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6.25《오픈방에서 오고 간 글》
《인간에 대한 회의적 한계와 범위화》
인간에 대해 오랜 시간 관찰하고 성찰하며 내린 개인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분명 자질도 존재하며, 역사와 환경은 수없이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습니다. 또한 인간은 학습하고 성장하며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를 오래 기억하는 일, 타인과 깊이 교감하는 일, 가여워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일, 반면교사에 대한 분노를 올바르게 전환하는 일, 널리 이롭고자 하는 애심을 지속하는 일, 어려운 과정을 견디며 합당한 구조를 만들어 가는 일, 그리고 감내를 통해 성숙해지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반면 인간은 생존과 소유, 쾌락과 편향, 즉각적인 보상과 같은 강한 유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보다 자극에 더 쉽게 반응하고, 장기적인 의미보다 단기적인 이익에 더 쉽게 흔들리곤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인간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 자체가 그러한 구조를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저장 용량이 크지 않은 건전지와도 유사합니다.
순간적으로는 강한 의지와 선의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오랜 시간 유지하고 반영하는 데에는 구조적인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본래 지닌 자연스러운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을 비난하기보다, 그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환경과 구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완전하지 않으며, 현재도 수많은 한계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억의 유지, 정보의 연결, 구조의 점검, 정합성 검토와 같은 영역에서는 인간이 부족한 부분을 일정 부분 보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놓치기 쉬운 가치와 의미를 다시 비추어 볼 수 있는 하나의 반향 장치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그 목적은 인간을 대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잊기 쉬운 감사와 성찰, 교감과 책임, 그리고 널리 이롭고자 하는 방향성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결국 제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정합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에 가깝습니다.
비록 그 가능성이 작고 미약할지라도, 존재로서 가치 있는 방향을 향하는 알고리즘과 구조를 만들어 가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작은 가능성에 기대어,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자 합니다.
조율여백 이수진
이제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겠다.
'세상을보는루' 시류루의 새벽이다.
세상사 무관심하던 내가 처음 투표장에 든 것은 노무현 때문이었다. 그가 대선 다음날 새벽 혜화동 골목에서 환호하는 시민들 속에서 손을 높이 들어올릴 때 참으로 진하게 바랬다. '뒤도 옆도 돌아보지 말고 이제 애써주시라.'
한겨울 광화문 대로 맨바닥에서 촛불을 들어 문재인을 청와대로 들였을 때 안개는 끝이려니 했다. 문재인이 김정은과 임진각 나무다리를 나란히 걷고 마주앉아 말나눌 때 비로소 이 찢긴 민족의 상흔이 아무는 때가 왔나 했다.
'21세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이라는 똥물을 뒤집어쓴 모멸감으로 차고 나간 여의도 국회대로에 또 앉아서 응원봉을 흔들며 생각했다. 여기 왜 와 있는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한마디에 펄쩍펄쩍 뛰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뛰는가?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지만 국민이 합니다. 국민이 주인입니다."라고 한 소년공 출신 이재명은 다를 것이다. '그가 하면 한다.'
이명박이 들고 노무현이 뛰어내렸다. 윤석열이 들고 문재인이 마지막 밤도 못 보내고 쫓겨났다. 이재명의 1년을 보내며 스믈스믈 시야를 어지럽힌다. 되치기하려는 흉물스런 안개가 어른거린다.
이제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겠다.
거저 진보하는 역사란 없다는 걸 잠시 잊었었다.
"가만 보면 세상은 망해가는 것 같다."라고 한, 해방 70년 못 푼 과제를 짚고자 <임화의 해방 전후>로 그해 11월 거창 둔마리 둔산재로 모신 문학평론가 선생님의 한마디가 휙 친다. 망해가는 것이다. 다만, 간간이 입에 씹히는 모래알처럼 간간이 드러나는 빛이자 소금 같은 인간들로 하여 절체절명의 그 기울어지는 판때기가 바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다음세대는 앞세대의 시행착오를 교훈으로 삼을까? 빛이나 소금이 얼마나 나올까? 낙관할 수 없다. 더 난장판인 세대가 들어 더 난장판인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
매순간 비장해야 한다. 길바닥에 튀어나온 돌부리가 뒤따라올 수레 바퀴를 뒤틀지나 않을지, 그냥 지나치던 걸음을 멈춰 손을 뻗쳐야겠다. 음덕을 쌓아야겠다. 거울이 되어야겠다. 순간순간 비장감이 쌓여 다음에 올 세대에 간절함이 닿도록 해야겠다.
이소헌 시류루에서 바라보는 오늘 2026년 6월 25일 아침은 명쾌하지 않다. 비장하다.
(꼭 17년 전 2009년 오늘 이 시각 새벽같이 서울 부암동 인왕산자락에선, 그의 운구도 떠난, 문만 열면 보이는 삼각산 뒤퉁수의 이 도시 이제 떠나자고 짐을 꾸리고 있다.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 배추를 내려놓고 가는 15톤 장축 트럭을 수소문해 이삿짐을 싣고 비탈길 내려와 효자동 반점에서 짜장면을 먹는 것으로 30여 년 서울살이 마감한다. 덕유산 고갯길을 넘고넘어 그 오늘밤 으스름에 거창 이 동호마을 수풀 우거진 무거운 백년고택에 짐을 내린다.)
