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면서]
논어자로편에 관한 해석은 이미 논어가 경전으로 자리 잡은 이후부터 중국과 우리 나라 그리고 일본을 위시한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 방대하고 또 분량상으로도 상당한 정도의 주석을 겸한 내용이 존재한다.따라서 여기서 행하려는 논어 자로편에 대한 해석은 신고금주를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내에서의 논어의 해석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어떻게 논어가 번역되어 왔고 이러한 번역을 근간으로 동시에 논어가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에 관한 시론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제껏 번역된 논어 번역본중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꼽히는 리카르트 빌헤름의 독일어본을 근간으로 하여 논어의 독일어 번역상의 문제점을 살피어 보았고, 이제껏 나온 영어권에서의 논어 번역본을 아울러 참조 하였으며, 부차적으로 19세기 프랑스예수회 선교사들의 불어, 라틴어 논어 번역본을 참조 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한자 문화권내에서의 논어에 관한 논어에 관한 주(注)를 참조 하였다.
논어 <자로편 3-22편>의 해석의 예
① 한자원문
子曰 南人有言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乘之羞
子曰 不占而已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쪽(남방)사람들의 말에 ` 사람이 일정함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사도 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는데 좋은 말이로다 !(말이다.!) ”그 덕을( 자신의 덕을) 변함없이 지키지 않으면 욕을 당할지 모른다‘는 말도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점을 치지 않고 점치는 것을 그만둔다.(점을 치지 않을 따름이다.)
② 독일어 원문
Der Meister sprah : Die Leute im Suden haben ein Sprichwort, das heisst : Ein Mensch, der nicht bestandig ist , der ist nicht geeignet, um Zauber oder Heilkunst zu betriben Das ist ein wahres (Wort)!
(Im Buch der Wandlungen steht :) Wer nicht bestandig macht seinen Geist, der wird Beschamung empfangen. Der Meister sprah : Man beschaftigt sich nicht mit der Prophezeiung , das ist es .
③불어원문
Le Maitre dit : Les habitants du midi disent communement qu'un homme inconstant ne peut pas meme devenir habile devin ou bon medecin. Cet adage est tres vrai (On lit dans le I king): Celui qui manque de constance, sera la risee des autres. Le Maitre dit < On ne reflechit pas(sur ces paroles), et de la vient tout le mal.</p>
④라틴어원문
Magister ait : Australes homines habent adagium dicens :Homo qui caret constantia , non potest fieri vel hariolus medicusve. Rectum sane(adagium)! (In Mutationum libro legitur) : Qui non constantem facit suam virtutem nonnulli excipient(prosequentur) eum probris. Magister ait Homines non interpretantut , id est, non meditantur illa verba libri I king, et totum est.
【 독일어 해석에 관한 분석 】
① Im Suden
논어원문 <남쪽사람들>에서 <남쪽>의 번역은 독일어로 < im Suden >인데, 영어번역에도 <南人>을 < people of south>또는 < men of south >등으로 번역 하고 있어서 독일어의 번역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만 불어 번역에는 <南人>을 < Les habitants du midi >로 번역하고 있는데, 요즘 현대불어에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남쪽 ,midi>는 원래 남쪽이라는 의미보다는 <정오>또는 <한낮>을 의미했다. <한낮 혹은 중앙>이라는 의미를 가 지니므로 의 의미는 중앙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논어원문에 비추어 볼 때, 공자가 말한 <南人>에서의< 南>은 중국을 하나의 전체로보아서 중앙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공자가 노나라에 살았으므로 노나라보다 남쪽에 위치한 곳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타당 할 것이다. 논어자로편의 라틴어 번역본에는 불어 번역의 에 해당하는 를 쓰지 않고 남쪽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에서 처럼 를 쓰고 있다. 논어 원문 <南人>이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쪽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관한 해석학적 논쟁은 유교문화권에서의 논어주석서 사이에서도 빈번히 볼 수 있다.송나라의 대표적인 주석가 주자(朱子)는 南人이라는 것을 <남쪽지방에 위치한 나라의 사람, 南人, 南國之人>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람을 지칭 할 때,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호칭하는 경우는 논어뿐만이 아니라 논어 이전의 시경(詩經)에서도 <東人>,<西人>과같은 기록을 볼 수 있고 예기(禮記)에도 <殷掌 卜之人>과 같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논어가 기록되기 이전에도 방위(方位)를 기준으로 사람을 호칭하는 관용적 표현이 존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현이나 황소 그리고 주자의 이 부분에 관한 해석을 종합하여 볼 때 단순한 남쪽이상의 해석은 불가능하다.
