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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샤와 친지들
  • 정대현
  • 등록 2026-06-02 20:01:19
  • 수정 2026-06-03 08:56:50

나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키에르케고어와 도스토엪스키를 실존주의자로 소개했다. 나는 키선생에 빠져서 그의 삶에 따라 살고 싶었다. 결혼도 않고 철학을 공부해서 신학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선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기억하는 것이 없다. 도선생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지난 달에야 읽었고 감상문을 적어 담임 선생님께 뒤늦은 보고를 드리고 싶다. 키 선생에 대한 보고는 이미 제출(“슬픔: 또 하나의 실존적 범주”)했었다.

나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도선생의 이 소설 책은 읽어본 어떤 철학 책 못지 않게 심오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빚어내는 인간 삶의 드라마가 다양하게 그리고 반성적으로 펼쳐진다. 돈과 명예 같은 공적 관계가 나타나고, 사랑, 증오, 시기, 질투 같은 내 적 전쟁이 발생하고, 살인과 법 같은 사회질서가 등장하면서도 종교와 신 같은 영적 세계에 닿아 있다. 하나의 소설책에 인간사의 거의 모든 주제가 극적으로 연결되어 펼쳐지면서 독자가 빠져드는 공간을 이루어낸다. 


                    한국어 번역판 표지


소설은 극적인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 둘째 아들 이반이 돋보인다. 신이 없다면 무엇이던 가능하다라고 믿는 이반은 신의 문제를 <대심문관>의 서사로 표현한다. 대심문관은 광야에서 기적신비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세 가지 유혹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했던 1500년 전의 예수가 에스파야에 다시 나타나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그의 자유를 설파하여 기존 질서의 가톨릭 교회를 불안하게 한다고 하여 화형하겠다고 선언한다. 자유는 선과 악을 스스로 분별하고 그 선택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고 불안과 고뇌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심문관 본인도 한 때 누구보다 성스러운 신심으로 하느님을 숭배하였으나 가톨릭 질서를 존중하여 사목하는것이라고 술회한다. 예수는 아 무말도 없이 그에게 키스하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풀어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한다.

도선생의 소설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이 감동은 특정한 체계의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 어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포괄하는 아브라함의 인간중심적 형이상학에서 감동적이다. 신과 인간, 선과 악, 물질과 비물질 같은 이분법을 전제하는 세계에서 감동적이다. 그러나 유불 도의 음양론이나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요한복음의 우주관계적 로고스론에서는 달리 보인다. 

도선생의 소설은 얼핏 19세기적 틀에 매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셋째 아들 알로샤나 스승 조시마 장노를 통해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인다. ‘대지에 입 맞추고 눈물 흘리라’라는 찬미를 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대지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다. 초월적 신이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론이 나타난다. 도선생은 알로샤를 통해 ‘신 -인간(God-man)’이라는 수직적 구도를 잠시 내려놓고, 그가 묘사한 생명에 대한 찬미를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적 장(Field)’으로 읽어내는 것 이다. 한 개인은 인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한 사람을 사랑할 때 그의 안에 신의 모습이  회복된다고 한다. 이렇게 구성된 우리는 지옥을 벗어난다.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과제, 의무, 필연이다. 아니면 죽음의 집에 빠진다는 것이다. 도선생의 실존주의가 선명하다.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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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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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min2026-06-03 08:58:50

    선생님의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느낀 큰 감동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철학자가 소설을 읽고 대화하는 법을 선생님의 글에서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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