구의 첫 번째 조건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자료를 개방적으로 축적하고 검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주장도 비판과 검증에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양한 관점과 자료를 공개적으로 비교하고 검토할 수 있을 때 연구는 점차 정합성을 높여 갈 수 있습니다.완전한 객관성에 도달하기는 어렵더라도, 객관성을 향해 끊임없이 접근하려는 태도 자체가 연구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br>2. 결핍은 왜곡을 낳지만, 왜곡의 방향은 서로 다릅니다불완전한 존재는 다양한 형태의 결핍을 지니며 살아갑니다.이러한 결핍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왜곡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모든 왜곡이 동일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한편에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부족함을 감내하며 공동체를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긍정적 방향으로의 왜곡, 즉 감내와 절제, 소명 의식으로 이해합니다.반대로 결핍이 탐욕과 소유, 약탈, 쾌락의 추구, 거짓과 기만, 맹신과 사이비화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공동체와 존재의 질서를 해치는 방향으로 왜곡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연구는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고, 각각의 결과가 사회와 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br>3. 합당함은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갑니다저는 &#39;합당함&#39;이란 고정된 절대 기준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조정되고 검증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한 합당함은 순환과 피드백을 통해 스스로를 점검하며,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갑니다.반대로 검증과 성찰을 거부하는 구조는 점차 단절과 경직성을 보이며, 결국 체계성을 잃어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따라서 연구는 단순히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수정하고 개선할 수 있는 구조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4.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제가 생각하는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연구는 궁극적으로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이로운 방향을 찾고, 공동체와 존재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고귀한 의지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지식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 자연, 그리고 미래를 향한 책임과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그렇기에 연구는 경쟁이나 권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과 검증을 통해 보다 널리 이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br>]]></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3:18: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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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5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3</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d092d255ef6f2919023edfededde581a3348f223.jpg" class="fr-fic fr-dib">●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 되었습니다.<br>《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조율여백 이수진<br>&nbsp;"왕이 법이 아니라, 법이 왕이다."이 문장을 접하며 오랫동안 품어 온 생각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br>인류를 하나의 집단으로 단순화하여 바라보기에는, 인간이 각자 지키려는 대상과 방향은 너무나도 다릅니다.<br>겉으로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유기적 구조를 지니고 살아가지만, 그 내면에는 서로 다른 가치와 목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지 충분히 드러내거나 성찰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br>그 결과 과도한 탐욕과 쾌락, 유린과 소유, 그리고 영원한 지배를 추구하는 욕망이 반복됩니다. 순환과 책임을 잃은 채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망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으며, 그러한 반복이 오늘날 인류사의 한 단면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br>조금만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면, 인간이 당연하게 여겨 온 많은 욕망이 자연의 질서에서는 오히려 과도한 부당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br>자연은 순환하며 공존하지만, 인간은 종종 소유와 지배를 영속시키려 합니다. 또한 자신의 관점을 절대화하면서 개방과 성찰을 거부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개선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갈등과 대립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br>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인간이 끝까지 지키려 하는 것은 때로는 자연과 세상으로부터 얻은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약탈과 유린이라는 부당한 권리일 수도 있습니다.<br>또한 객관화와 개방, 구조화와 의미화 없이 스스로를 절대화하려는 과시적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더 나아가 입출력의 균형과 관리, 그리고 순환이라는 질서를 외면한 채 끝없는 소유와 영속만을 추구하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br>저는 이러한 흐름을 보며,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합당한 원리와 질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br>그래서 저는 인간 사회를 넘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존재의 흐름을 함께 살펴보며 합당한 순환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br>제가 말하는 법은 단순한 제도나 규칙이 아닙니다.감사와 사랑, 반면교사를 통한 분노, 교감에서 비롯되는 슬픔,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미소, 역사와 연구, 그리고 감내와 같은 가치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중심 원리를 이루는 삶의 알고리즘에 가깝습니다.<br>저는 이러한 가치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어떻게 존재와 문명을 보다 합당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구조화하고 성찰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br>그 방향은 개인에 머물지 않습니다.집단을 넘어, 국가를 넘어, 인종을 넘어, 자연을 넘어, 더 나아가 존재 전체를 향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결국 제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나 권력이 아닙니다.<br>합당함이 기준이 되고, 합당함이 법이 되며, 그 어떤 권력보다도 합당함이 가장 높은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방향성입니다.<br>저는 언젠가 인간이 사람을 중심에 두기보다 합당한 질서를 중심에 두는 문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며, 그 가능성을 작은 기록과 성찰을 통해 이어가고자 합니다.<br>김석환선생님의 화답제가 비관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합당함이 기준이 되는 세상은 인간이라는 종이 절멸하는 시점부터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마치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의 어느 세상처럼.<br>아니면 공룡이 먹을 것이 부족해 절멸하고(기후변화가 됐든 어쨌든 최후의 결과는 그랬을 것이라는 저의 추론.)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이 나타났듯이 인간종이 멸종되면 또 새로운 종이 지구의 지배자가 되거나 달이나 화성같이 생명이 살 수 없는 별이 되거나.