② nicht bestandig ist
이부분은 <人而無恒>에서 <無恒>부분을 독일어로 옮긴 것이다. 가 한 상태를 지속적으로유지 또는 상태의 완결등을 의미하므로 < nicht bestandig ist>가 어떤 주체의 내적 상태를 지시하게 되면 이러한 동사구의 주어의 주체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품성을 지닌 것으로 해석 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가 주체의 도덕적 품성(인격)의 일관성을 의미하느냐하는 것이다. 단순히 를 도덕적 품성의 일관성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행위의 지속성만을 의미 한다면 우리는 속에서는 도덕적 함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주자는 이부분에 대한 주석에서 <恒>을 < 恒, </p>
常久也>로 파악하고 있다.이러한 해석은 <恒>을 <지금>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상태의 불변으로서의 <常>과 이러한 <동일성>을 미래의 한 시점과 관련하여 <계속 유지 하고 보존하는 의미>로서의 <久>와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는 일정한 상태의 동일성을 지속하거나 이러한 지속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안정감>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독일어의 를 영어권에서는 또는 그리고 등으로 옮기고 있는데 독일어 의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독일어의 번역이 어떤 주체의 지속적인 상태에 주목하여서 번역을 하였는 반면에 영어권에서는 하기위해서 미리 전제되어여 할 주체의 <내면적인 일관성>을 기준으로 해서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가 독일어에서 일관성의 의미이외에 도덕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가하는 문제이다. 리카르트 빌헤름은 논어 자로편의 그다음 단락에서 <不恒其德>을 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부분도 <不恒>과 관련하여 새롭게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
중국학자중에는 <無恒> 곧 를 항심(恒心)이 없음으로 번역함으로써 <恒>을 마음의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논의를 독일어의 번역 에 적용하여 본다면 어떤주체가 하다고 하는 것은 주체의 의식의 문제로 환원해야하는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그 뒤에 나오는 구절“사람이 일관됨이 없으면 의사나 무당도 될 수 없다”거나 “수치를 당한다”는 부분과 정확히 상통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의식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도덕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물론 이 부끄러움의 의미와 함께 사회적 관계의 관점에서는 <불명예>를 의미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의 외연은 확대되어지고 넓어진다. 사회적 관계의 범주에서 비롯되는 <불명예>든지, <내면적인 도덕성>이든지 법률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법이든 지간에, 이러한 반 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불법적인 다양한 양태의 부정성이 <주체의 내면적 심리상태>에서는 으로 현상한다고 해석할 수가 있고 이러한 심리 주체가 다름아닌 심(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③ “ ist nicht geeignet "
이 부분은 논어원문<不可以作>을 독일어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은 < um Zauber oder Heilkunst zu betreiben >과 결합된다. 독일어번역에 충실하게 다시 우리말로 재번역을 하면, <무당이나 의술에 종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로 번역되는데, 이러한 독일어의 번역은 국내에 나와 있는 이 부분에 관하 번역 대부분이 <무당이나 의사도 될 수 없다.>는 내용과 사뭇 다르다. 고대중국의 정현이나 황소는 이 부분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곧 <의사나 무당도 고칠 수 없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다소 무리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배후에는 논어원문속의 <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입장차이가 숨어 있다. 리카르트 빌헤름은 <作>을 <어떠한 직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또는 몰두하는 의미로 해석>해서 < betreiben >으로 옮기고 있다.
