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출처: 제미나이
일을 하다 보면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일 자체 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어차피 일은 자신이 벌려 놓은 것이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감수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문제는 다르다.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맞닿은 사람의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완전 제 3자의 경우는 참견만 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의 무언의 지원이나 관심도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이해 관계 있는 사람들, 특히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 해야 할 사람들이 일도 전혀 관심을 쏟지 않고 거들지도 않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속된 말로 누구는 뺑이 치면서 일을 하는 데 다른 누구는 강건너 불 보듯 한다면 얼마나 복창이 터지겠는가? 차라리 남이라면 기대를 하지 않을 텐데 함께 있으면서 전혀 관심을 두거나 거들지 않고 눈만 껌뻑이는 형국이다. 소와 닭이 별종이라 그런 것인지, 사람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11장 16-17절)
한쪽에서는 절박하게 이야기를 해도 다른 쪽에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모습이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거나'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감정적 교류와 반응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한 쪽은 흥에 겨워 피리를 불거나 슬퍼 우는데, 다른 쪽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정서적으로 공감(sympathy)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제일 먼저 정서적으로 반응을 하고, 그 다음에 그런 사태가 무슨 의미를 띄고 있는 가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정서적 반응이 없다는 것은 이차적인 이해나 판단으로 갈 수 조차 없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행위자와 방관자 간에 원초적인 벽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 둘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무망한 일이다.
일찍이 서양 근대의 철학자들은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아담 스미스는 공감을 '타인의 모든 열정이나 감정과 일치하는 능력(fellow-feeling)' 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의 행동이나 감정이 나의 상상 속 감정과 일치할 때 우리는 그것이 '적절하다(proper)'고 도덕적으로 승인하며, 일치하지 않을 때 부당하다고 판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는 공감을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데이비드 흄은 공감을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현악기의 줄 하나를 튕기면 옆에 있는 다른 줄도 함께 울리는 '공명(Resonance)' 현상에 비유했다.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이 나에게 전달되어 유사한 감정을 유발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이성적인 계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보고 함께 고통을 느끼는 '공감 능력'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감정적 교류가 사회를 유지하는 원동력, 오늘 날 식으로 말하면사회적 연대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에세이철학 네트워크> 일을 할 때도 나는 주변에서 이런 모습을 많이 본다.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라 결국은 사람의 지혜와 노동을 전력 투구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의지와 노력, 그리고 아이디어와 실력의 결정판이 우리 하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일에는 절대 시간과 절대 노력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함께 하자고 하면서 소닭 보듯 하는 모습을 볼 때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 협력을 구하는 요청을 그저 ‘심리적 압박’으로 치부하거나, 헌신하는 이를 향해 "그 사람은 저가 일하는 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라며 기질적 차이로 몰아세우는 말들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본능적으로 노동에 적합한 인간'이라 규정하며 차별을 정당화했다가 후대의 학자들에게 두고 두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타인의 노고를 '취향'이나 '열정'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방관의 면죄부로 삼아서는 안 된다. 누구는 일만 하고 누구는 향유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일을 할 때는 같이 땀을 흘려야 하고, 쉴 때는 같이 쉬어야 하며, 그 성과를 같이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마태복음의 말씀과 달리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피 울면 가슴을 치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것이 사람이 사는 동네의 기본이자, 진정한 공동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성찬하는 사람들은 가장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