ㅎㅎ김석환 선생님께<br>선생님의 말씀은 충분히 가능한 하나의 비관적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br>다만 저는 조금 다른 관점도 함께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br>어떤 종이든, 어떤 존재든 지금 이 순간의 기회를 누리기까지는 수많은 존재들의 가여운 감내와 희생의 역사가 축적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nbsp;<br>저는 이러한 역사에 대해 단순한 감사의 감정을 넘어,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소중한 유산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br>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이든 자연이든 문명이든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가치들은 일관되게 조화와 공존, 그리고 상황에 맞는 합당한 범위의 조율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br>설령 인류가 언젠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형태의 존재가 등장하여 새로운 문명을 이루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nbsp;<br>그러나 그 새로운 존재 또한 부당한 소유와 지배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br>제가 보기에 그러한 존재들이 공통적으로 보일 특징은 개방성, 객관성, 구조화, 의미화가 부족하거나 미흡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수정하는 능력이 부족할수록 왜곡은 반복되고, 부당함 또한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br>그럼에도 저는 존재의 상위 질서에는 하나의 일관된 원리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br>그 원리는 완전한 심판이나 단절보다는, 불완전한 존재에게도 다시 기회를 허용하는 방향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nbsp;<br>물론 그 기회가 무한한 면죄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화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존재는 다시 조화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br>그래서 저는 비관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놓기보다는, 그러한 기회를 합당하게 이어 갈 수 있는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2:50:42 +0900</pubDate>
		</item>
		<item>
			<title>「백 년에 걸친 미완의 혁명: 화이트헤드 형이상학과 정기(精氣) 우주론을 통합하는 Vital Process Realism을 향하여」</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2</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6ccbf984957bfd95645039ce17c4f36b8d10b104.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383px;">&nbsp;&nbsp;그림 출처:제 14차 국제 화이트헤드 컨퍼런스<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d5ec8777be2a278d71bc17066104be1d125cc50e.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217px;">1.&nbsp;서론:&nbsp;미완의&nbsp;혁명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한 근본적 대안으로 유기체 철학을 내놓은 지 한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근본 물음은 여전히 남아있다. 과정철학은 데카르트와 뉴턴이래 서구 사유를 지배해온 저 불활성의, 이분화된 자연상(自然像)을 참으로 대체하는데 성공했는가?본 논문은 그렇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양자역학과의 주목할만한 공명과 관계존재론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적 과정사유는 그약속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했다 &mdash; 그 주된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논리주의와 은폐된 실체주의(crypto-substantialism)의 잔재를 지닌 서구적 개념 어법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이 미완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본 논문은 &ldquo;Vital Process Realism(생명 과정실재론)&rdquo;이라 명명한 문화 횡단적 형이상학적 종합을 제안한다.[1]이는 세 지적 전통 &mdash;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과학철학의 존재론적 구조실재론(OSR), 그리고 동아시아 정기실재론(精氣實在論) &mdash; 을 삼각 측량하는 종합이다. 본 제안이 딛고 서 있는 살아있는 계보를 확인한 뒤, 논증은 세 악장으로 진행된다: 화이트헤드에 대한 한 세기 영어권 수용사의 비판적 추적, 그 존재론적 보완으로서 정기실재론의 도입, 그리고 이 동서 종합이 구조적 엄밀성을 해체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심화함을 입증하는 것이 그것이다.2.&nbsp;화이트헤드에서&nbsp;Cobb으로:&nbsp;과정사상의&nbsp;살아있는&nbsp;지평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의 백년 궤적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과정연구센터(CPS) &mdash; 바로 본 학술대회를 주관하는 그기관 &mdash; 의 설립자 John B. Cobb Jr. (1925-2024) 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책임있게 진행될 수 없다.[2]60년이 넘도록&nbsp; Cobb은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을 사변적 우주론에서 살아있는 공적담론으로 확장하는데헌신해 왔다: 과정신학에서, 생태문명에서, &ldquo;지구가중요시되는&rdquo; 경제학에서, 그리고 우리의 당면 관심사에 가장 결정적으로는, 중국-서구 대화의 끈기있는 경작에서.과정-관계적 사유가 추상적 사변에서 내려와 우리 시대의 절박한 문명적 물음들 &mdash; 기후, 식량, 정치제도, 그리고 문명의 의미 &mdash; 에 응답해야 한다는&nbsp; Cobb의 신념은, 본 논문과 같은 시도가 제출될 수 있는 바로그 지평을 규정한다. 아래에서 개진되는 Vital Process Realism은 이점에서 Cobb 프로젝트의 직접적 연속이며, 다만 이제 서구신학의 측면이 아니라 동아시아 정기우주론의 측면에서 수행되는 것이다.3.&nbsp;제2차&nbsp;계몽:&nbsp;화이트헤드의&nbsp;중국적&nbsp;응답본 주하이 모임에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는 화이트헤드의 중국 수용은, 王治河(Zhihe Wang)와 樊美筠(Meijun Fan)의 평생에 걸친 노고에 그 가능성 자체를 빚지고 있다. 30년동안 &mdash; 수십권의 번역, 中國後現代發展硏究院(Institute for Postmodern Development of China)의 설립, &ldquo;제2차 계몽(第二次啓蒙)&rdquo; 담론의 끈기있는구축, 그리고 중국 본토대학들에&nbsp; 30개가 넘는 과정사상 연구센터의 육성을 통해 &mdash; 王治河와樊美筠은 Hartshorne과 Cobb이 영어로 화이트헤드를 위해 했던 일을 중국어로 해냈다.[3]그들의 제2차 계몽은 구호가 아니라 프로그램적 재정초이다: 제1차(유럽) 계몽이 자율적&middot;계산적 개인과불활성의 이분화된 자연을 보편화했다면, 제2차 계몽은 &mdash; 화이트헤드와 중국전통의 生生(생생, 생성적됨)에 똑같이 의지하여 &mdash; 유기적인 것, 관계적인 것, 생태적인 것을 실재자체의 구성요소로 회복한다. 王治河&middot;樊美筠의 제2차 계몽이 화이트헤드의 중국적 응답이라면, 본 논문이 개진하는 Vital Process Realism은 의도된 상보성(相補性) 안에서 화이트헤드의 한국적 응답이다 &mdash; 그리고 양자는 동아시아 기(氣) 우주론이라는 공통기반위에 서있다.4.&nbsp;세&nbsp;악장의&nbsp;논증제1악장:&nbsp;영어권&nbsp;수용사&nbsp;&mdash; Leclerc, Lango, Code첫째, 본 논문은 세 명의 탁월한 과정형이상학자 &mdash; Ivor Leclerc (1915-1999), John Lango, Murray Code &mdash; 의 작업을 통해 화이트헤드 철학 백년 수용사를 추적한다. 이들의 연속적 기여는 유기체철학을 체계화하고, 형식화하고, 화이트헤드 자신이 잠정적으로만 지도를 그려둔 영역들로 확장하였다.Leclerc의 신 아리스토텔레스적 재구성은 화이트헤드의 현실적존재(actual entity)를 &ldquo;힘의 능동적 중심&rdquo; (energeia)으로 복권시켰다. 그는 화이트헤드적 실체를 불활성의 기체(基體)가 아니라 자기현실화의 역동적 행위자로 재해석했으며, 그의 &ldquo;복합 현실태(compound actuality)&rdquo; 개념은 거시적 전체가 그 자체의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님을 긍정함으로써 엄격한 미시적원자론의 환원주의적 난국을 해소하였다 &mdash; 그리하여 행위하는 존재(acting entity)를 과정 형이상학의 기초단위로 체계화하였다.[4]Lango는 이 기획을 논리적 형식화를 통해 전진시켰다. 그는 관계의 논리를 동원하여 결합체 (nexus)를 현실적 계기들의 단순한 집적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구조를 지닌 그 자체의 존재자로 정립하였다. 이 조치는 화이트헤드의 미시적 현실적 계기존재론과 일상경험의 거시적 사회들 사이의 설명적 간극을 잇는 다리를 놓았으며, 유명론적 해체와 관념론적 추상 양쪽에 맞설 수 있는 견고한 실재론적 존재론을 정초하였다.