은 어원을 에 두고 있는데 은 영어의 < drive >와 어원을 같이 한다. 즉 유목 생황을 했던 풍속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양 따위를 모는 의미에서 몰아대다, 쫒아다니다는 의미로 그리고 접두사 가 붙어서 상태의 지속을 의미하게 되어 직업적인 일에 몰두하거나 종사하는 의미로 의미가 확대 되었다.----<作>을 무당이나 의사가 <된다>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무당의 주술행위나 의사의 치료행위를 <행함>으로 빌헤름은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어-중국어 사전에도 <作>을 < tun, machen >으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作 >앞에 허사(虛辭) 이(以)가 붙어서, 단순히 허사(虛辭) 이(以)없이 <作>이 동사로 쓰일 때 와는 다른 의미를 주고 있다. <以>가 <作>앞에 놓여서 단순한 행위<作>가 아니라 <以>곧 <무엇 무엇으로써> 행한다<作>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作>을 <以作>으로 해석하면 <의사나 무당이되다>의 의미보다는 빌헤름의 번역처럼 <의사나 무당의 일을 하다(betreiben) >의 번역이 논어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될 수 있다.
독일어 번역문 을 우리정서에 맞게 다시 재번역 하면 < 의사나 무당노릇도 할 수 없다>로 옮겨 질 수 있겠다. 여기서 <노릇>은 <以作>에서 <以>를 강조해서 번역하여 본 것이다. 그런데 <以作>을 <노릇>으로 번역해서 직접적으로 의사나 무당이 된다는 의미를 피하고 의술이나 주술행위를 행한다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은 우연히도 주자의 해석과 일치하고 있다. 번역 당시 빌헤름이 주자의 논어집주를 참조 하였는지를 확인 할 수 없지만 주자와 빌헤름은 이 부분의 논어 해석에서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다만 주자는 무당이나 의사를 천한 직업으로 간주하여서 사람이 항상됨이 없으면 천한 무당이나 의사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신분의 의미를 가미하고 있는점이 빌헤름의 번역과 다를 뿐이다. 여기서 한가지 부연하자면 朱子의 주장대로 무당과 의사를 천한 직업으로 과연 간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주례(周禮)의 춘관종백(春官宗伯)에 의하면 고위직인 대인(大人), 복사(卜師), 구인(龜人) , 화씨(華氏) , 점인(占人) , 점몽(占蒙)등의 직제가 있었고 주대(周代)에는 龜卜, 占筮, 蒙占등이 병행되어 점을 치는 일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였다는 점에서 <巫>는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巫>를 周代의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역할을 담당했던 大人,卜師와 같은 공적인 직위를 지녔던 신분과는 별도로 민간에서 길흉을 점쳐주었던 단순한 무속인으로 간주 한다면 <巫>를 천한 신분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周官>에 의하면 <巫>의 직제가 사무(司巫), 중사(中士) 2명이었고 남자무당도 매우 많았고, 여자무당 또한 많아서 師 와 中士라 칭하였다는 기록을 참조하여 볼 때, 巫의 신분이 최소한 士의 신분에 올랐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周官, “ 司巫, 中士二人,男巫無數, 女巫無數, 其師, 中士四人, 是男女皆稱巫也> ----물론 周代의 士라는 신분은 유학적 의미로 채색된 선비와 같은 직위가 아니라 당시 民과 귀족사이의 신분에 처하면서 民을 통치하는 최말단 관료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때 士란 변동이 심해서 다시 民의 신분으로 내려가거나 ,民으로부터 士로 올라오는 동요계층의 하나였다. 송명 시대에 이르러 士는 유교의 경전을 철저히 학습하고 과거시험을 통하여 정치적 역할이 부여된 소위 선비라는 의미의 신분으로 정형화 되기에 이르 른다.