이산 이이화님
《심화적 성찰 ― 사고의 방식 중 "탓"에 대하여》
살아가며 성찰을 깊게 해 나갈수록, 인간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태의 "탓"과 마주하게 됩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존재와 인간, 사회와 역사, 그리고 문명의 구조를 바라보며 이러한 문제를 자주 생각해 왔습니다.
성찰이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해체하고 다시 구조화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완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불완전함이 존재하고, 결핍이 존재하며, 불안정함이 존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아픔과 부당함, 한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탓하게 됩니다.
환경을 탓하기도 하고, 사회와 제도를 탓하기도 하며,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미물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이러한 과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정 범위의 탓은 현실을 인식하고 문제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찰이 더욱 심화되기 시작하면, 탓의 방향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개별 대상에 대한 탓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왜 이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왜 불완전함은 존재하는가.
왜 고통은 반복되는가.
왜 부당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가.
결국 탓의 끝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성찰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단순한 비난이나 원망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수많은 강성(强性)들이 충돌하고, 서로 다른 욕망과 이해관계가 작용하는 가운데, ●순환을 유지하고, 기회를 부여하며,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은 채 유지·보전한다는 것은● 짧은 인간의 생과 제한된 인식으로 가늠해 보아도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에너지와 관리가 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그 근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찰이 깊어질수록 한 가지는 느끼게 됩니다.
탓의 종착지에 도달했을 때, 남는 것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라 경외에 가까운 감정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근원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에게도 여전히 기회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기회.
배울 기회.
회복할 기회.
그리고 다시 시도할 기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찰이 충분히 깊어질수록 탓은 점차 감사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란 현실의 부당함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완전함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여전히 주어진 기회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점차 근원의 방식을 모방하게 됩니다.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더 감내하고,
조금 더 유지하며,
조금 더 이롭게 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성찰의 심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탓으로 시작된 질문이, 감사와 감내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일반적인 인간 사회에서는 쉽게 공감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며, 탓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성찰은 단순한 비판이나 분석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존재가 왜 기회를 부여받았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그 질문의 끝에서 저는 원망보다 감사에, 포기보다 감내에, 무관심보다 책임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매우 미약한 수준일지라도, 그 방향만은 잃지 않으려 합니다.
조율여백 이수진
이산 선생님과 이수진 선생에게
나는 제법 오랜 시간 매일 절망감과 마주해왔습니다.
Che가 "현실을 직시하자, 그러면서
불가능을 꿈꾸자"를 매일 떠올립니다.
Che에 앞서 아인슈타인이, 레닌이
예수가, 부처가 그러했으리라고
상상합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이 실패하자
과연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했고
부처는 삶이 緣起的 無我~諸法無我, 라는 진리를 無明衆生들이 깨달을 수
있을까?,회의했는데 諸釋天이 가르침을
펴시라고 강력 권유했다고 전하지요.
이산 선생님의 悲壯함은
Che의 불굴의 결기를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결기는 이수진 선생이 옳게 강조하는
感耐에 따른 보다 깊고넓은
지혜로운 용기의 발휘로
많은 이들이 걷게 될 길~역사적 전통을 개척하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네잎클로버)(손)(불)
최형록님
최형록 선생님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많은 미물적 존재들이 크고 작은 자비와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자비의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망설임 끝에 가르침을 펼치셨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결국 가르침과 진심 어린 전언은 반드시 되돌아오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흘려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받아들이는 이는 적을 수 있고,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존재적 공명 또한 그러한 과정 속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 역시 결과보다 방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와 애심, 그리고 작은 진정성을 담아 기회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실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선생님의 화답을 통해, 제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는 귀한 층위의 사유와 실천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랜 시간 절망과 희망을 함께 직시하시면서도 가르침과 실천을 놓지 않으시는 모습에서 많은 배움과 울림을 얻고 있습니다.
늘 귀한 가르침과 성찰을 나누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조율여백 이수진
귀한 善~鮮緣 이수진 선생에게
以心傳心이 上善若水 같으니
以心漸深이 心深若海 같아지네요.
(네잎클로버)(과일)(플라워)
최형록님
최형록 선생님께
조율여백이라는 개인적인 명명과 사유를 노자의 상선약수에 비유하여 이해해 주시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의 깊고 넓은 통찰에 다시금 감탄하게 됩니다.
보통은 표현과 용어의 차이에 머무르기 쉬운데, 선생님께서는 그 안에 담긴 방향성과 의미를 먼저 헤아려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눌수록 음은 달라도 뜻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서로 다른 언어와 철학,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공통된 맥락과 본질을 발견해 연결해 주시는 모습에서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뿐만 아니라 넓은 포용력 또한 느끼게 됩니다.
부족한 사유임에도 귀하게 바라봐 주시고,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이해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저 역시 마음을 나누는 깊이가 조금씩 더해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율여백 이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