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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잘루트 전투와 의의 - 몽골제국 훌라구의 서방원정과 이슬람 맘루크와의 격돌을 중심으로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7-07 17:08:56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맘루크 술탄국의 군대는 팔레스타인을 북상하여 몽골군의 잔당 및 레바논에 재침입한 부대를 격파하는 것을 계속해 시리아 거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그러나 알레포를 회복할 때에는 이번 전투의 공로자였던 바이바르스와 총사령관 쿠투즈의 대립이 재연되는 분열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의 총독에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시리아 인들을 배경으로 자립할 야망을 갖고 있었으나, 쿠투즈는 바이바르스가 독립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 그로 인해 쿠루즈는 카이로로 개선하는 도중에 바이바르스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쿠투즈는 살해되고 바이바르스가 새로운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되었다.

1299년에 일어난 몽골 제국(일 칸국)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 간의 대격돌인 와디 알카잔다르 전투(Battle of Wadi al-Khazandar), 출처 : World History Encyclopedia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영웅으로써 카이로에 개선하여 이집트, 시리아의 왕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축적했다. 그 후에도 매년 벌어지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바이바르스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약소 계급들이었던 맘루크들을 안정화 시킨 정권의 주인으로 상승시키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사실상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되었던 셈이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이전에 귀환했던 몽골 제국의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이 영유하던 현 이란의 타브리즈에 이르러, 둘째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크부카가 칸의 지위를 놓고 내분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 이 지역에 머물기로 하였으며 이란-이라크를 세력권으로 삼아 자립하게 된다. 이 때부터 훌라구의 자손에 의한 세습이 이루어지게 된 페르시아에 위치한 몽골 왕국을 일칸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의 결과 팔레스타인은 맘루크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후에도 일칸국과 맘루크 술탄국 사이에 레바논, 시리아를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양국의 각축전은 킵차크 칸국 및 비잔틴 제국, 서유럽 여러 국가들까지 포함시키게 되어, 13세기 후반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외교전으로까지 확대된 명실상부한 국제전이었다. 아인잘루트 전투는 맘루크 술탄국 측의 역사가들이 남긴 같은 시대 아라비아어 사료에서 현대 역사 연구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 몽골 제국의 군대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처음으로 이들을 격파한 전투로써 매우 명성이 높다. 


그러나 맘루크 술탄국의 군대가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례는 이미 1221년 호라즘 제국의 잘랄 앗 딘의 군단이 칭기즈칸 시대에 쿠토쿠(Kutoqu)가 이끄는 3만의 기병을 격파한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 전투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한편 라시드 앗 딘의 집사(集史) 등 몽골 제국 측의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전초전이나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몽골 측 입장에서는 이 전투에 참가했던 몽골군은 훌라구의 귀환으로 인해 시리아에 남아있던 주력군의 일부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기타 몽골군이 실패한 전투는 후일 몽골 측에게 반격을 받아 패주하거나 궤멸당하는 상황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인잘루트 전투는 다른 것에 비해 그 인상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인잘루트 전투가 인상적인 이유는 이후 몽골 측의 정정(政情)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레바논이나 시리아 지역의 탈환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들도 맘루크 왕조 통치하에 있게 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일칸국에서는 1260년 이후 훌라구, 아바카 등은 킵차크 칸국과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차가타이 칸국과는 호라산 지역의 국경 분쟁에 신경을 써야 했기에 바이바르스가 지배하던 시리아 국경지역 침공에 대해서는 후속적인 대책만이 반복되었다.


역대 군주들 중에도 일칸국의 가잔 칸 만이 레바논, 시리아 지역에 여러 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으나, 대부분 군의 규모도 많아야 3만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알레포 이남 지역에 대한 정복은 또 다시 실패하게 된다.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제위 계승 분쟁 후에도 몽골 제국 내부에서 왕가간의 분쟁이 장기적으로 계속되어 제국 전체에 의한 군사 행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도 몽골 측에 있어 레바논, 시리아에 있던 잃어버린 영토 탈환의 기회가 상실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를 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서방에게 있어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이 무산된 것이 아인잘루트 전투가 있던 1260년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유럽 세계에서도 그 의미가 매우 상징적이었던 전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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