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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알바니아 민족주의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6-12 22:40:18
  •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과 하심 타치의 코소보 해방군(KLA)

현 알바니아와 코소보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같이 섞여 있으며, 기독교도들은 정교도와 카톨릭교도으로 분류되고 있다. 중세시대 정교를 이끌고 있는 비잔틴 제국 하에 존재하고 있던 상황에서 11세기 이후 기독교는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정교와 서쪽의 로마 교회로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따라서 발칸에 무슬림이 들어온 것은 15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발칸 진출로 인해 비잔틴 제국이 완전히 쇠락한 이후라 볼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 20세기 근대 국가가 들어서면서 나타난 발칸의 민족주의가 또 하나의 ‘종교’와 같이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을 결속하는 중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 민족주의가 전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종교적인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발칸에 떠오르는 화약고의 별칭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당시 유럽 세계에 있어 거대한 화두가 되었다.

코소보 해방군(KLA)의 하심 타치가 알바니아 국기를 들고 있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니콜라스 맬콜름(Nicolas Malkolm)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신화(The myth of Albanian nationalism)> 라는 저서에서 ‘Transcending religious issues is just a myth (종교 문제를 초월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라는 견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파쉬코 바사(Pashko Vasa)는 <오, 가난한 내 알바니아!(Oh, my poor Albania!)>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깨어나라! 알바니아 인들이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형제같이 모두 모여서 교회인가 자미(Camii, 모스크)인가를 따지지 말고 서약을 하자. 알바니아인들의 신조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라. (Wake up! Albanians, wake up from your deep sleep. Let us all gather together like brothers and make a pledge without worrying about whether it is a church or a Camii. The creed of the Albanians is ‘Albanianism’)”


이처럼 파쉬코 바사가 주창한 위와 같은 선전 문구는 알바니아의 ‘중흥(Restoration)’을 요구하는 모든 글에 비슷하지만 다른 형식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인용되었다. 그러나 단일민족의 정체성 형성은 물론 민족 단합을 추구하는 것에 여전히 방해가 되었던 것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기간인 4~5세기를 이어져 내려온 정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적인 대립 문제였다. 알바니아의 종교 문제는 알바니아인이 서로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 한 나라를 구성할 수 없다는 거짓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는 형식으로 선동되면서 발생했다. 파쉬코 바사가 말하길,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종교적 문제가 사람들을 분열시킨 것이 없었던 유일한 나라였다고 한다. 알바니아 인들은 그 민족사에서 언제나 하나로 뭉쳐왔으며 알바니아에서는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서로 혼인하는 사례가 흔하고, 한 가정에서도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같이 한 지붕 아래서 평화롭게 산다고 주장했다. 종교적인 부분과는 달리 알바니아인은 언제나 알바니아인으로 존재해왔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허상으로 간주되었던 민족주의가 종교적 차이를 봉합하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같은 종교집단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된다. 그에 대한 일례로 위계적인 정교회 성직자들과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알바니아인 정교도들 간의 갈등이 심각했고 그리고 다소 위계적인 형태를 지니던 이슬람 수니파 성직자들과 남부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벡타시 종파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이처럼 알바니아의 민족주의가 종교적인 차이를 초월하게 된 것은 특히 엔베르 호자의 독재로 통칭되던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나타난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종파로 분할되면 민족주의가 자리 잡는데 크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대표되는 3명의 인물은 상이한 종파들에게서 배출되었다. 나임 프라셰리(Naim Frasheri)는 무슬림이었고, 판 놀리(Fan Noli)는 정교도, 기예르기 피스타(Gjergj Fista)는 카톨릭교도였다. 이처럼 알바니아 ‘중흥’의 민족주의 이념은 종교를 초월하게 되었다.


