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과 이사야가 만나면’ — When Haewol Meets Isaiah
[에세이철학 네트워크=황인오 ]‘해월과 이사야가 만나면’— 문명의 자기완성을 위하여When Haewol Meets Isaiah— Toward the Self-Completion of Civilization황인오(경기동학민회 공동대표)'왱왱홈즈 : 담벼락 비하우징' — 콘크리트 담벼락에 대나무로 만든 야생벌 집을 달아주는 일이다. 서울환경연합이 요즘 시작하는 캠페인이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꿀...
[에세이철학 네트워크=황인오 ]
‘해월과 이사야가 만나면’
— 문명의 자기완성을 위하여
When Haewol Meets Isaiah
— Toward the Self-Completion of Civilization
황인오(경기동학민회 공동대표)
'왱왱홈즈 : 담벼락 비하우징' — 콘크리트 담벼락에 대나무로 만든 야생벌 집을 달아주는 일이다. 서울환경연합이 요즘 시작하는 캠페인이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꿀벌과 달리 단독으로 생활하는 야생벌들은 땅속이나 나무 틈에 집을 짓는데, 콘크리트와 유리로 채워진 도시에서는 그 빈틈조차 찾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이 대신 집을 지어주자는 것이다. 작고 소박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뜻밖의 울림을 느낀다.
야생벌은 생태계의 숨은 일꾼이다. 전 세계 식물의 상당수가 벌의 수분에 의존한다. 그러나 도시화와 농약, 서식지 파괴로 야생벌 개체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담벼락 하나에 대나무 집을 달아주는 행위는 단순한 생태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다. 인간이 망가뜨린 환경을 인간이 다시 설계하여 되돌려주는 일이다. 이미 도시 인근 야산에 새집을 달아주는 형태로 인간과 동물의 공존 노력이 시도한 것은 나름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지향해 온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구체화하는 사례들의 축적일 것이다.
이를 보며 80년대 이른바 운동권에서 부르던 이사야적 낙원을 그린 노래가 생각난다.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구약 성서의 예언자 이사야가 제시한 비전을 노래로 만든 것으로 압제자가 사라진 자유로운 나라에 대한 은유를 담은 것이다. 5.18 학살 직후 암울하던 80년대 남한 사회를 노래한 인간 해방의 은유였던 것이다. 전두환 일당의 군부독재를 끝장내고 억압받는 민중이 해방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이었다. 지금 이 노래를 다시 떠올린다. 이번에는 은유가 아니라 노래 가사의 문면(文面)이 나타내는 문자 그대로의 낙원에 대한 예언과 전망으로.
자연은 낙원이 아니다. 사자와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은 며칠씩 굶고, 사냥에 성공해도 절반은 빼앗긴다. 사냥당하는 쪽의 공포와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것을 '섭리'라 부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 그 잔혹함을 외면하기 어렵다. 인간과 거주를 함께하는 반려동물들도 기후 변화의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많은 야생동물들이 마주한 생태 환경은 생각보다 극한의 처지에 내몰렸을 수 있다.
인간도 오랫동안 그 자연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사회조직과 과학기술의 발달 발전을 통해 자연이 주는 유익을 극대화하고 위험을 최소화하며 하나씩 극복해왔다. 비록 유익이 증가할 때마다 새로운 위험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인간들은 이를 극복하려 노력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은? 가축화되고 반려동물이 된 종들을 보면, 인간과 가까이 사는 동물들이 야생 상태보다 훨씬 안전하고 안정된 생애주기를 누린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공장식 축산의 참혹함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동물들의 희생을 필요로 한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일이지, 이를 죄악시하는 것만은 능사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동물복지의 실패이지, 인간과의 공존 자체의 실패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인류는 문명을 쌓아오는 동안 생존과 복지를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을 희생시켜왔다. 방금 예로 든 공장식 축산이나 방역 등의 조치로, 또는 위생과 의료를 위해 실험실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동물에 의존해온 인간 수명의 연장이 걸어온,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농업 빌딩 산업의 발전과 단백질 합성 기술에 의한 인조 고기의 등장 등등의 사례는 더디지만 하나씩 상황이 달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동물들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세계가 아득하지만 마치 긴 터널의 끝처럼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보속과 책임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먼저 보속(補贖)과 책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근래에 기피 언어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념을 다르게 읽기를 제안한다. 지배의 근거가 아닌, 보속과 책임의 근거로. 가톨릭 실존주의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우주가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한다고 보았다. 우주는 단순한 물질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의식으로, 의식에서 더 높은 통일적 의식으로 진화해간다는 것이며, 그 최종 수렴점을 '오메가 포인트'라 불렀고,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진화가 맹목적이지 않고 방향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그 의식적 진화의 담지자라는 점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사명은 지배가 아니라 완성을 향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가톨릭 개념을 하나 덧붙여 ‘사명에 앞서 보속이 먼저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해월 최시형은 19세기에 경천·경인·경물(敬天·敬人·敬物)을 말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만물을 공경하라.’ 오늘날 관점에서 경천과 경물은 자연과 사물에 대한 겹치는 개념일 수 있다. 어찌 됐든 이는 단순한 자연보호가 아니다. 동물을 포함한 만물을 한울로 대하는 것, 착취의 대상이 아닌 공경, 즉 공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사야의 낙원은 인간 사회의 차별과 고통을 은유로 담았다. 해월의 삼경사상(三敬思想)을 통해 이는 모든 생명의 해방에 대한 예언으로. 해월과 이사야가 만나는 지점이 여기다.
피터 싱어가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브라이언 토마식이 야생동물 고통 연구로 도달하려 한 지점을, 동학은 다른 언어로 이미 예비하고 있었다. 인류 해방과 동물복지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인간이 서로를 차별하고 착취하는 한, 동물을 향한 시선도 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그 사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모든 지역의 인류가 기아와 차별과 비위생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순차적으로, 혹은 병행하여, 더 많은 동물 종들이 인간이 마련한 환경에서 더 안전한 생애를 누리는 세계를. 공장식 축산을 악마화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더 많은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하는 과정에서 거치는 불가피한 희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문명이 거쳐온, 아프지만 헌실적인 단계였다. 그러나 하나씩 극복되어야 할 단계이기도 하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아우프헤붕(Aufhebung), 지양(止揚)이다.
문명은 인간과 모든 생명이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인간 해방에서 시작하여 모든 생명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 — 그것이 인류가 나아가야 할 완성의 방향이 아닐까.
담벼락의 작은 벌집 하나는, 그 방향을 향한 작은 몸짓이다. 이사야의 낙원은 은유가 아니다.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를 연상시키는 제목 낚기임을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