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독재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물리적으로 해당 국민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와 같은 독재 권력을 지켜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그 중의 하나는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만 오로지 충성할 수 있는 친위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친위대는 정보국의 역할도 하면서 내부 사정까지도 통제했는데 정적 암살과 요인 제거, 그리고 시민들에 대한 통제, 시민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프로파간다까지 담당했다. 이들은 독재자의 친위대이기도 하지만 정보국, 혹은 비밀경찰의 역할도 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게는 게슈타포와 SS 친위대가 있었고 소련에는 엔카베데 및 KGB가 있었다. 그리고 루마니아에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세큐리다테(Securitatea)가 존재했다. 세큐리다테는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정권이 설립한 정치 경찰 및 공작원들로 정식 명칭은 국가보안부(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 소속의 특수경찰이었다. 세큐리다테 자체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 때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다. 이들은 1948년 8월 30일 설립되었고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독재 정권이 창설한 특수 경찰이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 대통령이 세큐리다테(Securitatea)를 사열하고 있는 모습, 출처 : The Guardian
말 그대로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인데 이들이 차우셰스쿠 때 유명해진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이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우데지 정권 때는 루마니아의 대내외 정보들을 취합하고 비밀리에 행동까지 개시하는 루마니아의 CIA와 같은 역할만을 부여했다면 차우셰스쿠 정권 때는 정적 암살과 요인 제거, 그리고 시민들에 대한 통제 및 불안 조성을 주도한 자들 사이에 끼어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전문 프락치 역할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프로파간다도 만들어 차우셰스쿠를 신화적으로 미화하고 그가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게끔 각종 공작까지 자행하는 "전문 하수인" 역할까지 담당하여 활동범위를 넓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 경찰 세큐리다테는 소련이 루마니아를 장악했을 당시 스탈린의 사보타주인 NKVD (후의 KGB)의 지도하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공산주의 정권의 비밀경찰인 것이다. 루마니아의 국가보안부는 보나렌코(P. Bonarenko), 니콜스키(A. Nikolski) 등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소련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엔카베데의 모든 것을 세큐리다테에 주입하고 이들을 훈련시켰다.
세큐리다테의 훈련과정은 엔카베데의 훈련 과정 못지 않게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이들은 공산정권을 지키고 서구 자유 민주주의로부터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공산정권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세쿠리타테의 훈련은 정보 유지 및 획득, 선전선동, 프락치, 요인 암살과 깨끗한 처리 과정, 심지어는 고문 기술까지 습득했다고 한다. 루마니아 국민들은 전부 종합하여 '세규리타테'라고 불렀지만, 엄밀히 그 조직은 세부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국무부 (Ministerul Afacerilor Interne; M.A.I.) 산하의 6개 조직 가운데 '세쿠리타테'가 3개 있는데 ① 보안군(Trupe de Securitate), ②보안국(Organe de Securitate), ③소방국(Pompieri), ④국가정보국(Arhivele Statului), ⑤경찰국(Miliția), ⑥국방국(Ministerul Apărării Naționale)이 존재하며 보안군과 보안국, 국가정보국이 이를 관할했으며 이들은 경찰국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들 세큐리다테는 게오르기우데지 정권까지만 해도 가장 정상적이고 신체 건강하며 어느 정도 학벌과 지식을 갖춘 비교적 상식적인 인물들로 뽑았지만 차우셰스쿠 정권 때는 주로 전쟁 고아들을 징집했다. 세큐리다테 중 루마니아의 보안군은 루마니아 노동당, 공산당을 수호하는 당군으로서, 국방국 소속의 군인과는 다른 군복을 착용하는 별도의 조직으로 나타났고 일반 군인들보다는 더 많은 임금을 받았다.
주로 세큐리타테로 불리는 것은 2번의 보안국 소속으로 국가에서 각종 특혜를 받았으며, 집과 상점을 특별히 배정받기도 했다. 임금도 6개의 기관 가운데 가장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아 차우셰스쿠 가 심혈을 기울여 이들을 육성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으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루마니아의 경제 환경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기를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고아가 되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세쿠리타테에 등용되어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받은 다음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는 심복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세뇌가 아니더라도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는 심복이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루마니아의 어지간한 정규군보다 대우가 좋았다고 하지만 그만큼 훈련 과정도 혹독했다. 차우셰스쿠는 이들 고아들을 모아 그의 이름을 딴 니콜라에 고아원이라 붙였는데 이 고아원에 입양된 3세 아이는 울지도, 말하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신체발달이 정상 아이의 3~10% 수준으로 운동과 정신 기능들이 많이 지체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사람이 다가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한 두 가지 행동만 반복했다.