이제껏 살펴본 巫의 신분에 대한 논란에 대해 일본학자 <吉川幸次郞>은 중국에서 송나라이후에 <巫>나 <醫>가 천한 일종의 직업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少なくとも宋以後の中國ては, 一種の賤業てあり . 中國古典選4, 論語 , 古川幸次郞, 朝日文庫, 1990年, 東京>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주자가 <不可以作巫醫>를 <무당이나 의사처럼 천한 노릇도 할 수 없다>고 번역한 내용은 주자가 송나라 때의 사람, 엄밀히 말하면 남송(南宋)때의 사람이므로 巫와 醫를 孔子 당시 때의 신분과는 달리 천업(賤業)으로 간주하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醫>경우도 周官에 의하면 상사(上士) 직위의 의사(醫師)가 두명, 하사(下士) 직위의 醫師가 두명이었고 ,또 역할을 달리하는 식사(食師) ,질사(疾師) , 양사(瘍師)가 각기 있었는데
食師는 中士두명이 있었고, 疾師는 中士로서 여덟 명이 있었으며, 양사(瘍이라는 漢字上으로 볼 때, 종기치료를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는 下士직위로서 여덞명을 두었다는 기록을 확인 할 수 있으므로 <醫> 또한 <巫>와마찬가지로 최소한 士의 신분을 유지 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周官, “ 醫師, 上士二人, 下士二人, 食師, 中士二人, 疾醫, 中士 八人, 瘍師, 下士八人 ”>
중국고대에는 무당과 의사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無醫>를 한사람으로 간주하여 번역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無醫>의 영어번역으로 < a wizard-doctor >를 택함으로서 의사와 무당이 한사람임을 지칭하는 번역을 볼 수 있는데 이렇듯 무당과 의사를 한사람으로 간주 할 수 있는 근거는 <廣雅釋?>에서 <巫. 醫也>라고 언급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두 사람으로 간주하더라도 무당은 으로 단순히 번역하고 의사를 의사(doctor)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주술적인 치료행위를 겸하고 있다는 측면을 고려 하여서 번역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巫醫>를 단일한 한사람으로 간주 하지 않고 별개의 두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해석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주자(朱子)와 다산(茶山)정약용선생도 후자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巫>의 성별을 구분하여 영어번역에서는 로 번역해서 <巫>가 남성임을 표시하기도 하고 혹은 로 번역함으로써 <巫>가 여성임을 가리키고도 있는데, 이러한 <巫>에 관한 성별구분은 남자무당을 격<覡>이라고 칭하고 여자무당을 <巫>라고 칭하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과 함께 통칭하여 남녀모두 <巫>라는 지칭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巫>는 남녀모두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Brooks가 <巫>를 성별의 관계없이 로 옮긴 영어번역은 적확한 번역이라고 할만하다.
불어번역은 <巫醫>를 능력 있는 무당< habile devin>과 훌륭한 의사로 번역하고 있는데, 과 < bon>은 논어 원문과 대조하여 볼 때 임의로 불어번역자에 의하여 추가된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④ wer nicht bestandig macht seinen Geist.
이 부분은 <不恒其德>을 독일어로 옮긴 것이다. 빌헤름은 <不恒>을 < nicht bestandig macht>으로 옮기였고 <其>를 와 연관지어 지시대명사 으로 옮기고 있으며 아울러 <德>을 로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영어권에서의 번역 이를테면 또는 < if you do not stabilize an act of virture > 그리고 등의 번역과 비교하여 볼 때 독일어의 가 <덕>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의미상응이 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德>의 영어번역은 이미 살펴본 본대로 일반적으로 로 옮겨지고 있는데, 영어에서 virtue는 근면,성실,인내와 같은 미덕을 의미하고 여성에게 라는 표현을 쓸 때는 대부분 “정절이 깊은”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유교적 덕목인 <德>을 온전히 그 의미를 살려서 옮기고 있다고 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德은 이러한 성실 인내와 같은 개인적인 뛰어남 이외에도 타자에대한 배려와 같은 타자관계성의 관점에서의 너그러움이라든지 관대함 또는 관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로 <德>을 표현하기에는 합치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Waley는 <德>은 도덕적 힘 , 곧 moral force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헀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참고 할만하다. 본래적인 의미에서 논어 원전속의 <德>은 단순한 도덕성정도의 의미가 아니고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품성으로 획득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學>--- 영미권 혹은 유럽어에서 이러한 배움<學>을 번역 할 때 영어의 독일어 으로 번역하지만 이 양자의 번역이 모두 몸으로 직접 부딪혀서 안다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지만 이러한 영어와 독일어의 번역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인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가정하고 있다.
