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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ABC론과 만하임의 '자유부동의 지식인' — 1929년 독일과 2025년 한국 사이에서
  • 김철호 기자
  • 등록 2026-06-08 15: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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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유튜브 논객들이 뜨겁게 달군 알파벳 세 글자

요즈음 한국 언론계와 유튜브 논객 공간이 유시민 선생의 이른바 ABC론 때문에 시끌벅쩍하다. 유 선생이 제시한 이 분류법은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일반 시민이든, 현재 한국의 정치 국면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세 유형으로 나눈다. 필자는 같은 알파벳 ABC를 쓰지만 전혀 다른 의미에서 Simon Kim의 ABC론을 개진하고자 한다.

A형(Activist)은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이들이다. C형(Collaborator)은 반대로 권위주의적 흐름에 동조하거나 이를 묵인·옹호하는 이들이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의 지형에 반 이상을 차지하는 독재정치의 수혜자이자 방조자들인 셈이다. 그리고 논쟁의 핵심에 있는 B형(Bystander)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고 자처하며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이다. 유시민의 분류와는 전혀 다르다. 

유시민에게 있어 A형은 가치 중시, B형은 이익 중심, 그리고 C형은 A형의 가치와 B형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실용적 태도를 뜻한다. 필자의 A형은 유시민의 A형과 겹치나, B형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필자의 C형이 유시민의 B형에 속하는 셈이다.  유시민이 제기한 논쟁은 사실 단순한 정치적 태도 분류를 넘어 훨씬 근본적인 물음을 건드리고 있다.

지식인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중립은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은 도덕적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사회학자가 내놓았던 개념을 호출하고자 한다.


1929년 독일, 만하임의 절박한 처방

1929년은 독일 역사에서 분수령의 해다. 같은 해 10월 미국 월가의 대공황이 터지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허약한 경제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히틀러의 나치당은 바로 그 혼란을 먹고 자랐다. 1928년 총선에서 2.6%에 불과했던 나치의 득표율은 1930년 총선에서 18.3%로 수직 상승한다.

바로 그 어지러운 시절, 헝가리 출신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은 자신의 대표작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Ideologie und Utopie)』를 출간한다(1929). 그리고 그 안에 하나의 개념을 담는다.

freischwebende Intelligenz — '자유부동의 지식인(自由浮動의 知識人)'이다.

만하임은 인간의 사유가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존재구속성(Seinsverbundenheit)'을 인정했다. 박한식 교수가 주장했듯 어떤 이념을 떠나서 인간에게는 생존권이 최우선이다. 유시민의 ABC든 필자의 ABC든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외연을 확대하여 칼 막스를 소환해보면 이렇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세계관으로, 자본가는 자본가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리에 가장 근접한 인식은 가능한가? 만하임의 대답이 바로 '자유부동의 지식인'이었다.

그것은 어느 계급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으면서, 다양한 관점을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지식인 계층이다. 만하임은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형성된 독립적 지성인 집단이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나치의 광기에도, 공산당의 도그마에도 귀속되지 않고, 사회 전체를 비판적 거리에서 조망하는 '사회적 밸런서(Balancer)'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만하임의 꿈을 잔인하게 배반했다. 그의 책이 출간된 지 불과 4년 뒤인 1933년, 히틀러는 총리가 되었고, 만하임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쫓겨나 망명길에 올랐다.


ABC론과 만하임의 교차점 — B형은 '자유부동'인가

이제 필자의 ABC론으로 돌아오자.

