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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왕국과 페르디난트 1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실의 관계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6-13 21:16:39

근세 불가리아 왕국은 발칸반도 남부에 위치한 왕국으로 수도는 소피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군주 칭호가 차르(цар)였고 슬라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차르 칭호를 사용한 나라이기에 불가리아 차르국 혹은 제3 불가리아 제국이라고도 한다. 비록 앞선 제1, 2 불가리아 제국보다는 존속 기간이 짧았지만 그 역사적인 행보로 볼 때 가장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겪은 것으로 유명한 국가이기도 하다. 원래 이 국가는 1878년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과 베를린 조약을 통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불가리아 공국에서부터 그 원조를 찾아야 한다. 불가리아는 500년에 걸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인 산 스테파노 조약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고, 산 스테파노 조약이 수립된 3월 3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며 현재도 기념하고 있다. 제1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 남슬라브계 국가들이 독립하는데 있어 모두 러시아가 은인이었던 셈이다. 

불가리아 왕국의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출처 : Новини СЕГА


따라서 그러한 러시아의 은덕을 기리고자 소피아 대학에서부터 세르디카에 이르는 거리를 알렉산드르 2세 차르의 개선 거리라 이름 지었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알렉산드르 2세 차르의 동상도 세웠다. 그리고 소피아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네브스끼 대성당을 세워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친러 성향이 강한 국가 중 하나였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남하를 우려하게 되면서, 프로이센 제국의 재상인 비스마르크의 중재에 따라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다. 베를린 회의의 결과에 따라 불가리아 공국은 다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종속국으로 돌아갔지만, 사실상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알렉산데르 1세 공후는 러시아의 후광을 받고 불가리아 공국의 초대 공작으로 즉위했으며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영토 팽창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1885년에는 세르비아 왕국과 발칸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놓고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을 벌기도 하였다. 알렉산데르 1세는 러시아의 후광을 받았지만 러시아를 두려워했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와 밀착관계를 형성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86년 친 서구 정책에 불만을 가진 친러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렉산데르 1세가 러시아로 임시적으로 망명하였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으나, 러시아 측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원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알렉산데르 1세의 귀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알렉산데르 1세는 불가리아 공국의 군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공작이 없어진 불가리아에서는 2대 공작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가장 유력한 자가 독일 작센을 통치하는 가문인 베틴 가문 일원의 에른스트 계열 작센코부르크고타 출신의 후작인 페르디난트 1세였다. 작센 왕국은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 후작 계열이 맞다. 여기에 나타나는 에른스트 계열은 원래 본가였고 작센 왕국 알브레히트 후작 계열이 방계로 나타나지만 16세기에 벌어진 종교전쟁 당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편에 섰고 그 와중에서 알브레히트 후작 가문이 에른스트 계열의 후작 가문 직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바뀐 것이다. 페르디난트의 부친은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조카이자 포르투갈 왕 페르난두 2세의 동생인 아우구스트 공자였으며 어머니는 루이 필립의 4녀 클레망틴이었기 때문에 그는 불가리아 혈통보다는 그저 독일인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출신도 불가리아의 다른 지역이나 수도인 소피아가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 비엔나였다. 게다가 그는 오스트리아군에서 장교로 있다가 불가리아 공작이던 알렉산데르 1세의 퇴위로 인해 불가리아 국회에서 후임 공작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08년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고 차르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누가 봐도 그를 독일인으로 보았지 불가리아 혈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다. 당시 퇴위된 알렉산데르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왕통을 이어받을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불가리아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자를 데려다 앉힌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흔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불가리아의 군주로써 그는 제1차 발칸 전쟁에 참전해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불가리아 대제국을 목표로 두고 계속 정복 전쟁을 벌였기에 오히려 제1차 발칸 전쟁의 동맹국들과 적국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동맹을 맺은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참패해 막대한 피해와 더불어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 대부분을 상실해 여론이 악화되기도 했다. 


그는 1910년 벨기에와 수교를 맺기 위해 브뤼셀에 다녀왔었는데, 그 때 우연히 비행기를 접하게 되었고 그 해 6월 15일 비행기를 직접 탑승하게 된다. 참고로 페르디난트는 유럽에서 최초로 비행기를 탄 차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발칸 전쟁에서의 패전을 되새기며 재기를 위해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세르비아에 대한 침공을 승전으로 이끌며 세르비아 왕국의 남부 지방을 합병하는데 성공한다. 페르디난트는 참전 직전에 자신의 인생 목적은 세르비아에 대한 무참한 파괴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세르비아에 대해 강경하고 매우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불가리아의 압제를 받게 된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박해 받았으며, 불가리아 군에 의해 슈팁에서 대학살이 발생했고 수르둘리카에서도 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차르의 뜻에 따라 세르비아 문화와 이를 이끌어 갈 중산층 지식인의 교육들이 철저하게 탄압되었고, 많은 세르비아의 유구한 역사의 수도원들이 불가리아 군에게 약탈되었다. 


또한 페르디난트는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의 혼혈을 장려했으며, 그렇게 태어난 자녀들이 철저하게 불가리아 인이 되도록 키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을 눈앞에 두면서 세르비아를 상실하게 되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0월 3일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 왕위는 장남 보리스 3세에게 넘기게 된다. 이후 페르디난트는 고향인 독일의 코부르크로 돌아와 은거했는데, 상당히 장수해서 1948년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퇴위한 이후의 삶은 매우 비참했는데, 차르였었기 때문에 본인의 삶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자꾸만 불행이 일어났다. 장남 보리스 3세는 1943년 히틀러의 불가리아 방문 이후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했고, 1946년 손자 시메온 2세가 퇴위하면서, 자신이 세운 왕국이 후대에 멸망하는 걸 자신의 눈으로 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차남인 키릴 왕자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추축국에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역대 불가리아 국가원수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며 이후 1948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발상지였던 코부르크 뷔르글라스-슐뢰셴 남작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페르디난트의 마지막 소원은 불가리아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으나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당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가문이 대대로 안장되었던 코부르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의 지하실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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