이들은 영구적인 애착장애(Attach- ment disorder)가 있다고 판단되었는데, 이런 상태로 자라난 아이들 중 일부는 세큐리타테가 되었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고 사이코패스와 같은 잔인함을 겸비했으며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세큐리타테는 이와 같이 아동기의 학대와 세뇌 교육으로 인해 매우 잔혹한 면모로 성장했던 것이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기자였던 클레어 홀링워스는 루마니아를 취재하러 갔을 때, 집에 세큐리타테가 체포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목욕 중이라서 옷을 벗고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말한 뒤, 지인에게 도움을 청해 위기를 모면했다 했을 정도이며 차우셰스쿠의 딸이었던 조이아 차우셰스쿠는 BBC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한 취재 중 인터뷰에서 어머니인 엘레나 차우셰스쿠가 세큐리다테에게 미래의 세큐리다테인 고아들을 훈련시키고 감시하라는 명령까지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세큐리타테의 세력은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1985년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는 2,200만 명이었으나, 국가보안부 요원의 수는 무려 1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50만 명 이상의 정보원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반 시민 사이에 끼어 각종 프락치 역할과 더불어 차우셰스쿠에 대한 선전 선동에 앞장 섰다.
세큐리타테는 루마니아 전국에 1,100여 개의 도청센터와 320만 개 이상의 도청기를 설치하여 국민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탄압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세큐리다테도 조직 자체는 차우셰스쿠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는데 그 몰락과 해체 과정도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89년 12월 17일, 차우셰스쿠의 실정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루마니아 인들이 티미쇼아라 지방을 시작으로 혁명을 일으키자, 세큐리타테는 모든 국민들이 차우셰스쿠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차우셰스쿠에 충성을 바쳤다. 루마니아의 정규군은 평소 세쿠리타테에게 대단한 차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보안군 만을 편애하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낮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2월 22일 차우셰스쿠에게 강경 시위 진압을 명령 받은 국방 장관 바실레 밀레아(Vasile Milea)가 이와 같은 강경 진압의 명령을 듣지 않자 의문사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군인들과 장교들은 이 사건이 세큐리다테에 의한 살해가 아닐까 의심하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다음 국방 장관으로 차우셰스쿠가 임명한 빅토르 스탄쿨레스쿠(Victor Stănculescu)는 이와 같은 시민들의 움직임과 대세를 판단하여 전 군대에게 비밀리에 차우셰스쿠 정권에 협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그를 속이기 위해 병사들에게 휴가 중인 병사들은 병영에 복귀하라는 내용 등을 지시하며 시간을 끌었고, 이어 루마니아의 정규군은 차우셰스쿠를 버리고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시위대에 가담한 정규군은 여전히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면서 시민들을 공격하는 세큐리타테와 교전을 벌인다.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 역시 정규군에 협력하여 세큐리타테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국민들과 정규군이 하나가 된 압도적인 혁명 앞에서 세큐리타테도 중과부적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12월 22일에는 루마니아 구국 전선이 방송국과 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면서 세큐리타테는 중앙 위원회 건물을 보호하는 것도 포기하여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잔존 요새들에 의존하여 혁명 세력 휘하 정규군과 교전을 벌였다. 12월 23일 루마니아 구국 전선은 모든 루마니아 국민, 군과 정부가 반(反) 차우셰스쿠 전선에 동참했다고 발표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는 세큐리타테에게는 투항을 권고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에 충성을 버리지 않는 세큐리타테들은 정규군과 시민을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구국 전선은 시민들에게 셰큐리타테 토벌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구국 전선 지휘 본부에 세큐리다테에 대한 위치를 신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12월 24일, 헬리콥터를 타려던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 조종사 바실레 말루찬 중령이 도주했기 때문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육로로 도주하다가 시민들에게 신고되어 혁명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세큐리타테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 세력은 차우셰스쿠의 처형하여 승패를 확실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이는 세큐리타테에게 차우셰스쿠가 구출되어 그가 저항의 구심점이 된다면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에서 내전으로 변질되고 장기화 될 우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2월 25일, 군사 재판의 결과로 인해 차우셰스쿠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국민전선은 수백발의 총탄을 맞아 죽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영상을 TV로 몇 번이나 반복하여 방송했는데, 이는 세큐리타테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책략이었다. 이와 같이 동구권 공산주의의 붕괴에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크게 나타나는데,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석학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이를 두고 비디오크러시(Videocracy)에 의한 독재체제의 붕괴라고 명명하고 있다. 각지에서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세큐리타테의 요원들은 전사하거나 자결하는 경우도 빈발했다. 결국 세큐리다테는 몇몇 기지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정규군에게 토벌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보안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던 자들이 많았고 정보국 출신답게 해외 정보에 밝았기 때문에 기업가로 변신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이들은 이후 극우 정당에 투신하여 루마니아 정계에 입당하게 되면서 "차우셰스쿠의 아이들" 중 가장 출세한 인물들이 되었다. 물론 극좌 공산당 출신들이 극우로 전향하는건 흔한 일이지만 최근에 불고 있는 "차우셰스쿠의 재평가"는 여전히 차우셰스쿠에 대해 충성도가 남아 있는 이들이 현 정권과 그로 인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차우셰스쿠에 대한 추모를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