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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비운의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 이야기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7-05 22:45:42

보리스 고두노프는 당시 슬라브 족 통치 지역에서 카톨릭 교회의 탄압을 받고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등 매우 온건하고 모스크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키예프와 기타 슬라브 족 사회에서 그는 차르로써 즉위의 정통성을 의심 받는 상태였고 처음 키예프 루스와 유리 돌고루키 후예 단절의 이유가 되었던 황태자인 드미트리의 죽음 자체가 고두노프가 살해한 것으로 전 슬라브 족장들의 의혹이 고두노프 통치의 장애가 되었다. 

Парсуна с изображением Бориса Годунова кон. XVII в.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А. С. Пушкина «Михайловское»

고두노프는 반대 세력을 지배하에 두었지만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그의 일족이 멸족이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600년대 말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재상 레프 사피에하(Lew Sapieha) 및 폴란드의 대귀족 스타니스와프 바르시츠키(Stanisław Warszycki)가 이끄는 외교사절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한 전체 슬라브 족 간의 동맹인 동군연합(Personal union)을 제안했다. 


만약 세 나라의 군주 중 한 명이 후사 없이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다른 쪽 나라 군주가 양국의 왕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차르인 고두노프는 동맹 안을 거부하고, 1500년의 리투아니아 전쟁을 끝낸 얀 자폴스키의 휴전(Treaty of Jan Zapolski)을 1622년까지 연장하면서 불안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선택했다.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 및 연방의 마그나트(Magnat)로 알려진 폴란드 왕가의 대 귀족들은 자국 군이 소규모이고, 국고는 독일기사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금액을 동원했기 때문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 루스에 대해 본격적인 침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스 지역의 정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지그문트 및 마그나트들 등의 일부 귀족들, 특히 러시아 국경부근에 영토 및 병사를 가지고 있던 마그나트들은 차르 계승 문제에 대한 키예프 내부에서 분열에 대한 혼란에서 어떠한 이익을 얻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내전 상태에 놓여있던 모스크바를 위시한 슬라브의 보야르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위의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차르가 되기 위해 지원을 얻으려는 귀족도 있었지만 서쪽의 폴란드 귀족들과 당시 리투아니아 제국 의회에서 선거로 왕정이 성립되어 민회가 이를 견제하는 등의 상호 견제 장치가 있었다는 것에 매료되어 폴란드 정치가들의 힘을 빌려 폴란드와 연방과 동맹을 맺는 것을 생각한 귀족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북쪽의 스웨덴과 깊은 교류를 가지면서 상당한 부(富)를 취득한 귀족도 있었으나, 여러 종합적인 상황들로 인해 야코브 드 라 가르디(Jacob De la Gardie)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 마침내 슬라브 족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 루스 연합을 침공하게 되었고 스웨덴, 폴란드 연합군과 러시아 간의 전쟁인 대북방 전쟁(Северная война)을 초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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