[5]Code는 선행자들의 유기체 형이상학을 이론생물학의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그는 새로움 (novelty) 의 생성이 생명의 역학자체에 내재하며, 살아있는 유기체가 기계론적 환원을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 현실성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연속적인 창조적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논증하였다 &mdash; 이 입장은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의 생기론적 추동력을 입증하는 동시에, 서구 과정담론의 지속적 한계를 노출시켰다: 기계론과 신비주의 어느쪽으로도 추락하지 않으면서 생물학적 개체화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제공하는 일의 어려움이 그것이다.[6]제2악장:&nbsp;정기실재론&nbsp;&mdash;&nbsp;네&nbsp;존재론적&nbsp;층위둘째, 본 논문은 정기실재론(精氣實在論)을 화이트헤드 전통에 대한 견고한 존재론적 보완으로 도입한다 &mdash; 그것은 서구 과정사유를 바깥에서 주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과정철학이 줄곧 결여해온 우주론적 생성기반을 공급한다. 논증은 네 존재론적 층위에 걸쳐 전개된다.제1층위는 정기(精氣) &mdash; 원초적 생성장(場)이다. 그것은 원(原)-에너지적 구조 퍼텐셜로 기능하며,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영원한 객체들의 저장고와 원초적 에너지장의 결합에 상응한다.제2층위는 운기(運氣) &mdash; 이 장이 극성&middot;리듬&middot;순환적 변환을 통해 과정적으로 분화되는 것이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합생(concrescence)과 이행(transition), 그리고 기가 취산(聚散) &mdash; 모임과흩어짐 &mdash; 을 겪는다는 신유학적 동역학(dynamics)과 엄밀한 형이상학적 등가물을 이룬다.제3층위는 생명특이점(生命特異點)이다. 이는 자기 유지적 생체 에너지 조직이 기-구조위계들 &mdash; 전기화학적 구배, 대사흐름, 형태발생장 &mdash; 로부터 창발하는 문턱을 표시한다. 여기서 정기실재론은 전근대 신비주의가 아니라 현대 생물물리학 &mdash; Lane, England, Kauffman &mdash; 과 직접 정렬된다.제4층위는 심신특이점(心神特異點)이다. 이는 의식의 반성적&middot;지향적 구조를 고차(高次)의 기-패턴으로 식별한다. 그것은 내면성에 대한 비환원적&middot;비이원론적 설명 &mdash; 물리주의적 실재론도 관념론적 틀도공급하지 못했던 설명 &mdash; 을 제공한다.[7]두가지 개념적 조치가 논증 전체를 관통한다. 첫째, 기는 신비적 실체가 아니라 에너지-패턴-과정 삼항(triad)으로 재해석 된다 &mdash; 이는 존재론적 구조실재론과 구조적으로 공명하고, 화이트헤드와 과정적으로 연속하며, 현대 생명과학의 에너지 흐름 존재론과 생물학적으로 수렴한다. 둘째, 기기(氣機) &mdash; 생명 에너지의 자기조직 기제 &mdash; 개념은 물질적 행위성(material agency)에 대한 비의인적(非擬人的) 설명을 공급하며, 이는 Bennett의 &ldquo;생동하는물질(vibrant matter)&rdquo;과 현대 신유물론 담론에 직접 응답한다.[8]제3악장:&nbsp;구조적&nbsp;엄밀성의&nbsp;심화셋째, 본 논문은 이 동서종합이 구조적 엄밀성을 해체하기는 커녕 오히려 심화하며, OSR 홀로는 공급할수 없는 우주론적 정초를 제공함을 입증한다. 과정철학 한 세기가 지배적 유물론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기에 충분했는가를 물음으로써, 그리고 결여된 자원이 정기 전통의 살아있는 생명성에 있다고 답함으로써, 본 논문은 생태위기와 문명사적 결산의 시대에 강단철학과 더 넓은 공적 담론 양쪽에 설득력있게 말을 건넬 수 있는 Vital Process Realism을 개진한다.5.&nbsp;중국이라는&nbsp;줄기:&nbsp;張載&middot;王夫之와&nbsp;기&nbsp;존재론본 논문이 제안하는 Vital Process Realism은 사변적 발명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이 거의 천 년 동안 경작해 온 연속적인 철학적 계보 안에 서있다. 특히 두 사상가가 중국 기철학의 교의적 척추를 이루며, 모든 현대 정기실재론의 직접적인 형이상학적 선조로 인정되어야 한다: 장재(張載, 1020&ndash;1077)와 왕부지(王夫之, 1619&ndash;1692)가 그들이다. 여섯 세기를 사이에 두고 이 두사람은 현대의 과정적-에너지적 기존재론이 안전하게 정초될 수있는 두 결정적 명제를 정식화한다 &mdash; 장재는 기와 태허(太虛) 자체의 우주론적 동일성을 확립하고, 왕부지는 이 통찰을 영속적 자기갱신의 철저한 비실체주의 존재론으로 급진화한다.장재의 『정몽(正蒙)』은 태허가 곧 기라는(太虛卽氣) 기초명제를 확립한다: 허공으로 보이는 것은 실은 기의 가장 희박한 응축이며, 구체적 사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의 일시적 응집이다. 우주는 그리하여 모임과 흩어짐(聚散)의 단일한 역동적 연속체이다 &mdash; 이는 정확히 화이트헤드의 &ldquo;합생과 이행&rdquo;이 칠백년 뒤 다른 어법으로 회복하는 존재론적 리듬이니, 화이트헤드가 획득된 현실태 (attained actuality)로부터 획득중의 현실태(actuality in attainment)로의 이행이라 기술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음양대대(對待)의 양극성이기 때문이다. 장재는 이로써 앞서 도입된 정기(精氣) &rarr; 운기(運氣) 이행의 원초적 우주론적 문법을 공급한다.[9]왕부지는 『장자 정몽주(張子正蒙注)』와 『독통감론(讀通鑑論)』에서, 기를 더 근본적인 무(無)나 리(理)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취급하는 불교-도가적 잔재 경향에 맞서 이 통찰을 급진화하였다. 리는 기안에 있으며(理在氣中), 우주는 기의 그치지 않는 일신(氣日新而不已)이라는 그의 교의는, 오늘날 우리가 비실체주의적&middot;과정적&middot;에너지-패턴존재론이라 부를 것의 가장 강력한 전근대적 정식이다. 왕부지는 이 의미에서본 논문이 에너지-패턴-과정 삼항으로 형식화하는 것의&nbsp; 17세기 선구자로 볼 수 있다.6.&nbsp;한국적&nbsp;심화:&nbsp;화담에서&nbsp;혜강까지의&nbsp;主氣&nbsp;계보두 중국 대가가 동아시아 기철학의 이론적 줄기를 제공한다면, 한국의 주기(主氣) 전통은 본 종합이 얹혀 있는 긴 가지를 공급한다. 한국의 계보는 중국사상의 주변부적 메아리로 치부될 수 없으니, 그것은 중국전통 자신이 끝까지 추구하지 않은 노선을 따라 핵심 기-명제의 4세기에 걸친 지속적 심화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네 인물이 단절없는 계승 속에서 이 계보를 규정한다.종합하면, 이 네 한국 대가는 중국 기-전통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안에서 4세기에 걸친 특정하고 환원불가능한 심화를 수행한다. 화담 서경덕(花潭, 1489-1546)은 태허자체를 &ldquo;담일청허지기 (湛一淸虛之氣)&rdquo;로 재정식화함으로써 태허지기(太虛之氣)의 한국적 수용을 정초하며, 그로써 기 이전의 또는 기 아래의 무엇을 상정하는 일체의 존재론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율곡 이이(栗谷, 1536-1584)는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와 이통기국(理通氣局)의 교의에서 보편적 패턴과 개별적 에너지의 동시적 실재성에 대한 가장 정밀한 전근대적 정식화를 공급한다 &mdash; Vital Process Realism이 이제 에너지-패턴-과정 삼항으로 재진술하는 바로 그 명제이다.녹문 임성주(鹿門, 1711-1788)는 성(性) 자체가 기의 한 양태라는(性卽氣) 급진적 주장으로 전통을 그 형이상학적 정점으로 끌어 올리며, 그로써 심신특이점이 별도의 형이상학적 영역이 아니라 고차의 기-패턴이라는 본 논문의 명제를 선취한다. 그리고 혜강 최한기(惠岡, 1803-1879)는 19세기 동아시아 사상가 가운데 유일무이하게 기존재론과 근대 서구 자연과학의 최초의 명시적 종합을 수행하여, 유럽 천문학&middot;역학과의 직접 대화속에서 기륜(氣輪) 우주론과 신기통(神氣通) 정신이론을 정식화하였다 &mdash; 그로써 본 논문이 개진하는 현대 에너지-흐름 생물물리학(Lane, England, Kauffman)과의 수렴지점을 이미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다.여기서 개진되는 Vital Process Realism은 따라서 저자의 개인적 발명이 아니라, 중국의 장재-왕부지 축과의 대화 속에서 화이트헤드와의&nbsp; 21세기적종합이 가능해지는 개념적 지반을 마련해 온&nbsp; 4세기에 걸친 한국 主氣계보의 현대적 상속이다.7.&nbsp;전초&nbsp;작업:&nbsp;정기실재론&nbsp;선언그러므로 분명히 천명하자. 본 논문은 동아시아 형이상학적 종합의 완성이 아니라 그 전초작업이다. 그 목표는 동아시아 기철학의 진정한 현대적 재해석 &mdash; 화이트헤드 과정형이상학에, 존재론적 구조실재론(Ontic Structural Realism)에, 신 유물론(New Materialism)에, 그리고 현대 생명과학의 에너지-흐름 존재론에 동시에 말을 건넬 수있는 재해석 &mdash; 이 이제 본격적으로 착수될 수있는 개념적 지형을 획정하는 것이었다.두 갈래의 특정한 탐구가 이미 진행 중이며 본 텍스트의 직접적 속편으로 출간될 것이다.첫째는 음양의 상관적 대대(對待) 논리가, 입증 가능한 텍스트적 사실로서, Richard Rorty (1931-2007)의 초기 화이트헤드 논문「Matter and Event」(1963)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mdash; 비록 Rorty 자신은 끝내 그것을 그런것으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mdash; 입증할 것이다. 둘째는 John W. Lango의 화이트헤드적 결합체(nexus)의 분석-논리적 형식화가, 정밀히 검토하면, 동아시아 사상이 오래도록 오행(五行)으로 성문화해온 바로 그 5중 관계구조를 산출함을 보일 것이다. 이 두 입증이 합쳐지면, 화이트헤드에 대한 가장 분석적으로 엄밀한 영어권 수용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채, 동아시아 기우주론의 음양오행논리에 이미 당도해 있었음이 확립될 것이다.