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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과 립카 타타르의 1차 화약, 그리고 립카 반란의 원인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7-01 14:48:52

립카 타타르인들은 14세기 경 리투아니아 공국에 귀부하게 되었던 타타르 집단으로 특히 톡토타미쉬(Toktotamisi)가 망명했을 때 따라온 그 수하들에 기원을 두고 있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수니파 이슬람교도를 신봉하고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문화, 언어, 정교 등 모든 것이 달랐던 민족들이었다. 현재에도 이러한 립카 타타르족들은 폴란드에 살고 있고 폴란드어를 쓰고 있었으나 폴란드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폴란드 타타르족들의 조상들은 거의 대부분 립카 타타르족들이나 크림 타타르, 노가이 족들이 군인으로 채용된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폴란드로 이주한 후손들이 많았다. 

폴란드의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인 막시밀리안 기에림스키(Maksymilian Gierymski)가 1867년에 그린 <타타르족과의 교전(Potyczka z Tatarami)>, 출처 : Alamy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은 이들을 이용할만한 경기병 공급원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일부러 단속하지 않았다. 애초에 워낙 다양한 종교를 믿는 종족들이 모여 있었던 지역이라 크라코프나 빌뉴스 지역으로 볼 때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봉사, 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해 준다면 종교나 민족 풍속 등을 두고 문제시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립카 타타르는 튜튼 기사단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던 1410년의 그룬발트 혹은 탄넨베르크 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전투 이후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을 위해 봉사했다. 1528년경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과의 충돌로 인해 립카 타타르 상류층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도 립카 타타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해 봉사했으며 폴란드의 후사르 윙 기병대의 주축은 립카 타타르 인들이었다.


당연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들의 종교나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591년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는 20만 명의 립카 타타르와 그들을 위한 400개의 모스크가 존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부는 립카 타타르족들이 리투아니아 공국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거주한 민족이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16~17세기 중반 카잔 타타르족들의 조상들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거의 대부분이 다르게 변화되었으므로 일부분이 폴란드어를 쓰는 등 폴란드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폴란드 타타르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이고 거의 대부분이 그들의 언어를 잊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들은 성이 폴란드 형식으로 끝났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조사에 의하면 2002년 폴란드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500명의 타타르족들이 국적을 신고했다. 이들 립카 타타르족들은 벨라루스 중부에도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타타르족들은 리투아니아 남부까지도 거주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몽골-타타르 지배 시기 때 벨라루스로 건너갔거나, 19세기 러시아의 영향과 20세기중반 소련의 영향으로 일부 타타르족들이 벨라루스에 가서 정착한 민족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모습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타타르족들과 거의 유사하고, 풍습도 거의 유사하다.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까지 탄트라 산맥을 근거지로 하여 비교적 넓게 거주하고 있던 립카인들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지역 각지에 연락을 통해 산발된 부족들을 긴급 규합하려고 했다. 


이와 더불어 후사르 윙의 립카인 장교였던 라우아르두(Rauaedu)를 새로운 립카인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1619년 새로 정권을 교체하여 일어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전 지역에 이와 같은 립카 반란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립카인들에게 아직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이라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자신들의 요구 조건 몇 가지만 수용해준다면 대화의 여지를 남기며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의 협상 수용에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하여 전체적인 판세를 반전시켜 주기를 원했으나 정작 지도자인 라우아르두는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폴란드에 항복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타타르와 폴란드의 관계사를 살펴보면 항복은 비록 치욕스럽지만 그래도 민족 자체를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최근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폴란드 전쟁, 독일 30년 전쟁, 영국-스페인 전쟁도 승자가 패자를 멸망시켜 국토를 병합하거나 식민지로 삼지는 않았었다. 대신 많은 간섭과 착취가 수반되는 것을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도 협상을 원하는 립카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선례를 남겼던 것이다. 결국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이 개시되어 1620년 폴란드와 립카인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라우아르두는 적어도 타타르족의 명예만은 지켰다라고 말했을 만큼 형식상으로는 민족 대 국가로서 이루어진 하나의 종속 협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협정 장소와 형식부터가 립카인들에게 여러 가지 굴욕을 주는 상황으로 진행되었고 립카인의 요구들은 폴란드 정부가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의 의사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일방적인 항복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협상으로 인하여 1621년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고조되었던 반란의 조짐은 사라졌다. 이어 립카인을 도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러시아가 중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와 립카인들의 협상은 폐기되고 벨라루스에 정착해있던 일부 립카인들이 모스크바에 망명하여 자신들만의 자치 정부를 선포했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여전히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폴란드의 립카인들이 정부와 협상에 성공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서도 모스크바 립카인들을 도울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립카 타타르인들이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굴복했어도 타타르라는 실체나 정부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립카 이외에도 러시아 외부에 산재한 수많은 타타르 칸국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각 지역의 타타르인들도 그 약한 동질성을 가지고 모스크바에 망명한 립카인들에게 일일이 도움을 줄 필요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는 1612년에 폴란드군이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군대를 진주시켰고 당시의 타타르 칸국들 또한 폴란드 군에 합세하여 모스크바를 침공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에 친러 세력들로 구성된 칸국들이 러시아를 구원하지 않았고 당시 러시아 동란으로 인해 슬라브 민족들이 붕괴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들을 비교하면 타타르족들 간의 연대성은 그 연결고리가 매우 약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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