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레드 화이트헤드(1861-1947)

쟌 캅 (1925-2024)

2019년 10월 쟌 캅과 도올 생태문명 대담
〈제4화〉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살아있음'의 비밀
— 우주 전체가 경험하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다면?
들어가며: 드라이쉬가 남긴 숙제
지난 3화에서 우리는 독일의 발달생물학자 한스 드라이쉬의 놀라운 실험을 살펴보았다. 성게 배아를 두 개로 나누었더니 각각이 온전한 성게 개체로 자라났다. 부품이 절반으로 줄었는데 결과물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드라이쉬는 이 사실에서 하나의 결론을 끌어냈다. 생명은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 생명체 안에는 전체를 유지하고 복원하려는 어떤 힘, 어떤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빌려 엔텔레키(entelechy)라고 불렀다.
그런데 드라이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만약 생명체 안에 이런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체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주 전체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바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붙잡은 사람이 있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다.
【1】 수학자가 생명을 묻기 시작했을 때
화이트헤드는 원래 수학자였다. 그것도 보통의 수학자가 아니라,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세운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공저한 당대 최고의 논리학자였다. 숫자와 기호와 증명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 60대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 전환을 촉발한 것은 20세기 초 과학계를 뒤흔든 두 개의 혁명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물질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 이 발견들은 뉴턴 이래 서구 사유를 지배해온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이 충격 앞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300년간 당연하게 여겨온 자연관이 틀렸다면, 우주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생명은 무엇인가?' 1920년에 발표한 ‘자연의 개념(Concept of Nature), 1925년 ‘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Modern World)에는 유물론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우주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 내지 형이하학적 고민이 쓰여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생애 말년을 전혀 다른 작업에 바쳤다. 그 결과물이 1929년에 출간된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다. 훗날 20세기 형이상학의 가장 야심찬 기획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기계처럼 돌아가는 우주가 아니라, 살아있고 경험하고 창조하는 유기체적 우주를 그려냈다.
【2】 과학이 저지른 '오류' — 추상을 실재로 오해하다
화이트헤드의 핵심 비판은 근대 과학이 저질러온 하나의 근본적 오류를 겨냥한다. 그는 이것을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렀다.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물리학이 '1킬로그램의 물'을 다룰 때, 그것은 실제 물에서 많은 것을 제거한 추상이다. 물을 손으로 떠올릴 때의 차가운 감촉, 목을 타고 내려갈 때의 시원함, 갈증이 해소될 때의 안도감,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 묘한 기능—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질량 1킬로그램'이라는 추상적 수치만 남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 과학이 이 추상을 실재 자체로 혼동했다는 데 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실재에서 경험, 목적, 생명성이 처음부터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세계는 차갑고 무목적적인 입자들의 충돌로 환원된다.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아름다움, 의미, 사랑, 고통 같은 것들은 물질세계의 '부산물' 혹은 '착각'으로 취급된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이 오류라고 말한다. 과학이 편의상 제거한 것을 실재에서도 없는 것으로 오해해 버린 것이다.
이 오류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데카르트 이래 서양 철학을 괴롭혀온 심신 이원론이다. 한편에는 차갑고 기계적인 물질 세계가 있고, 다른 편에는 따뜻하고 의미로 가득 찬 의식의 세계가 있는데, 이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화이트헤드는 이 이분법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라고 본다.
【3】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화이트헤드의 해결책은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뉴턴 물리학은 세계를 공간 속에 위치한 '사물(thing)'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전자, 원자, 분자 같은 입자들이 각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것이 세계다.
화이트헤드는 이 생각을 뒤집는다. 세계의 기본 단위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 (event) 이다. 더 정확히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혹은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다. 전자조차도 고정된 입자가 아니라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이다. 세계는 정지된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건들의 끊임없는 흐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화이트헤드의 가장 대담한 주장이 등장한다. 이 모든 사건들은—전자의 수준에서든 인간 의식의 수준에서든—경험(experience)의 구조를 공유한다. 자기 이전의 세계를 내부로 받아들이고(파악, prehension), 그것을 하나의 방향 아래 통합하여(합생, concrescence), 새로운 현실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후 소멸하며 다음 사건들의 재료가 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범 경험론(pan-experientialism)'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돌이나 전자가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다는 주장이 아니다. 의식은 경험의 가장 복잡하고 고도로 조직된 형태일 뿐이며, 경험의 원초적 형태는 모든 존재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빛이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듯, 경험도 전자의 극히 단순한 반응에서 인간의 풍요로운 의식까지 하나의 연속체를 이룬다.