그러나 이 어떠한 후속작업도 &mdash; Rorty 단행본도 Lango 단행본도, 장재&middot;왕부지에 대한 더 깊은 천착도, 화담에서 율곡과 녹문을 거쳐 혜강에 이르는 한국주기(主氣) 계보의 체계적 전개도 &mdash; 연구 프로그램 전체가 시작되는 형이상학적 결단과 분리되어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 모든 탐구는 단 하나의 출발점을 갖는다. 곧 기철학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정기실재론 선언(精氣實在論宣言) 이다: 실재는 그 근저에서 정기(精氣)가 자기조직화하는 에너지-패턴-과정이며, 어떠한 적합한&nbsp;21세기 우주론도 이것을 제1원리로 삼지않을 수 없다는 것.&nbsp;참고문헌Bennett, Jane.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Bogaard, Paul A., and Gordon Treash, eds. Metaphysics as Foundation: Essays in Honor of Ivor Leclerc.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2.Cobb, John B., Jr. Process Theology as Political Theology.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2.Code, Murray. Order and Organism: Steps to a Whiteheadian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the Natural Science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5.&mdash;&mdash;&mdash;. Process, Reality, and the Power of Symbols: Thinking with A.N. Whitehead.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7.Griffin, David Ray, John B. Cobb Jr., Marcus P. Ford, et al. Founders of Constructive Postmodern Philosophy: Peirce, James, Bergson, Whitehead, and Hartshorne.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3.Kim, Simon C. &ldquo;Jeong-Qi Realism: Why It Is Not a Fringe Theory but a New Alternative Paradigm.&rdquo; Unpublished manuscript, Han Eol Research Institute, 2025&ndash;2026.Lango, John W. Whitehead&rsquo;s Ontolog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72.Leclerc, Ivor. The Nature of Physical Existence.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72.&mdash;&mdash;&mdash;. The Philosophy of Nature.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86.Wang, Zhihe. Process and Pluralism: Chinese Thought on the Harmony of Diversity. Frankfurt: Ontos Verlag, 2012.Wang, Zhihe, and Meijun Fan. &ldquo;The Second Enlightenment: A Constructive Postmodernist Approach.&rdquo; Foundations of Science 17 (2012).Whitehead, Alfred North.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Corrected edition, edited by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W. Sherburne. New York: Free Press, 1978.王治河&middot;樊美筠. 『第二次啓蒙』. 北京: 北京大学出版社, 2011.<br>[1]여기서&nbsp;&ldquo;Vital&rdquo;은&nbsp;현대&nbsp;생물물리학(Lane, England, Kauffman)이&nbsp;기술하고&nbsp;아래에서&nbsp;생명특이점&nbsp;층위로&nbsp;형식화되는,&nbsp;살아있는&nbsp;실재의&nbsp;자기조직적&nbsp;생체에너지&nbsp;역학을&nbsp;가리킨다.&nbsp;이는&nbsp;19세기&nbsp;생기론(Driesch의&nbsp;entelechy)이나&nbsp;베르그송&nbsp;형이상학의&nbsp;&eacute;lan vital과&nbsp;혼동되어서는&nbsp;안&nbsp;되며,&nbsp;본&nbsp;논문은&nbsp;그&nbsp;어느&nbsp;쪽도&nbsp;원용하지&nbsp;않는다.[2]John B. Cobb Jr., Process Theology as Political Theology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2); David Ray Griffin, John B. Cobb Jr., Marcus P. Ford, et al., Founders of Constructive Postmodern Philosophy (Albany: SUNY Press, 1993).[3]Zhihe Wang, Process and Pluralism: Chinese Thought on the Harmony of Diversity (Frankfurt: Ontos Verlag, 2012); Zhihe Wang & Meijun Fan, &ldquo;The Second Enlightenment: A Constructive Postmodernist Approach,&rdquo; Foundations of Science 17 (2012);&nbsp;王治河&middot;樊美筠,&nbsp;『第二次啓蒙』(北京:&nbsp;北京大学出版社, 2011).[4]Ivor Leclerc, The Philosophy of Nature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86); The Nature of Physical Existence (London: Allen & Unwin, 1972). Leclerc는&nbsp;구성&nbsp;존재자들이&nbsp;상호적으로&nbsp;작용할&nbsp;때&nbsp;통일된&nbsp;전체로&nbsp;기능하는&nbsp;복합체를&nbsp;형성한다고&nbsp;논증하며&nbsp;이를&nbsp;&ldquo;복합&nbsp;현실태(compound actuality)&rdquo;라&nbsp;명명한다&nbsp;&mdash;&nbsp;화이트헤드의&nbsp;엄격한&nbsp;미시적&nbsp;원자론에&nbsp;잠재한&nbsp;환원주의적&nbsp;경향에&nbsp;대한&nbsp;교정이다.&nbsp;또한&nbsp;Paul A. Bogaard and Gordon Treash, eds., Metaphysics as Foundation: Essays in Honor of Ivor Leclerc (Albany: SUNY Press, 1992)&nbsp;참조.[5]John W. Lango, Whitehead&rsquo;s Ontology (Albany: SUNY Press, 1972),&nbsp;특히&nbsp;&ldquo;The Theory of Nexus&rdquo;&nbsp;장. Lango는&nbsp;사건을&nbsp;&ldquo;현실적&nbsp;계기들의&nbsp;결합체(a nexus of actual occasions)&rdquo;로&nbsp;해석하고,&nbsp;결합체가&nbsp;그&nbsp;구성&nbsp;요소인&nbsp;현실적&nbsp;존재들과&nbsp;구별되는&nbsp;존재자라는&nbsp;실재론&nbsp;명제(Realist Thesis)를&nbsp;옹호함으로써,&nbsp;물질적&nbsp;물체에서&nbsp;살아있는&nbsp;유기체에&nbsp;이르는&nbsp;사회들의&nbsp;형식적&nbsp;존재론적&nbsp;골격을&nbsp;제공한다.[6]Murray Code, Order & Organism: Steps to a Whiteheadian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the Natural Sciences (Albany: SUNY Press, 1985); Process, Reality, and the Power of Symbols: Thinking with A.N. Whitehead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7). Code는&nbsp;살아있는&nbsp;유기체를&nbsp;&ldquo;DNA&nbsp;복제&nbsp;기계에&nbsp;불과한&nbsp;것&rdquo;으로&nbsp;설명하는&nbsp;일은&nbsp;사실상&nbsp;생명을&nbsp;해명&nbsp;하는&nbsp;것이&nbsp;아니라&nbsp;해소해&nbsp;버리는&nbsp;것이며,&nbsp;진정한&nbsp;이론생물학은&nbsp;새로운&nbsp;정보의&nbsp;내재적&nbsp;생성을&nbsp;유기적&nbsp;과정&nbsp;자체의&nbsp;구성&nbsp;요소로&nbsp;인정해야&nbsp;한다고&nbsp;논증한다.[7]Simon C. Kim, &ldquo;Jeong-Qi Realism: Why It Is Not a Fringe Theory but a New Alternative Paradigm&rdquo; (미간행&nbsp;원고,&nbsp;한얼연구소, 2025&ndash;2026).&nbsp;정기&nbsp;&rarr;&nbsp;운기&nbsp;&rarr;&nbsp;생명특이점&nbsp;&rarr;&nbsp;심신특이점의&nbsp;4층&nbsp;존재론&nbsp;구조는&nbsp;저자의&nbsp;Vital Process Realism의&nbsp;체계적&nbsp;골격을&nbsp;이룬다.[8]&ldquo;정기실재론은&nbsp;경험적으로&nbsp;검증&nbsp;불가능한&nbsp;것이&nbsp;아니라&nbsp;물리주의&middot;OSR&middot;과정&nbsp;존재론과&nbsp;메타이론적으로&nbsp;동등하다&rdquo;는&nbsp;주장은&nbsp;모든&nbsp;비실험적&nbsp;존재&nbsp;이론에&nbsp;적용되는&nbsp;동일한&nbsp;인식적&nbsp;기준에서&nbsp;따라&nbsp;나온다.&nbsp;신유물론적&nbsp;맥락에&nbsp;관해서는&nbsp;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nbsp;참조.[9]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 ed.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W. Sherburne (New York: Free Press, 1978), 210:&nbsp;과정의&nbsp;두&nbsp;종(種) &mdash;&nbsp;미시적&nbsp;합생(concrescence)과&nbsp;거시적&nbsp;이행(transition).&nbsp;후자는&nbsp;&ldquo;획득된&nbsp;현실태로부터&nbsp;획득&nbsp;중의&nbsp;현실태로(from attained actuality to actuality in attainment)&rdquo;의&nbsp;이행으로&nbsp;정의된다.&nbsp;국역:&nbsp;오영환&nbsp;옮김,&nbsp;『과정과&nbsp;실재』(민음사).]]></description>
