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칠십 노객(老客)의 봄날 상념
오늘이 청명(淸明)이다.
절기란 참으로 무심하다.
사람이 늙어도, 세상이 뒤집혀도,
봄은 어김없이 제 날짜를 지켜 온다.
오늘 아침 창을 열었을 때, 공기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맑고 서늘하되 어딘가 따스한 것이 스며 있는 그 냄새 —
이 냄새는 언제부터인가 내게 시(詩) 두 편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소동파(蘇東坡)의 「동란이화(東欄梨花)」이고,
다른 하나는 천 년 전 당나라 청년 유희이(劉希夷)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다.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무렵, 나는 소동파의 그 시를 처음 만났다.
梨花淡白柳深青, 柳絮飛時花滿城.
惆悵東欄一株雪, 人生看得幾清明.
배꽃은 옅은 흰빛으로 피고, 버들은 짙은 푸름을 띠네.
버들개지가 흩날릴 때면 온 도시는 꽃으로 가득하고,
아! 서글프구나.
눈처럼 하얀 동쪽 난간의 한 그루 배꽃
내 인생에서 이런 맑고 밝은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그 마지막 구절, "人生看得幾清明"
그때의 나는 이 물음이 낯설었다.
젊음이란 그런 것이다.
봄이 끝없이 반복될 것처럼 느껴지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볼 기회가 아직 수십 번은 남아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물음의 무게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시를 오랜 지기(知己)에게 보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때로는 엽서에 적어, 때로는 전화 너머로 읊어, 때로는 문자로 던지듯.
봄이 오면 마치 계절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그 네 줄을 그에게 보냈다.
나는 아무 설명도 없이 그 싯구를 그냥 보냈고, 나의 절친(切親) 또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알았을 것이다. 이 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라는 걸.
그렇게 봄이 쌓였다.
소동파가 "人生看得幾清明"을 물을 때,
그는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예순네 살이었다.
유배와 환난 속에서도 예순네 해를 살며,
세상의 봄을 수도 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유희이(劉希夷)는 어떠했는가.
그는 삼십도 되기 전에 죽었다.
그가 지은 시 〈대비백두옹〉 한가운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꽃은 비슷하게 피지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다.
젊은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꽃은 돌아오지만 사람은 변한다고.
올해 꽃이 지면 내 얼굴도 변하리니, 내년 꽃이 필 때 나는 여기 있을 것인가?
라고 스스로 물었던 청년이, 정말로 내년 봄을 보지 못했다.
소동파는 예순넷을 살고서야 봄의 횟수를 셌지만, 유희이는 세기도 전에 봄을 잃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두 구절은 천년을 살아남았다.
七十.
공자는 이 나이를 두고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칠십이 되어서도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봄이 오면 여전히 설레고, 꽃이 지면 여전히 서럽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
이제 소동파의 물음이 실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人生看得幾清明."
스무 살에는 이 물음이 관념이었다.
오십에는 예감이었다.
그런데 칠십에는 —
구체적인 숫자가 된다.
실제로 셀 수 있는 숫자가.
청명은 일 년에 한 번 온다.
내게 앞으로 몇 번의 청명이 남아 있을까.
스무 번?
열 번?
다섯 번?
아마 그것도 하늘만 알겠지만,
이제 그 수가 무한하지 않다는 것만은 안다.
그 앎이 슬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앎이 오늘 이 봄을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한다.
동쪽 난간의 한 그루 배꽃을 소동파가 "一株雪(일주설)",
한 그루 눈이라고 불렀을 때의 그 시선 —
봄을 바라보는데 눈이 내리는 것처럼 서늘하고 아득한 그 감각 —
이제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유희이는 꽃이 해마다 피지만 사람은 해마다 달라진다고 했다.
맞다.
나는 어느 봄날, 스무 살 적에 처음 소동파의 시를 읽던 그 청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친구에게 엽서를 보내던 삼십대의 나와도, 이마에 주름이 늘던 오십의 나와도 다르다.
봄은 왔지만, 그 봄을 맞이하는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시(詩)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梨花淡白柳深青" —
그 구절은 스무 살에도, 오십에도, 칠십의 오늘에도 같은 글자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다르게 울린다.
같은 악보를 매번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처럼.
시는 변하지 않는데, 그것을 읽는 내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유희이처럼 일찍 죽지 않는다.
시는 소동파의 봄이 이미 천 년 전에 끝났어도 오늘 이 청명 아침에 다시 피어난다.
시는 나보다 오래 산다.
내가 더 이상 봄을 맞이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이 구절들은 어디선가 또 다른 누군가의 봄 아침에 울릴 것이다.
평생의 벗에게 오늘 또 그 시를 보내야겠다.
아무 설명도 없이. 오십 년을 그래 왔듯이.
그저 네 줄.
惆悵東欄一株雪, 人生看得幾清明.
그가 받고 웃을 것이다. 아니면 잠시 창밖을 볼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
이 시는 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늙어온 시간에 대한 것이라는 걸.
유희이가 노래한 그 무상함 속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같이 봄을 세어왔다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걸.
청명이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차갑고, 어딘가에서 꽃이 피고 있다.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꽃은 비슷하게 피지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다.
올해의 나는, 지난해의 나와 다르다.
아마 내년에 — 만약 내년 청명을 맞게 된다면 —
그 나도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봄은 올 것이다.
배꽃은 흰 눈처럼 필 것이다.
버들개지는 날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그 시를 읊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칠십의 봄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2026년 청명절(淸明節), 봄 아침에
열락군자(悅樂君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