【4】 파악(prehension) — 세계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방식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가 '파악(prehension)'이다. 라틴어로 '붙잡다'는 뜻이다. 한 존재가 이전의 현실 세계 전체를 자신의 내부로 수용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파악이 단순한 '입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능동적인 선택적 수용이다. 어떤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배제할지를 스스로 선택한다. 인간이 수많은 감각 자극 중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선택하듯, 모든 존재는 자신의 파악 방식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다.
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은 긍정적 느낌(positive prehension) 인데 화이트헤드는 이를 감응(feeling) 이라고 한다. 부정적 느낌의 파악(negative prehension)은 배제 (elimination)라고 정의한다.
또한 이 파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전의 현실적 존재들을 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파악'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s)'라 부른다—을 개념적으로 수용하는 '개념적 파악'이다. 쉽게 말하면 전자는 '이미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임'이고, 후자는 '앞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향함'이다.
동양철학에서 기(氣)가 자신과 공명하는 다른 기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감응 (感應)'이라는 개념이 있다. '동기상응(同氣相應)'—같은 기는 서로 호응한다는 오래된 자연철학의 원칙이다. 기에는 음기와 양기가 있어 음양대대로 상호 작용한다. 황제 내경에서는 ‘양정상박 위지신(兩精相博謂之神)’이라 하여 음의 정기, 양의 정기의 부딪히고 끌어당김으로 만물의 생성변화를 규정한다.
놀랍게도 화이트헤드의 파악과 동아시아의 감응은 거의 동일한 구조다. 단순한 외적 충돌이 아니라 내적 공명을 통해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의식 있는 존재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것까지 일치한다.
【5】 합생(concrescence) — 매 순간의 자기창조
파악을 통해 이전 세계를 받아들인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화이트헤드는 이 과정을 '합생(concrescence)'이라 부른다. 라틴어로 '함께 자라남'이라는 뜻이다. 받아들인 재료들을 통합하고 완성해나가는 자기창조의 과정이다.
합생은 세 단계를 거친다. 먼저 이전의 세계 전체를 물리적 파악을 통해 자신 안으로 수용한다. 그다음 이 수용된 재료들 중 어떤 것을 강조하고 어떤 것을 약화시킬지를 자신의 내적 목적(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주관적 목적'이라 부른다)에 따라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일된 현실로 완성된다. 이 완성의 순간이 충족(satisfaction)이고, 충족된 존재는 이제 소멸하여 다음 사건들의 자료가 된다.
이것이 동아시아 기철학에서 기의 '취산(聚散)'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기가 응집하여 사물이 되고(聚), 사물이 흩어져 다시 기로 돌아간다(散). 나고 죽는 것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화이트헤드는 서양적 언어로, 동아시아 철학은 동양적 언어로 표현했지만 그 실질은 놀랍도록 같다.
단순한 기계와 생명체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계는 동일한 입력에 동일한 출력을 낸다. 하지만 살아있는 존재는 동일한 자극에도 상황과 역사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이것은 합생 과정에서 주관적 목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외부 자극을 단순히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에 비추어 그것을 평가하고 선택적으로 통합한다. AI 로봇이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입력-처리-출력'의 기계적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6】 주관적 목적 — 모든 존재 안에 깃든 방향
화이트헤드의 '주관적 목적(subjective ai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 드라이쉬의 생기와 직결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드라이쉬가 엔텔레키를 생명체에 한정된 원리로 보았다면,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 안에서 작동하는 보편적 원리로 확장한다.
주관적 목적은 두 계기를 가진다. 처음에는 우주의 창조적 원리로부터 해당 존재에게 적합한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이것이 '초기 목적(initial aim)'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외부에서 강제된 명령이 아니다. 합생이 진행되면서 이 목적은 존재 자신이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변형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 자유론의 근거다.
이 구조는 주역(周易)의 '시중(時中)' 개념과 흥미롭게 겹친다. 시중이란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조화를 역동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정기의 흐름도 이와 같다. 기는 고정된 경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장부(臟腑)와 경락(經絡)의 현재 상태에 따라 목적을 조정하며 흐른다. 인체가 스스로 치유하는 힘,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이 바로 이 역동적 목적성의 표현이다.
이제 다시 프랑켄슈타인과 AI 로봇을 떠올려보자.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인간의 세포와 장기로 조립되었다. AI 로봇은 최첨단 알고리즘으로 인간의 사고를 흉내 낸다. 둘 다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는 점에서 같은 꿈을 꾼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들에게는 이 주관적 목적이 없다. 외부에서 입력된 프로그램이나 전기 자극에 반응할 뿐, 내부에서 자신의 완성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잡는 힘이 없다.
【7】 창조성 —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힘
화이트헤드 철학의 정점에 '창조성(Creativity)'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는 이것을 '궁극적인 것의 범주(the Category of the Ultimate)'라고 부른다. 우주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라는 뜻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창조성은 궁극적 범주일 뿐 아니라 보편자의 보편이기도 하다.