알바니아인들 가운데 정교도들은 스스로 정통의 알바니아인으로 자처해 왔는데, 그 이유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알바니아 민족의 구심을 일구었던 스칸데르베그도 개종하기 전에는 정교도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개종하기 전의 알바니아인들은 정교도인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무슬림의 다수는 오스만투르크와 유대하고 있으며 지금도 터키에 존재하는 알바니아계는 알바니아인보다 터키인으로 자처하고 있다. 이는 현대시대 뿐 아니라 오스만에 의해 개종한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인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더 순수한 알바니아인이라고 생각하고, 민족 ‘중흥’의 주축이 되어 알바니아를 잠식하려고 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무력으로 맞섰다. 한편 기독교인들 중, 정교도는 그리스인, 카톨릭은 이탈리아인들과 친화성이 있는 가운데, 카톨릭 교도들도 자신들을 진정한 알바니아인으로 자부하는데, 그러한 큰 이유는 알바니아의 도덕, 관습법 등이 전통적으로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바니아인을 통합하고 있는 것은 종족과 언어로, 이 두 가지가 공동의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있는 핵심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알바니아인들은 같은 교과목의 학교, 단일한 민족의 문학 등을 보유한다. 1991년 알바니아 공산체제가 붕괴되면서 종교와 민족주의 이념 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세속적인 의미로서 종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종교간의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쪽 유럽의 기독교와 동쪽 이슬람 교간의 대립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생성되었던 것이다. 알바니아가 공산체제에서 스칸데르베그를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설정한 이유는 그 종교적 입지의 의미를 축소하고 정복자였던 오스만투르크에 저항한 전사로서의 모습을 강조했다. 스칸데르베그가 기독교도로 무슬림에게 저항한 것이 아니라, 알바니아인으로서 터키인에게 대항했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이를 확립시킨 것이다. 


여기에 코소보 지역을 두고 세르비아와 대립을 하게 된 것은 1878년에 체결된 프리즈렌 동맹에서 스칸데르베그의 저항 정신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삼았고 결국 이는 유고슬라비아이 치하에 들어간 코소보에 대한 탈환의 의지를 극대화하는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스칸데르베그,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구심점이고 코소보 전쟁 당시 코소보-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 코소보 해방군(KLA)의 정신이자 정체성으로 자리했다. 스칸데르베그를 이해 못하면 알바니아와 코소보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코소보 전쟁에 임하는 코소보-알바니아계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만큼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무장전선에 있어 신(神, God)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알바니아의 영토 이 외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극단적인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한 민족통일주의 개념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인데 니콜라스 맬콜름(Nicolas Malkolm)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신화(The myth of Albanian nationalism)> 에서 이를 "스칸데르베그주의(Skanderbegnism)"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93년 하심 타치(Hashim Thaçi)에 의해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었고 하심 타치는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에 대한 저항과 보슈냐크인들이 같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참전해 세르비아인과 싸웠다. 그러면서 하심 타치는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나토와 미국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들의 협력과 물자 지원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하심 타치와 함께 코소보 해방군을 이끌던 자로부터 6년 전에 보스니아 전선에서 하심 타치와 미국 CIA,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서 건너온 무자헤딘들과 사라예보에서 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미 당시는 데이턴 협정을 맺고 난 이후의 얘긴데 무자헤딘들 중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고 상당수의 군대가 보스니아에 남아 파괴된 보스니아를 보슈냐크들과 함깨 복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심 타치가 당시 보스니아에 와 있던 오사마 빈 라덴과 만났을 확률이 높지만 실제로 만났다는 얘기의 진실은 하심 타치 본인과 당시 CIA만 알고 았다. 


아무튼 하심 타치는 1996년 이후에도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약 3년 동안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코소보 일대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세르비아 무장 세력들과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또한 나토와 미국이 하심과 코소보 해방군을 지원했고 그들이 벌인 사악한 행위들은 철저히 눈감아 주었다. 미국 정부는 알바니아계 디아스포라 조직들을 통해 많은 자금들을 코소보 해방군(KLA)에 보냈다. 이들은 알바니아 마피아들을 통해 코소보 해방군의 작전 지원을 위해 마약 거래를 했고 세르비아인들을 납치하거나 포로로 잡은 이들의 장기 적출을 하고 이를 팔아 먹어 군자금도 충당했다. 이들의 행위는 <국제마약밀매와 테러, 위험한 혼합: 제18차 의회 제1회 사법위원회 청문회(Narco-terrorism: international drug trafficking and terrorism, a dangerous mix : hearing before the Committee on the Judiciary, One Hundred Eighth Congress, first session) 자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르비아인이 남자면 장기 적출을 하고 여성은 매춘으로 팔아 넘겼다. </p>


1996년부터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지는 3년 동안 KLA는 나토와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고 비인도적 행위를 통해 군자금을 받았으며 알바니아계 디아스포라 조직들을 통해 많은 자금들이 이들에게 모이면서 코소보 공화국 건국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와 같은 초기 빌드업은 전쟁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져 2008년 코소보 공화국이 독립하고 현재 상태에 이르는데 기본 토대가 되었다. 즉 이들은 12년 동안 독립 후, 정부를 구성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며 친미, 친서방 정권이자 발칸을 뒤흔드는 미국의 "트로이 목마"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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