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_칸첸중가_003_산책
룽따
설산 칸첸중가를 처음 봤던 그날 아침에 첫 산책을 나섰다. 들뜬 마음과는 달리 유스호스텔을 나와서 겨우 백 미터쯤 걸었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운무는 점점 짙어졌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지 이대로 더 걸어볼지 망설일 때, 운무 속 저만큼 불그스레한 불빛이 퍼져 나오는 창문이 보였다. 불빛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옮겼다.
불 켜진 창이 있는 건물은 식당을 겸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현관문을 당겼다가 흠칫 놀랐다. 식당 안에는 뜻밖에도 많은 여행자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교사 부부의 인솔로 트레킹하러 온 영국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위층에서 자고 내려온 영국 학생들의 주문이 밀려 있어서 나는 겨우 밀크티 한 잔과 오믈렛을 먹었다. 그래도 든든했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다르질링에 여행자라고는 나 혼자인 줄만 알았는데, 나 말고도 다른 여행자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식당 문을 열고 나서자, 자욱한 운무가 또 막아섰지만 내 발걸음은 올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씩씩해졌다.
티브이 타워 언덕에는 크게 네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걸어온 길, 즉 유스호스텔을 거쳐 병영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하나는 다르질링에 도착한 첫날 버스터미널에서 올라온 길이며, 다른 하나는 미륵불을 모신 티베트 곰파가 있는 굼 마을을 거쳐 칼림퐁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나는 좁은 길을 택했다.
골목 왼쪽으로는 번듯한 서양식 주택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계곡으로 떨어지는 오른쪽 비탈에는 가난의 땟국이 줄줄 흐르는 판잣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게딱지 같은 누옥들의 지붕 위로는 장대 끝에 매단 흰 깃발들이 그들 불교도의 자존심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어떤 깃발에는 티베트 불교의 한 상징물인 룽따(風馬)가 인쇄되어 있었다. 흰 깃발들도 자세히 보면 햇빛과 바람과 운무에 시달려서 탈색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룽’은 바람 風을 뜻하고 ‘따’는 말 馬를 뜻하는데, 펄럭이는 깃발의 모습이 바람을 향해 앞발을 쳐든 말 같다는 데서 깃발 자체를 룽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안개 속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골목의 룽따들을 보자니, 어린 시절 고모네 뒷마당 빨랫줄에 널어놓은 기저귀들이 연상 되었다. 또한 강원도 오지의 외딴집 마당의 빨랫줄에 걸려 있던 기저귀들도 떠올랐다. 첫인상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그때 이후로 어디든 룽따가 펄럭이는 마을에 가면 빨랫줄에서 힘없이 너울대던 흰 아기 기저귀들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광장
골목을 벗어나니 광장이 나왔다. 바람이 불어와 운무를 헤칠 때마다 광장에 늘어선 영국식 건물들이 드러났다. 대영제국 시대의 유물인 그 위압적인 건물들은 유령들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광장에 들어서자, 안개 속에서 서성이는 관광객들을 만났다. 그들은 좁은 선실이 갑갑해서 바람 쐬러 갑판에 나온 선객(船客)들 같았다.
신혼부부도 있었고, 일가족도 있었다. 커다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 다소 수다스러운 태도, 그리고 유난히 추위를 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벵골 지방 사람들이지 싶었다. 그들은 두꺼운 털옷에 털모자까지 쓰고도 덜덜 떨고 있었는데, 정말 추워하는 게 아니라 추위를 신기하게 여기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광장 한쪽에 놓인 벤치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고 엉덩이만 걸쳤다. 뿌연 운무 속에서 관광객들에게 조랑말을 태워 주는 티베탄 마부도 보였고, 밀크티를 보온병에 담아 들고 다니며 관광객들에게 파는 부인들도 보였다. 관광객들을 따라다니며 손을 내미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한 소녀가 내 앞으로 걸어와서 하얀 손바닥을 내밀었다. 속눈썹에 운무가 이슬처럼 송송이 맺혀 있는 소녀였다. 내가 소녀의 손바닥 위에 동전 몇 개를 올려놓자, 재빨리 감아쥐고 달아나는 소녀를 본 다른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잔돈이 없었다. 달러는 전대에 넣어 배에 차고 있었으며 잠바 안주머니에 고액지폐가 몇 장 있었을 뿐이다. 줄 게 없다고 잠바 겉주머니를 털어 보인 것이 잘못이었다. 한 소년이 내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소년들도 뒤질세라 손을 넣으려고 덤볐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짐짓 눈을 부라린 후 화난 듯이 벤치를 떠났다. 등 뒤에서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렸다.
티베탄 난민촌
광장을 벗어나는 길은 수없이 많았다. 특히 광장 북쪽 동산을 한 바퀴 도는 순환도로에는 어디서든 비탈로 내려설 수 있는 샛길들이 뻗어 있었는데, 무심코 접어든 길은 티베탄 난민촌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운무에 푹 젖은 룽따들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난민촌 판잣집들은 이상스레 낯이 익었다.
길가에 나와 노는 아이들,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깡마른 노인들, 구멍가게 안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는 여인네들, 누추한 거처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창가의 화분들, 그리고 시래기와 청국장을 끓이는 냄새 …….
티베탄을 비롯한 히말라야의 몽골계 민족들도 우리의 청국장이나 시래기 같은 음식을 즐겨 먹는다는 것, 그리고 히말라야 산촌에서 자란 몽골계 청년들이 영국군 용병이 되어 홍콩에 주둔하면서 가장 그리운 고향 음식으로 끼니마(kinima) 즉 청국장을 꼽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운무 속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티베탄 난민촌은 내 나이 다섯 살 무렵의 우리 동네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했다. 휴전선 부근의 수복지구(收復地區)였던 우리 동네는 한국 전쟁의 난민촌이었다. 난민들은 대체로 깡통과 판자로 지은 집에 살았다. 하수도도 변소도 없었기에 큰길도 뒷골목도 언제나 오물로 질척거렸다.
애들 우는소리와 여자들의 악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밤이면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기도 했으며, 어느 날 아침에는 뒷집 아줌마가 양잿물을 사발로 들이키고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흉흉하기만 한 동네는 아니었다. 마을을 한 걸음만 벗어나면 들판이 나왔고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고모네 여인숙은 시냇가로 가는 들판 초입에 있었다. 마당이 넓었다. 고모네 마루에 앉으면 마당 가득 널어놓은 흰 이불 홑청들 너머로 청계산이 보였다. 청계산 능선 위로는 이불 보따리 같은 구름이 흘러가곤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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