"창조성은 새로운 현실적 존재들이 그 이전의 현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창조하는, 끊임없이 반복되면서도 매 순간 새로운 그 원리다." —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창조성은 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존재의 근본 방식이다. 매 순간의 합생은 이전의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여 이전과 동일하지 않은 새로운 현실을 산출한다. 이 새로움(novelty)의 산출이 창조성이다.
화이트헤드는 신조차도 이 창조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을 자신의 본성으로 가진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하늘(天)이 우주를 외부에서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을 낳는 덕(生生之德)으로 내재한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명구가 있다. '生生之謂易(생생지위역)'—끊임없이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한다. 우주의 본질이 끊임없는 생명의 창출이라는 이 직관, 화이트헤드는 서양 형이상학의 언어로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한다. 동양은 이것을 易이라 하고,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Creativity라 불렀다.
【8】 동아시아 정기론과 화이트헤드의 놀라운 만남
화이트헤드는 동아시아 철학을 직접 연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기체 철학과 동아시아 정기론(精氣論)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평행 관계가 있다. 이것은 두 전통이 서로 독립적으로 생명과 우주를 깊이 탐구한 끝에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Process)'은 동아시아에서 기(氣)의 흐름, 즉 운기(運氣)에 대응한다. 기 흐름이 곧 존재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파악 (prehension)' 은 기(氣)가 다른 기와 내적으로 공명하는 '감응(感應)'에 대응한다. 화이트헤드의 '합생(concrescence)'은 기의 응집과 해산인 '취산(聚散)'에 대응한다.
화이트헤드의 '주관적 목적(Subjective Aim)'은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는 기(氣), 즉 음양의 조화, 오행의 균형을 이룬 '정기(正氣)'에 대응한다.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Creativity)'은 끊임없이 생명을 낳는 우주의 덕성인 '생생지덕(生生之德)'에 대응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실현될 수 있는 순수 가능성의 형식들—는 동아시아에서 리(理), 즉 사물의 구조 원리에 대응한다.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셉 니담(Joseph Needham)은 그의 기념비적 저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주자(朱子)의 자연철학을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과 비교하며 동서양 학자들의 더 깊은 연구를 촉구했다. 정기실재론은 바로 이 연구의 방향을 계승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해하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사변 형이상학은 신유학의 태극의 리, 이일분수의 리, 더 나아가 율곡의 ‘이통기국설’의 논리 구조와 흡사하다.
【9】 현대 과학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이 단순한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님을 현대 과학이 지지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미국 터프츠 대학의 마이클 레빈(Michael Levin) 교수의 연구를 보자. 그는 세포들 사이의 전기적 신호 패턴—갭 접합을 통한 이온 흐름—이 세포의 분화 방향, 기관의 위치, 신체 형태 전체를 결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이 생체전기 신호를 인위적으로 바꾸면 정상과 전혀 다른 형태—머리가 꼬리 위치에 생기는 벌레 등—가 만들어진다. 형태의 정보가 DNA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포 집합 수준의 전기적 패턴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드라이쉬의 성게 실험이 21세기에 정교하게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출신 생물학자 알렉산더 구르비치가 1920년대에 처음 제안한 '형태발생장 (morphogenetic field)' 이론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개별 세포들의 유전자 발현을 넘어 세포 집합 전체의 공간 패턴을 결정하는 조직화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영원적 객체'가 합생 과정에 전체 형태의 방향을 제공한다는 개념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더 깊이있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율곡의 ‘기발이승설’에 깔린 애널로지(analogy)와 결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연구도 있다. 열역학적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개방 체계에서 새로운 질서와 조직이 자발적으로 창발한다는 것, 즉 생명이 외부에서 주어진 설계가 아니라 스스로 더 높은 조직화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fman)은 이것을 더 밀고 나가 생명 자체가 자연선택 이전에 이미 자기조직화의 내재적 경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과학적 발견들은 화이트헤드의 창조성과 합생 개념이 예측한 방향이다. 우주는 균일화와 무질서를 향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더 높은 조직화와 복잡성을 향해 창발하는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이 정기(精氣)가 자기조직적 흐름을 통해 생명을 구성하고 유지한다는 한의학적 직관과 만나는 지점이다.
【10】 아리스토텔레스·드라이쉬·화이트헤드 — 세 목소리의 합창
이제 1화부터 이어져온 여정을 한눈에 조망해보자.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세 사람이 같은 문제를 향해 다가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씨앗이 나무가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을 관찰하며 물었다. 생명체는 왜 특정 형태를 향해 나아가는가?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체 안에 이미 내재된 목적—엔텔레키—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 텔레스의 이론은 직접 실험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었다.