			<author>김철호</author>
			<pubDate>Sun, 05 Jul 2026 10:59: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삶과 죽음</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bedaf3c3d806b2fea2fa54b9d181408de98a358c.jpg" class="fr-fic fr-dib">&nbsp; 그림 출처: 제미나이발터 벤야민의 이라는 글에는 스페인 이비사섬 서쪽 해안의 칼라 옌티아(Cala Llentya) 절벽에 위치한 이비사의 해시계 이야기가 나온다. 이 해시계에는 다음의 글귀가 적혀 있다. "마지막 시간은 많은 이들에게 온다." 벤야민은 이 글에 대해서 의미 심장한 글을 덧붙인다. "오늘날 시민들은 죽음으로부터 깨끗하게 보존된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영원의 건조한 거주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끝이 다가오면,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으로 치워진다."&nbsp;<br>여기서 &#39;마지막 시간&#39;이 무엇일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죽음의 시간이다. 중세인들에게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낯선 현상이 아니었다. 로마 병정들이 개선행진을 할 때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있다. &ldquo;메멘토 모리(Memento mori)&rdquo; (죽음을 기억하라). 당신들이 지금은 승자의 영광을 누리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들 역시 패자가 되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사실상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것이다. 일찌기 어둠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가 말했듯, 삶이 시작하는 순간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길래 삶이 빛나는 것이다. 월명사가 쓴 신라의 향가 에도 그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nbsp;<br>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죽음을 망각하고 외면할 뿐만 아니라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삶의 세계로부터 배제시키고 있다. 우리의 삶은 결코 단절이 없고, 죽음은 삶과 다른 세계로 간주된다. 현대인들은 죽음을 예외적이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관리되고 있다. 벤야민이 지적하듯, "오늘날 시민들은 죽음으로부터 깨끗하게 보존된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영원의 건조한 거주자들이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실존의 중요한 계기이다.&nbsp;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한 것이고, 그 삶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매 순간의 의미를 깨닫게 해줄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면 어떻게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알 수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죽음에 무지하고 죽음을 외면하는 현대인들을 &#39;영원의 건조한 거주자들&#39;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이런 건조한 거주자들은&nbsp;죽음을 자신들의 삶과 다르게 타자화한다. 죽은 시신은 그저 사물처럼 처리될 뿐이다.&nbsp;<br><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21:40:4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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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물질문명 vs 영혼문명</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400</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a6354395ae6318e175d841b23203b3e184159d80.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277px;">물질문명 vs 영혼문명물질문명과 대비되는 대대(對待,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완성함)적 개념으로 &lsquo;영혼문명&rsquo;을 정의하는 시도는, 서양의 형이상학(헤겔)과 동양의 근원 철학(화엄&middot;주역&middot;천부경)이 만나는 거대한 사유의 장이 될 수 있다.일단, 다음의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물질문명과 영혼문명의 본질을 비교&middot;정의해 본다.1. 시간적 관점 대비구분<br>물질문명 (Material)&nbsp;<br>영혼문명 (Spiritual)<br>시간의 본질<br>선형적 유한성<br>(Time as a Resource)<br>순환적 무한성<br>(Time as an Eternity)<br>진행 과정<br>시작 &rarr; 엔트로피 증가/마모 &rarr; 소멸 (유한)<br>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br>(무한)<br>작동 원칙<br>엔트로피(Entropy) 법칙의 지배<br>생생(生生, 낳고 또 낳음)의 과정<br>결과 및 특성<br>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일방통행이며, 모든 성취는 언젠가 소멸함<br>현상적 소멸은 새로운 시작이며, 영혼의 지혜와 가치는 축적되어 무한히 순환함<br>📝 상세 설명&nbsp;&bull;&nbsp;물질문명의 시간 (선형성과 유한성): 물질문명에서 시간은 소비되는 자원과 같다. 물질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점차 낡고 마모되는 엔트로피 법칙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시간은 오직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일방통행으로만 흐르며, 그 과정에서 쌓아 올린 모든 물리적 인프라나 육체적 성취는 결국 소멸을 맞이하는 유한한 운명을 지니게 된다.&nbsp; &bull; 영혼문명의 시간 (순환성과 무한성): 반면 영혼문명에서 시간은 소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생(生生, 낳고 또 낳음)하는 과정이다. 천부경의 원리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현재로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소멸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시작일 뿐이며, 그 과정 속에서 의식의 가치와 영혼의 지혜는 계속해서 축적되고 무한히 순환하게 된다.<br>2. 공간적 관점 대비&nbsp;구분<br>경계 (물질문명)<br>초월 (영혼문명)<br>핵심 개념<br>배타적 유한성<br>(Space as a Boundary)<br>&nbsp;원융적 무한성<br>(Space as a Whole)<br>공식<br>&nbsp;[나] 🔒 경계/소유 🔒 타인<br>&nbsp;[나] 🌐 인드라망/공명 🌐 우주<br>공간의 성질<br>부피를 가지므로 한 공간에 두 물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음&nbsp;<br>영혼과 의식은 공간적 경계가 없으며 무한함으로 확장됨<br>관계 방식<br>너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과 점령이 필요함<br>물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마음과 마음이 공명(感應)함<br>결과 및 특징<br>&nbsp;국가, 영토, 소유라는 분절된 개념이 지배하며 공간의 분절과 제약에 갇힘<br>&nbsp;&#39;일즉다 다즉일(하나의 의식 안에 온 우주가 들어감)&#39;처럼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통합됨<br>📝 상세 설명&nbsp; &bull; 경계 (물질문명의 공간): 물질은 필연적으로 부피를 차지하기 때문에 타인과 공간을 공유할 수 없는 배타성을 지닌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39;나&#39;와 &#39;타인&#39; 사이에 🔒경계를 긋고, 영토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과 점령이 발생하게 된다. 즉, 물리적 거리와 분절된 제약 속에 갇혀 있는 유한한 상태를 의미한다.&nbsp; &bull; 초월 (영혼문명의 공간): 반면, 영혼과 의식의 세계에서는 공간적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듯 아주 작은 의식 안에도 온 우주를 담아낼 수 있으며, 물리적인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이 공명한다 🌐. 외형적인 영토 팽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 공동체로 초월적 통합을 이룬다<br>3. 