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의 기술자도, AI 기업의 경영자도, 정치인도 침묵하는 이 거대한 맹점에 대해 우리 사회의 성역 없는 비판을 담당해야 할 문학이 마침내 목소리를 냈다. 박경범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나랏기틀과 나랏말쌈 – 신미대사와 훈민정음창제》가 출간되었다. 초판 발행 당시 문학 외적인 문제로 온전히 빛을 보지 못했던 이 작품은, AI 시대라는 시대적 변곡점을 맞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사명감 속에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훈민정음 창제에 얽힌 역사적 사건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작가는 그동안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유학자들을 무조건적인 ‘악(惡)’으로 치부하던 기존의 이분법적 역사 소설 구도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조선 500년의 기틀을 세운 지도 계층의 양식(良識)과 저마다의 입장에 내포되어 있던 ‘선의’를 입체적으로 복원해 낸 것이다.
세종대왕의 고뇌: 고려인, 여진인, 왜인 등 영토 확장으로 다변화된 백성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소리글자가 필요했다.
유신(儒臣)들의 우려: 학문(한문)을 하지 않고도 기록 생활이 가능해지면 유학적 도덕 기반의 백성 교육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결국 이들은 ‘어리석은 백성만을 위한 글자’로 역할을 한정하는 타협안을 도출한다.
신미대사의 염원: 모든 백성에게 불경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일념으로 세종을 보필했다. 그는 새로 창제된 글자가 범어(梵語)의 실담자처럼 동양의 깊은 철학과 성조 발음을 완벽히 담아낼 수 있도록 헌신하며, 역사 속에서 사실상 ‘진보적 이념의 전파자’ 역할을 수행했다.
소설은 역사적 기록의 공백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메우며 ‘진상 규명’을 시도한다. 한글 창제를 찬성했던 김문이 돌연 반대로 돌아선 이유, 정창손이 ‘부류천성론(부유천성론)’을 주장했던 맥락, 그리고 수양대군이 자주 작호(爵號)를 바꾸어야 했던 숨겨진 배경 등이 작가의 밀도 높은 터치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풀어지며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돕는다.
특히 이번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과거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이 오늘날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고발한 대목이다. 작가는 과거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20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의 사례를 든다. 이는 우리가 공고하게 믿어왔던 ‘세종대왕의 어린 백성 신화’에 대한 잔인한 역설을 보여준다.
글을 모르는 약자가 재판에서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쉬운 한글’ 체계(한글 전용)를 도입했으나,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었던 피해자의 진술서와 조서는 강압에 의해 작성된 세련된 문어체와 한자어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지적 수준과 개성이 드러나는 다층적인 문자 체계가 살아있었다면 법원과 사회는 그것이 강요된 진술임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표현을 한글이라는 하나의 틀로 획일화해 버린 결과, 피해자의 무고함을 증명할 ‘지적 능력의 단서’가 지워져 도리어 억울한 옥살이를 방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작가는 세종대왕이 추구했던 본래의 방향이 무조건적인 문자 통일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가장 어리석은 자들은 날로 쓰기 편하게 하되, 지적 상위 계층은 한자로 고차원적인 지성을 표현하고 학자는 학문을 연구하도록 한 ‘수준별 단계적 언어 배려 구조’였다는 것이다.
박경범 작가는 소설을 통해 “한자문화권 이탈에 따른 수천 년 전통문화의 말살과 무분별한 영어권 편입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현재의 국어 상황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소설 속에는 신미대사와 세종대왕 등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한글 전용을 추진하는 정치인 강형찬, 이에 반대하는 무명 문인 홍인철, 의문의 여성 작가 홍인향 등이 등장하여 진보 이데올로기와 정의 사이에서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머리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공로를 찬양하는 것으로 후손의 도리가 충분한가. 예수와 부처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침의 취지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가 종교인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듯, 오늘날 한국인이 훈민정음 창제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의 정신적 양식이었던 불교의 유산과 한글 창제의 진정한 의미를 결합한 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개인의 개성과 다층적 언어 토양’을 회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나아가 백성이 저마다의 뜻을 제한 없이 펼치고 영혼의 성장을 향해 정진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뜨거운 충정이 담긴, AI 시대의 필독서다. [기사整理 제미니Ge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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