드라이쉬는 실험실에서 성게 배아를 반으로 나누며 물었다. 부분이 어떻게 전체를 복원하는가? 생명체 안에는 전체를 보존하려는 조절 원리—그도 엔텔레키라고 불렀다—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드라이쉬의 설명은 생명체에 한정된 것이었고, 더 큰 우주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화이트헤드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출발하여 우주 전체를 향해 물었다. 경험과 목적성과 창조성은 생명체에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주 전체를 관통한다. 모든 사건은 경험하고, 방향을 가지고, 창조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정기(精氣)'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정기는 목적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 조절적이며(드라이쉬의 생기), 창조적이고 경험하며 (화이트헤드의 과정), 우주 전체에 편재한다(천지인 삼재 기운의 통일).
【11】 정기실재론의 다섯 가지 핵심 명제
지금까지 1화부터 4화에 걸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이제 정기실재론 (精氣 實在論)의 기본 명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기실재론' 이라는 용어는 현대 철학에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나 초월적 실재론 (Transcendental Realism) 등이 제기하는 존재론적 물음들을 의식 하면서, 그것들과의 비판적 대화 속에서 새롭게 주조한 개념이다.
정기실재론은 기 철학(氣哲學)의 핵심 범주인 기(氣)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현대 실재론 담론과 접합시킴 으로써 독자적인 철학 명제 체계를 수립하려는 기획이다.
첫 번째는 '과정성(過程性)'이다. 정기(精氣)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응집하고 흩어지는 과정이다. 세계는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흐름이다.
두 번째는 '경험성(經驗性)'이다. 정기는 경험하는 장(場)이다. 기(氣)의 감응(感應) 은 모든 존재 수준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원초적 형태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그 수준에 따라 경험한다.
세 번째는 '목적성(目的性)'이다. 정기는 방향성을 가진다. 모든 기의 흐름은 더 나은 조화와 균형을 향한 내적 목적성을 가진다. 이것이 생명의 자기치유 능력과 성장의 근거다.
네 번째는 '창조성(創造性)'이다. 정기는 매 순간 새로운 패턴을 창발한다. 생명의 자기조직화는 정기의 창조적 합생이다. 우주는 단순히 기존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것을 낳는다.
다섯 번째는 '전체성(全體性)'이다. 정기는 전체를 부분에 내재화한다. 경락-장부 시스템은 우주적 전체성이 생명 안에 구현된 것이다. 성게 배아의 절반이 전체를 복원하는 것, 인체가 손상 후 원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 이 전체성의 발현이다.
위에 언급한 정기실재론의 다섯가지 특징은 바로 유기체 철학의 개념과 사유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음 기회에 화이트헤드 유기체 철학과 기 철학의 유사성에 대해 논의해 보려고 한다.
나오며: 인간이 인간인 이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AI 로봇, 그리고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세포와 장기로 몸을 조립하고 번개의 전기로 생명을 일으키려 했다. 그 결과물은 형태는 인간을 닮았지만 생명의 근거가 불분명한 존재다. AI 로봇은 인간의 지능을 소프트웨어로 구현하여 초지능을 장착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물질 덩어리다. 아무리 정교해도 둘 다 경험하지 않고, 내적 목적을 가지지 않고, 진정한 의미로 창조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언어로 말하면, 그들에게는 파악과 합생과 주관적 목적이 없다. 동아시아의 언어로 말하면, 정기(精氣)가 없다. 정기는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다. 경험하고, 방향을 가지고, 창조하는 장(場)이다.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는 살아있게 된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범 경험주의를 정교하게 정식화한 데이비드 그리핀 (1939-2022)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기 철학의 범 경험주의와 겹쳐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며 느끼는 그리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올라오는 수치심, 갓 태어난 아이 앞에서 경험하는 경이로움—이것들은 신경 화학반응의 부산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정기가 세계와, 타인과, 자기 자신과 깊은 공명을 이루는 방식이다. 이 공명은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험하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는 정기의 흐름 안에서만 발생한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창조성'이라 불렀다. 동아시아는 이것을 '생생지덕 (生生之德)'이라 불렀다. 정기실재론은 이 두 목소리가 같은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실재야말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이며, 생명이 생명인 이유다.
화이트헤드 대표작인 ‘사고의 양태(Modes of Thought)’ 8장에는 생명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 자기 향유(self-enjoyment), 목적(aim), 그리고 창조성 (creativity) 셋이 생명으로서의 자질이다. 프랑켄슈타인이나 피지컬 AI에게는 없는 특성들이다.
다음 5화에서는 동아시아 전통의 정(精)·기(氣)·신(神) 삼분법이 화이트헤드· 드라이쉬·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범주들과 어떻게 체계적으로 대응하는지를 분석 하고, 정기실재론의 완전한 개념 구조를 제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