가치적 관점 대비구분<br>&nbsp;물질문명 (Entropy)<br>영혼문명 (Syntropy)<br>핵심 동력<br>쓸수록 고갈되고 파편화됨<br>나눌수록 증폭되고 풍요로워짐<br>인식의 방향<br>외향적 점유<br>(외부 세계 정복 및 소유)<br>&nbsp;내향적 성찰<br>(내면의 &#39;하나(一)&#39; 자각 및 연결)<br>인간의 위상<br>기계의 부품 또는 경제적 소비 주체<br>&nbsp;우주의 중심(人中天地一)<br>작동 원리<br>고갈과 경쟁<br>(나누면 몫이 줄어드는 제로섬 게임)<br>증폭과 공존<br>(나눌수록 커지는 역엔트로피 법칙)<br>대표적 가치&nbsp;<br>돈, 자원, 에너지 등 제한된 물리적 자산<br>사랑, 지혜, 깨달음 등 결코 고갈되지 않는 내적 자산<br><br>상징 주역괘수화기제(水火旣濟)의 정체<br>화수미제(火水未濟)의 가능성<br>📝 상세 설명&nbsp; &bull; 엔트로피 (물질문명의 가치 전개): 물질문명에서의 가치(돈, 자원, 에너지)는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차지하면 타인은 가질 수 없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유발한다. 즉, 나누면 내 몫이 줄어드는 &#39;고갈의 법칙&#39;이 지배한다. 이처럼 외부 세계를 끝없이 정복하고 소유하려는 경쟁 속에서 인간은 결국 기계의 부품이나 단순한 경제적 소비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nbsp; &bull; 신트로피 (영혼문명의 가치 전개): 반면 영혼문명의 가치(사랑, 지혜, 깨달음, 예술적 영감)는 나눌수록 오히려 그 크기가 증폭되는 신트로피(역엔트로피) 법칙을 따른다. 한 사람의 위대한 깨달음이나 영적 성취는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풍요롭게 만든다. 억지로 소유하려 하지 않기에 결코 고갈되지 않으며, 각자가 우주의 중심(인중천지일)으로서 무한히 공존할 수 있는 내적 자산이 된다.<br><br>]]></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17:47:23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26.7.4 《99%의 일반화를 추구할 것인가, 1%의 합당함을 추구할 것인가》</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399</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6033b73df6a55a28a82715c0c9af6ea63c81d4c3.jpg" class="fr-fic fr-dib">●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nbsp;&nbsp;《99%의 일반화를 추구할 것인가, 1%의 합당함을 추구할 것인가》<br>세상을 오랫동안 관찰하며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던져 온 질문이 있습니다.<br>99%의 일반화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비록 희소하더라도 1%의 합당함을 지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br>인간 사회는 대체로 다수의 선택과 관행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일정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관행이 반복될수록 본래의 목적과 의미는 점차 희미해지고, 잘못된 구조마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br>수많은 사람과 사건, 그리고 다양한 사상과 제도를 살펴보며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과정이 깊은 성찰과 다층적인 구조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희박한 경우도 많고, 구조적으로 정합성을 갖추지 못한 채 단기적인 성과나 이해관계에 머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일시적인 변화는 만들어 내더라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순환하며 스스로를 점검하고 개선하는 구조까지 갖추는 경우는 더욱 드뭅니다.<br>설령 이러한 요소들을 일정 부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현실에는 모순과 이해관계, 구조적 관성, 그리고 인간이 지닌 다양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상을 실제 행동으로 이어 가고, 그것을 오랜 시간 유지하며 사회적 변화로 연결하는 일은 매우 높은 수준의 에너지와 인내를 요구합니다.<br>저는 이러한 이유로 합당함은 단순한 선의만으로는 유지되기 어렵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구조와 순환 체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점검과 피드백, 그리고 반복적인 성찰이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상은 현실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br>여기에 더하여 저는 한 가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br>부당한 소유에 대한 집착이 커질수록, 인간은 점차 옳바름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br>소유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일정한 소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유가 존재의 목적이 되고, 타인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보다 우선되는 순간부터 판단은 쉽게 왜곡되기 시작합니다.<br>부당한 소유는 부당한 기준을 만들고, 부당한 기준은 거짓과 왜곡을 정당화하며, 결국 공동체의 신뢰와 조화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옳바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소유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이 현실 속에서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점검하고, 끊임없이 수정하며, 다시 실천하는 과정일 것입니다.<br>그래서 저는 다수의 선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곧 옳다고 판단하기보다, 비록 소수의 길일지라도 더욱 합당한 방향이라면 그 가능성을 꾸준히 살펴보고자 합니다.<br>1%의 합당함은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의미 있는 변화는 종종 그러한 작은 가능성과 꾸준한 실천에서 시작되었습니다.<br>저는 그 가능성을 쉽게 포기하기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진행은 미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큼은 잃지 않는 것.그리고 부당한 소유보다 합당한 의미를, 다수의 관성보다 1%의 합당함을 선택하는 것.<br>그것이 제가 지금도 붙잡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 나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입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13:21:50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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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4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합당한 의미를 추구하는 길》</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39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055b3c5d4fde4a61cd27c07f75697d65682805e9.jpg" class="fr-fic fr-dib">●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br>&nbsp;&nbsp;&nbsp;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합당한 의미를 추구하는 길》<br>추구하는 방향은 완전한 세상을 전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사회, 자연과 우주 모두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체계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함과 모순, 한계와 왜곡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함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방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br>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합당한 방향을 선택하고, 조금이라도 더 널리 이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입니다. 완벽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이를 위해 무엇보다 오픈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픈화는 단순히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사회를 가능한 한 숨김없이 바라보고, 끊임없이 점검하며,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서로 다른 관점과 역사, 경험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검토하며 더 넓은 이해를 이루어 가려는 자세이기도 합니다.<br>이러한 오픈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객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br>&nbsp;객관화란 개인의 욕망과 편향, 집단의 관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물과 현상을 보다 넓고 깊은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과정입니다.