흥미롭게도 ABC론의 B형은 언뜻 만하임의 '자유부동의 지식인'과 겹쳐 보인다. "나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나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본다"는 자의식이 그것이다. 실제로 B형을 자처하는 언론인들과 유튜브 논객들 상당수가 이 지점에서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여기서 만하임의 개념을 정확히 독해할 필요가 있다. 만하임이 말한 자유부동은 "아무 편도 들지 않는 소극적 중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한 관점을 깊이 체화한 뒤에야 가능한 '능동적 종합(active synthesis)'이었다. 즉, 진정한 자유부동은 각 진영의 논리를 두루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메타적 성찰 위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ABC론의 B형과 만하임적 '자유부동'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구분 ABC론의 B형 만하임의 자유부동

태도소극적 방관, 양비론능동적 관점 종합
목적갈등 회피사회적 균형 복원
현실 참여최소화비판적 개입
역사적 책임묻지 않음스스로 짐

만하임이라면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이 B형이라면, 당신은 어떤 관점들을 종합한 끝에 그 입장에 섰는가? 그것이 지적 성찰의 결과인가, 아니면 불편한 선택을 피하기 위한 회피인가?"


1929년 독일과 2025년 한국,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2024년 12월, 한국은 헌정사상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를 경험했다. 그 충격파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정치 지형은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이 국면에서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의 태도를 만하임의 틀로 분류해 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192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험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읽을 수 있다.

첫째, 당파성(Partisanship)은 늘 비대칭적으로 작동한다. 극단적 당파주의는 대중의 분노와 불안을 즉각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탁월하다. 반면 성찰적 중립은 그 에너지를 당해내지 못한다. 1933년 나치의 집권은 히틀러가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파성의 에너지가 성찰의 힘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둘째, '침묵의 다수'는 극단주의에 면죄부를 준다. 바이마르의 비극은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들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고 한 수많은 B형 독일 시민들의 침묵이 나치의 부상을 가능하게 한 토양이었다. 필자가 B형으로 분류한 지식인들을 '공범'으로 강하게 규정한 것은 바로 이 역사적 교훈에 닿아 있다.

셋째, 지식인의 '자유부동'은 그 자체가 용기를 요구한다. 만하임이 꿈꾼 자유부동의 지식인은 결코 안전한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진영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받는 자리다. 좌파로부터는 "계급 배반자"로, 우파로부터는 "좌파 동조자"로 비난받으면서도 독립적 판단을 지속하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자유부동이다.

오늘날 한국의 유튜브 공간에서 이 셋째 유형의 목소리는 얼마나 되는가. 솔직히 말하면, 드물다. 진영 논리에 포획된 A형 논객들과, 균형을 가장한 채 실제로는 현실 갈등을 회피하는 B형 논객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 현대사의 굴절을 '성공한 보수, 실패한 진보, 잊혀진 중도'라고 규정지은 바 있다.

오늘의 한국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

만하임이 100년 전에 던진 화두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놀라운 현재성을 가진다. 특히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알고리즘이 모든 이를 자신의 확증 편향 안에 가두는 오늘날, '자유부동'의 조건은 만하임의 시대보다 훨씬 더 획득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개념은 더욱 절실하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부동의 지식인은 유시민의 ABC론을 이렇게 재해석할 것이다. "나는 A도 B도 아니라 C라고 말하는 이유가, 모든 관점을 내면화한 뒤의 능동적 종합 때문인가, 아니면 선택의 두려움 때문인가?" 이 물음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필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B형 — 만하임이 꿈꾼 자유부동의 지식인 — 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서,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에필로그: 만하임의 패배와 그 역설적 승리

만하임은 나치즘 앞에서 '패배'했다. 그의 이상은 역사의 폭력에 짓밟혔다. 그러나 그의 개념은 살아남았다. 전후 민주주의 재건의 지적 토대가 되었고, 파국이 지나간 뒤 사람들이 다시 서기 위해 찾은 준거점(Reference Point)이 되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시대의 파고를 막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파고가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서 있을 준거점을 지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자유부동의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일 것이다.

유시민의 ABC론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지금, 관점을 바꾸어 한 차원 더 높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 글은 Karl Mannheim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Ideologie und Utopie)』(1929)와 최근 한국 정치 담론을 비교 성찰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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