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만 왕조의 투르크계 군사령관 중 한 명인 알프테킨(Alptegin)은 맘루크 노예 출신으로 가즈나 지역을 중심으로 가즈나 왕국(977~1086)을 건국했다. 알프테킨의 선조는 사르 위구르인으로 부친인 알칸트(Alkand)는 위구르 제국이 멸망한 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인 사마르칸트로 내려와 소그드 상인인 무크 마할리(Muk Makhali)의 딸과 결혼하여 알프테킨을 낳았다. 그러나 알칸트가 카라한 군의 기습을 당해 살해되자 그는 카라한 군과 전투를 벌이며 살아남았고 사만 왕조로 들어가 군대에 입대하여 말단 노예병부터 시작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군사령관의 직위에 올랐다.

사만 왕조의 수도인 이란 시라즈,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이에 사만 왕조의 샤인 수부크티킨(Subuktigin)은 알프테킨의 능력을 보고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일개 말단 노예병에서부터 시작하여 일국의 왕의 양자가 되는 일약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알프테킨을 너무 총애한 나머지 수부크티킨 왕은 그에게 군대의 반을 주고 호라산을 지배하는 총독까지 임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알프테킨은 호라산을 거점으로 하여 자신의 지역적,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게 된다. 알프테킨은 호라산에서 발흐, 헤라트 등지로 이동해 사만 왕조에게서 독립해 가즈나 왕조를 세운 다음 카라한 왕조를 쳐서 카불과 그 인근을 함락하고 부친의 원수를 갚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 10여 차례에 걸쳐 카라한 왕조를 원정하여 전리품을 획득하고 기술자를 포로로 하였으며, 이들로 하여금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전 지역에 걸쳐 궁전과 모스크 등을 건립하게 하였다. 알프테킨 시대의 가즈나 왕국의 영역은 동쪽은 펀자브의 라호르에 이르렀고 북쪽은 사마르칸드와 브라하, 서쪽은 라이, 이스파한까지 확장하면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알프테킨의 사후 그의 사위인 세북테킨(Sebuktegin)이 권력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의 보호 정책으로 인해 가즈나 궁전에는 학자들과 문학자, 과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가즈나 왕국를 문화적으로도 융성하게 했다. 세북테킨은 정복전쟁에도 일가견이 있었기에 페르시아 전 지역과 멀리 압바스 칼리프 왕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투르크멘족과 소그드인들이 세북테킨에게 복종했다.
이후 그의 아들인 마흐무트가 권력을 장악하니 그는 가즈나 왕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한 왕이 되었다. 마흐무트는 사만 왕조를 붕괴시키고 카라한 왕조와 함께 사만 왕조의 모든 영토를 분할하여 가지게 된다. 그는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투르크인이 되었으며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양성했으며 이슬람 신학을 받아들여 학문과 과학을 융성하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마흐메트 제위 시대 당시 주변 국가들이 내부 혼란에 들어가 있어 국력이 쇠퇴해졌고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부예 왕조는 후계자 문제로 나라가 분할되어 있었으며 내분으로 인해 국가 기반 자체가 붕괴되어 있었다.
인근 지야르 왕조도 내분으로 인해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사파르 왕조 또한 궁정 내부의 갈등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남방 지역의 강대국들이 분포해 있던 인도도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마흐무트의 이러한 영토 확장은 각국 내부 분쟁의 행운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마흐무트는 이러한 인도의 상황을 파악하여 공격에 나서 인더스 강에서 갠지스 강에 이르는 북인도 지역을 복속시키고 수많은 약탈품들을 가지고 개선했다. 이러한 가즈나 왕조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역사에 남긴 의미는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완전히 정착하였고 왕권에서 이슬람교를 적극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남아있는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