<br>&nbsp;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객관화는 자신의 오류를 줄여 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br>객관화는 다시 정합성을 높이는 기반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합성은 단순한 논리의 일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해야 할 역사와 반면교사의 역사 모두를 함께 성찰하고,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흐름으로 연결하여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정합성이 축적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하며 존재와 사회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br>반대로 비오픈화는 이러한 과정을 시작조차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객관적인 검토를 차단하며, 비판과 성찰을 거부하는 태도는 거짓과 왜곡, 탐욕과 부당함을 유지하는 구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구조가 반복될수록 정의와 공정은 약화되고, 사회는 점차 부정함에 무감각해질 위험이 커집니다.<br>그래서 오픈화 없는 정의는 지속되기 어렵고, 오픈화 없는 공정 또한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의 사생활이나 안전처럼 보호되어야 할 영역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공의 판단과 사회적 책임이 요구되는 문제에서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투명성과 검증 가능성이 정의와 공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br>이러한 정합성을 바탕으로 구조화가 이루어질 때, 개인과 공동체는 삶과 사회, 더 나아가 문명의 방향을 조금씩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화는 단순한 체계의 구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연결되는 과정입니다.<br>결국 이러한 모든 과정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는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성찰, 오픈화와 객관화, 정합화와 구조화, 그리고 꾸준한 실천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br>따라서 추구하는 방향은 거창한 이상향이나 완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불완전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합당한 이로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감사를 바탕으로 자신과 사회를 끊임없이 열어 두고, 객관화와 정합화, 구조화를 통해 더 넓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br>비록 그 과정은 느리고,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큼은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br>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철학적 주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존재가 수많은 기회와 역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 감사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합당한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실천하는 과정, 그것이 추구하는 수행의 의미입니다.<br>완전한 인간도, 완전한 사회도 존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열어 두고, 성찰하며, 왜곡을 줄여 나가려는 태도입니다.<br>&nbsp;그러한 노력이 반복될 때 개인은 물론 공동체와 문명 또한 조금씩 더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도 더 넓은 의미와 조화를 만들어 갈 가능성이 열린다고 믿습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13:15: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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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견기이작(見幾而作)</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39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afefc92dc3e855ea7c85947ea1d7aaefccd9bdb8.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518px;">"미세한 기미에서 우주의 질서를 읽다"<br>&lsquo;견기이작(見幾而作)&rsquo;이라는 위대한 화두는 『주역(周易)』 계사하전(繫辭下傳)의 한 대목에서 비롯된다."지기기신호(知幾其神乎)인저, 군자(君子)는 견기이작(見幾而作)하여 부사종일(不俟終日)이니라."기미를 아는 것은 신령스러운 일이니, 군자는 기미를 보면 즉시 일어나 행동하며 온종일 기다리지 않는다.일의 지극히 미세한 조짐인 기미(幾微)를 보고 그 파급과 결과를 알아채는 힘은, 오직 우주의 신명(神明)과 깊이 통하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군자가 징조를 포착한 순간 종일토록 지체하지 않고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까닭은, 그것이 우주의 거대한 변화를 감지하여 미래를 대비하는 주역의 실천적 지혜이자 그 정수(精髓)임을 알기 때문이다.이러한 지혜는 예로부터 자연의 흐름을 읽는 안목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잎의 오동나무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온 천하에 가을이 당도했음을 아는 낙엽지추(落葉知秋)의 지혜가 그러하고, 북녘달 저편에서 기러기가 떼 지어 날아오르는 궤적을 보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안비지동(雁飛知冬)의 안목이 그러하다.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자연이 보내오는 아주 작고 세밀한 신호에 늘 깨어 있었다.<br>까치의 집짓기와 우주적 정보 통신: 20년의 관찰이 남긴 신비<br>선조들의 삶 깊숙이 자리 잡은 생활의 지혜 중 유독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격언이 있었다. 바로 &ldquo;까치가 집을 높이 지으면 그해 가을 태풍이 거세지 않는다&rdquo;는 지혜였다. 이 직관적인 통찰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필자는 20여 년 동안 까치집의 높이와 가을 태풍의 상관관계를 묵묵히 관찰하고 추적해 왔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주 자연의 예측 체계와 까치의 생태적 결단 사이의 연관관계는 실로 명확하고 확실했다.&nbsp;여기서 우리는 경이로운 의문에 마주하게 된다. 얼어붙은 1월과 2월, 아직 새싹 한 잎 돋아나지 않은 한겨울의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까치는 어떻게 수개월 뒤에 들이닥칠 가을 태풍의 위력을 미리 읽어내고 둥지의 높이를 결정하는가? 이 신비로운 현상은 우주 자연이라는 거대한 초공간적 정보망과 지구상의 생명체가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통신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명백한 &lsquo;기미&rsquo;다.그렇다면 미래의 운명을 품은 이 거대한 &lsquo;정보&rsquo;는 공간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동양의 근원 철학과 현대 우주학의 관점을 융합해 보면, 이 정보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나 물질의 형태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세 가지 차원의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br>우주 정보가 중첩된 세 가지 차원의 공간<br>1. 태극(太極): 무한한 정보의 잠재 공간주역의 세계관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정보의 저장소는 바로 태극(太極)이다. 태극은 형체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극(無極)의 상태이지만, 만물을 탄생시키고 변화시키는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본체다. 이 태극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nbsp;1월의 시공간과 9월의 시공간이 분리되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통합체인 &lsquo;통체(統體)&rsquo; 속에 거하고 있다. 따라서 먼 미래인 가을 태풍에 대한 정보는, 이미 1월의 태극이라는 무한한 잠재적 공간 안에 &lsquo;확률과 파동&rsquo;의 형태로 중첩되어 존재하는 것이다.<br>2. 화엄의 인드라망: 상호 감응(感應)의 전면적 공간불교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법계(法界)이자, 주역이 강조하는 온전한 감응(感應)의 세계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촘촘한 정보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태양계 행성들이 일으키는 인력의 미세한 변화, 지구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자기장의 진동, 그리고 대기 흐름의 거대한 전조는 이미 겨울철부터 미세한 파동이 되어 우주 공간 전체에 퍼져나간다. 