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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발트 3국의 독립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6-22 22:21:40

소련은 1939년 나치 독일과 비밀리에 불가침 협약을 맺고, 발트해 연안 독립국가들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진입하여 1940년 연방 산하의 새로운 공화국들로 흡수했다.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해 나눠 가졌다. 이후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독일은 발트 3국을 장악했다. 당시 나치 치하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희생자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하지만 1944년 소련이 다시 발트 지역을 지배했을 때에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소련은 대규모 강제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발트 해 연안에서 수십만 명을 강제수용소나 시베리아의 집단 농장,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추방했다. 그로부터 44년 동안 소련에서 각기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워 소비에트 최고 회의를 중심으로 통제했다.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가 소련에 강제 병합되던 당시, 괴뢰 의회인 '인민 사에이마'(Tautas Saeima) 의원들이 리가(Rīga)의 국립 극장 발코니에서 군중의 행진을 환영하는 역사적 순간, 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로부터 1988년 5월 14일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 앞에서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에스토니아의 애국심을 표현하는 노래가 다수 연주되었다. 페스티벌에 참가한 에스토니아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6월에 탈린에서 열린 축제에서는 축제에 모인 사람들이 탈린 시내에서 자발적으로 이러한 노래들을 불렀다. 1991년 8월 20일에는 에스토니아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에 집결했는데, 수도 탈린에 전체 에스토니아 인구의 1/5 이상인 30만 명 가까운 수가 모였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수많은 뮤직 페스티벌이 있는데, 9월에는 이러한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에스토니아 독립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노래 혁명이라 불린다. 이는 소련 치하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1986년부터 1991년에 걸쳐 소련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어간 일련의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일컫는 말이다. 독립의 주요 계기가 된 1988년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laulupidu)에서 차용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사유디스(Sąjūdis)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 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공산당 간부들을 전부 사퇴시키고 1988년 11월에 리투아니아 국기와 국가를 합법화시켰다. 이들은 더 나아가 리투아니아어를 리투아니아 유일의 국어로 선포하고 각종 국가 상징들을 발트 3국 점령 이전 시절로 되돌려 나갔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소련의 해체와 연관성이 깊지만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다른 소련 내 구성국에 비해 독립 열기가 강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다른 구성국들이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한 반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소련이 존속했던 1990년부터 이미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 해체 직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각 국가들에서 수많은 독립 요구 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발트 3국 민족들은 독립을 부르짖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가장 빠르게 민족주의자들이 진출한 에스토니아 소비에트는 1988년 11월에 주권 선언을 발표해 점진적으로 소련에서 독립해나가려 했고,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1990년부터 민족주의자들이 현지 소비에트에 진출해 소련으로부터 독립해나가는 절차를 밟았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는 3국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5월 4일에는 라트비아, 5월 8일에는 에스토니아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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