學은 보편과 개별 또는 특수와 보편이라는 범주적 혹은 개념적 인식에 한정되지 않는다.물론 學이 개념적 인식을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학은 단순한 개념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 배움의 주체에게 자기완성(행위능력)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자 목적인 것이다. 배움<學>을 통한 행위능력의 완성은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성이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보면 禮이다. 따라서 學이 극히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 도덕적 완성을 향한 시발점이 되지만 그 외연은 단순한 주관적인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적극적인 관계 곧 禮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學을 중심으로 유교에서는 주관적인 도덕성을 사회 철학적인 범주인 시민사회까지 잘못 확대하였다는 서구철학자들의 비판을 목격하게 되는데, 일면 타당한 지적이지만 만약 시민사회가 개인의 주체적이고 내면적인 도덕성을 담보할 수 없다면 시민사회의 당위성은 존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주관적인 측면으로서의 <도덕성>과 객관적인 측면으로서의 <禮>는 서로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생을 총괄 하는 삶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도덕<德>을 정치화< politicization of morality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 moralization of politics>하려 한 것이다. ---- 그리고 그 배운 바를 끊임없이 익혀서 <時習> 자신의 심중에 획득되고 체득된 것이 <德>이다. 德이 고대중국에서는 得과 동의어로 쓰였음으로 德의 의미가 得과 같이 획득하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德은 공자에 의하여 은나라의 주술적인 문화로부터 인간학적인 또는 인문학적인 길을 여는 과정에서 새롭게 규정된 개념이라고 할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영어의 번역이 德을 또는 < moral force> 번역하고 있지만 德은 단순한 주관적인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그 외연을 서양 철학적인 측면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의 범주로 까지 확대되어 있음을 고려 할 때, 영어권의 번역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여기서 한계는 번역상의 오점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로 편에 나오는 <不恒其德>이라는 표현은 공자 자신의 언설이 아니라 <주역 항괘 9-3에 대한 효사(爻辭)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논어 자로 편에서 빌헤름은 이미 살피어 본 바대로 <不恒其德>을 로 옮기면서도 동일한 <불항기덕>을 주역의 항괘(恒卦) 9-3의 효사(爻辭)번역에서는 < Wer seinem Charakter nicht Dauer gibt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효사의 번역은 비교적 주역원문의 내용과 가장 근접한 번역으로 여겨진다. 자로편의 를 주역에서는 다소 문어적 표현인 < Dauer gibt >로 옮기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이 부분의 영어번역 < not being constant in virtue >에서처럼 德의 직역에 해당하는 독일어의 를 쓰지 않고 빌헤름은 번역에 자신의 이해를 덧붙혀 로 옮기고 있다. 논어 원전속의 德은 빌헤름에 의해서 다양한 표현으로 독일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 예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君子德風>12.19.1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 das Wesen des Herrschers ist der Wind >
(2)<君子懷德小人懷土>4.11.1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편히 머물 곳을 생각한다.
< der Edle liebt den inneren Wert , der Gemeine liebt das Irdische >
(3)<道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2.3.2 “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 워 할 줄도 알고 또한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4)<小人之德草>12.19.1 “ 소인의 덕은 풀이다.”
< das Wesen der Geringen ist Gras>
(5)<子曰爲政以德>2.1.1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
< der Meister sprach : Wer kraft seines Wesens herrscht >
(6)<德不孤必有隣>4.25.1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7)<驥不稱其力稱其德也>14.35.1 “ 천리마[ 또는 좋은말 驥(천리마 기; 馬-총27획; ji)]는 그 힘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일컫는 것이다”--여기서 덕은 잘 조련되었다는 뜻을 의미한다<글쓴이의 註>.
< An einem Ross schatzt man nicht die Starke, sondern die Rasse >
(8)<主忠信徒義崇德也>12.10.1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하고 도의를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 덕을 숭상하는 것이다.”
(9)<中庸之爲德也>6.27.1 “중용의 덕은 지극하도다”
(10)<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8.1.1 “ 태백은 지극한 덕을 지닌 분이라 할 수 있다.”