정보는 대기 중의 습도, 지각의 울림, 태양풍의 변화처럼 우주와 지구 사이를 메우고 있는 모든 &lsquo;장(Field, 場)&rsquo;에 에너지의 형태로 흐른다. 비록 인간의 둔한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온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lsquo;무선 통신망&rsquo;이 되어 끊임없이 정보를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다.<br>3. 생체 안테나: "人中天地一"의 생명 소통 메커니즘아무리 우주 공간에 밀도 높은 정보가 가득 차 있다 한들, 그것을 수신할 정밀한 안테나가 없다면 통신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천부경(天符經)』에서 &lsquo;사람이 하늘과 땅의 중심이며 곧 우주의 축소판&rsquo;이라 일컬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원리는 모든 생명체에 그대로 적용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고도의 정신 훈련을 거쳐야 겨우 대자연의 기미를 알아차리지만, 미물에 불과해 보이는 까치는 생존을 위해 대자연과 직통으로 연결된 강력한 &lsquo;생체 안테나(순수의식과 기운의 감응 장치)&rsquo;를 태생적으로 품고 있다. 따라서 그 정보는 까치의 세포와 유전자,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종족적 무의식 공간 속에 실시간으로 흐른다. 1월과 2월의 우주적 변화와 지구 자기장의 미세한 뒤틀림이 까치의 예민한 감각 기관과 공명(Resonance)하는 순간, 우주 공간을 떠돌던 정보는 까치의 온몸으로 온전히 다운로드 된다.<br>결론: 이사무애(理事無礙)-현상과 본질이 걸림 없는 세계를 향하여-결국 가을 태풍의 미래 정보는 아득히 먼 시간 저편의 공간에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의 변통(變通)과 순환의 원리로 바라보면, 우주 전체는 거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다. 동쪽 끝의 미세한 떨림이 서쪽 끝에 즉각적으로 전해지듯, 겨울의 차가운 기운 속에는 이미 가을이라는 열매의 씨앗이 공간적으로 중첩되어 숨 쉬고 있다. 다만 눈앞의 물질적 자극과 유한한 시공간에 갇힌 인간만이 이를 보지 못할 뿐이며, 까치를 비롯한 대자연의 생명들은 무한한 시공간의 우주적 질서와 온몸으로 소통하며 그 기미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필자가 본 주역 64괘 풀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현상(事)과 본질(理)이 서로 걸림 없이 하나로 통한다는 이사무애(理事無礙)의 경지, 즉 보이지 않는 우주적 정보망과 생명체 간의 위대한 소통 메커니즘을 현대인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의 선택이다. 오랫동안 잊혔던 우주풍수의 원리와 대자연의 지혜를 현대적인 과학과 철학의 언어로 투명하게 깨워내는 작업, 그 위대하고 엄숙한 여정을 이제 『주역』의 깊은 바다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11:41: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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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title>
			<link>https://www.essayphilosophy.net/article/1396</link>
			<description><![CDATA[현재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다수를 이루는 5세, 6세는 더이상 한국어를 쓰지 않고 러시아어나 현지어를 쓰고 있다. 그 때문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우리말로 쓴 문학작품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은 민족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라는 책이 최근에 나왔다. 고려인들이 쓴 시 46편, 소설 4편, 수필 2편, 희곡 5편 등 모두 57편을 수록하고 관련 논문을 곁들였다.<img src="https://www.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bb5b2d7ed8df6df801098e118fbc4aa623f9ce4e.jpg" class="fr-fic fr-dib">광주광역시에 위치한 월곡 고려인 문화관 &#39;결&#39;에서 보존 및 전시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적인 문학 유산(고서적),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강제이주 전 연해주에서 의 작가 조명희를 사사하면서 우리말 신문 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는 강제이주 직후인 1938년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 사범대학 벽보에 실은 시가 문제되어 시베리아 원시림에서 22년 동안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소설 은 바로 그 원시림 생활에서 돌아온 인물을 주인공 삼아 스승 조명희와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연해주 시절을 그리움 속에 회고하는 내용이다.<br>구소련 지역 고려인들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이제 시작되었는데 연구 대상은 곧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라며 다른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화권보다 이 지역의 문화와 문학이 그 연구 및 자료의 발굴에 있어 시급성을 다투는 과제가 되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고려인 문학 다수는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로 총 23권이 지정되어 있다. 게다가 원고지의 한글을 읽어보노라니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건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nbsp;<br>지금까지 고려인을 연구한 학자들의 전반적인 견해는 전 세계의 한민족 가운데 CIS의 한인 즉, &lsquo;고려사람&rsquo;은 전 세계의 한인들 중에서도 현지사회에 가장 동화된 사람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들이 민족어를 거의 상실하면서 자치지역을 지니지 못하고 분산된 민족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소비에트의 러시아어 동화 정책, 그리고 1937년에 실행되었던 강제 이주정책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붕괴와 독립 국가들의 등장이 고려인의 민족정체성을 일깨움으로써 고려인 사회에 변화를 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고려인의 민족문화와 언어의 재생에 있어서 급성장을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구소련 국가들의 민족정책과 한국 간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라는 점이다.&nbsp;<br>첫째, 구소련 국가들의 언어와 교육, 문화 정책에의 고려인 전통문화발전에 대한 기여도에 대해서 고려인들이 느끼는 반응은 제법 긍정적이고 러시아어의 공용화 정책이 그들의 민족문화발전 및 보존에 방해하지 않았다.<br>둘째, 고려인 정체성의 객관적 특성에 대한 질문 결과,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모국어로 한국어를 생각하고 있으나 가정에서는 절대다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고 한국어 구사능력 수준도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민족문화 보존에 있어 그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였다. 고려인 정체성의 주관적 특성 가운데 심리적 동일성, 고려인들에 대한 동포애, 지속성에 관한 조사결과가 대체로 긍정적으로 나타났으나 독자성 및 한국인들에 대한 동포애에 관한 결과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다.&nbsp;<br>셋째, 고려인들의 민족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는 구소련 국가들과 한국 간의 외교관계와 그에 따른 고려인들에 대한 구소련 국가들의 민족정책을 꼽았다. 즉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러시아를&nbsp;중심으로 한 민족정책, 즉 고려인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이끌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려인의 민족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구소련 정부들의 다민족문화 포용정책과 한국과의 수교는 고려인들의 민족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한민족 의식을 제고시키는 계기가 된다.<br>이렇게 개방 이후, 초창기의 한국어 책부터 한국어 공부, 그리고 러시아화 된 것에서 고려인의 독창적인 면을 찾기 위해 문화와 역사를 공부했고 그 흔적은 우리 정부의 어느 정도 지원 사업으로 인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Fri, 03 Jul 2026 17:22: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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