(11)<天生德於予>7.22.1 “ 하늘이 나에게 덕을 부여해 주셨는데 ”
(12)<民無德而稱焉>16.12.1 “백성들중에 그의 덕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
(13)<有德者必有言>14.5.1 “ 덕이 있는 사람은 바른 말을 하지만 ”
(14)<君子裁若人尙德裁若人>14.6.1 “군자로구나 그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그 사람은”
(15)<子曰道聽而途說德之棄也>17.14.1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길에서 듣고서 그것을 그대로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
(16)<何德之衰>18.5.1 “ 어찌 그리 덕이 쇠미해졌는가 ”
(17)<鄕原德之賊也>17.13.1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로다.”
--- 鄕原은 향원(鄕愿)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에서 성실한 척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을에 서 시류나 시세에 영합하면서도 점잖고 성실한 듯이 보이는 사람으로 처세하여 순박한 마을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공자는 이러한 향원들이 위선적인 태도 를 비판하고 있다.---<글쓴이註>
< Jene ehrbaren Leute im Lande sind Rauber der Tugend >
(18)<德行顔淵閔子騫>11.2.2 “덕행으로 모범이 된 사람으로는 안연, 민자건,.....”
(19)<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7.3.1 “ 덕을 닦지 못하는 것,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 Der Meister sprach : Dass Anlagen nicht gepflegt werden,dass Gelernte nicht besprochen wird , dass man seine Pflicht kennt und nicht davon angezogen wird, dass man Ungutes an sich hat und nicht imstande ist es zu bessern : das sind Dinge, die mir Schmerz machen>
위에서 열거한 德에 관한 용례 19가지는 논어원전 속에서, 德이 문장으로 들어가 있는 모든 부분을 발췌하여 본 것이다. 위에서 발췌한 총 19번의 <德>의 용례를 빌헤름이 독일어로 옮긴 단어의 사용 빈도수에 맞추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Wesen 】5회 , 【 innerer Wert 】2회 ,【 Rasse 】1회, 【 Tugend 】2회,【 Geist 】4
회,【 Anlage】 2회,【 Granz 】1회,【 ethisch hochstehend 】1회,【 Eigenschaft 】1 회
[ 1 ] 德을 “Wesen"으로 번역한 경우 빌헤름은 논어 <12.19.1>, <2.3.2>, <12.19.1>,<2.1.1>,<12.10.1>에서 德을 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논어 위정편<2.1.1>을 번역하면서,“ 일반적으로 중국글자 <德, de>이 독일어의 으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보다 광의의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중국의 주석서에 의하면 [德은 실재들이 생기(生起)하기 위하여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이며, 이것은 한 개인으로부터 발휘되는 능력과 인격(사람됨)의 모든 본성을 포괄한다”라는 주석을 붙이면서 암묵적으로 <爲政以德>의 德을 으로 옮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빌헤름의 주석과 관련지어 을 해석하자면 뒤에는 가 부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君子의 德은 군자의 인품이나 인격으로부터 비롯되는 능력을 가리키게 된다. 군자의 이와 같은 능력은 다양한 인간학적관계 범주에서 발휘되는데, 현대중국어에서 德(de)이 ,,를 의미하는 것처럼, 군자의 능력은 각각 층차적으로 의 영역에서 그리고 < Moral>과 < Sittlichkeit >의 영역에서 발양 된다. 논어 위정편2.1.1<爲政以德>에서 <爲政>의 주체는 논어원문 상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정치행위의 주체는 소인(小人)이 아니라 君子인 것은 분명하다, 논어 안연<顔淵>편12.19.1에서 빌헤름은 君子를 로 옮기고 있는데, 여기서 君子는 단순한 <덕성스러운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 번역어가 의미하듯이<정치의 담당자>를 가리키고 있다. 군자의 정치적 측면에서의 君子의 능력은 정치의 영역에서 바람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러한 君子에 대한 번역은 논어 리인<里仁>편 4.11.1에서 君子를 로 번역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리인<里仁>편4.11.1의 君子에 대한 번역 은 위정<爲政>편2.11과 안연<顔淵>12.19.1편에서의 君子에 대한 번역과는 다르게 도덕적 품성의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군자에 대한 서술관점이 정치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도덕성에 있는 것이라면 이때의 德은 위정 편에서의 이 아니라 君子가 내면에 간직한 능력을 표현할 수 있는 독일어번역어로 옮겨져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빌헤름은 리인<里仁>4.11.1편에서 德을 로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