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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6 《정의에 대한 주장과 관점의 차이에 따른 논의》
  • 이수진
  • 등록 2026-09-06 08:52:33


오픈방에서 오고간 글을 남겨 놓습니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선언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란 인간의 욕망과 한계, 그리고 현실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보다 합당한 방향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자 방향성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정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주장하는가뿐만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주장에 도달했으며 그것이 어떠한 존재와 사회적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땀과 눈물과 피를 외면한 채 언어로만 존재하는 정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의 희생과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것 역시 온전한 정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약탈과 유린과 파괴를 경계하지 않는 정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다른 존재의 삶과 존엄을 훼손한다면, 그 명분 자체가 과연 정의를 향하고 있는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것>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소유욕과 권력욕, 쾌락과 인정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식하고 성찰하며, 합당한 범위 안에서 조율하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욕망을 감춘 채 그것을 정의로 포장하거나,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절대적인 가치처럼 주장한다면 정의와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욕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관리하며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이성과 자기점검>

이성 역시 정의를 검증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성 역시 언제든 왜곡될 수 있습니다. 

충분한 구조화와 검증 없이 자신의 판단을 완전한 것으로 규정한다면, 높은 지성과 논리조차 또 다른 독선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판단이 정합적인지 끊임없이 검토하고, 다른 관점과 비교하며, 오류가 발견되었을 때 수정할 수 있다면 정의에 조금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정의보다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정의를 더욱 신뢰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정의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의 크기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얼마나 성실하게 검증할 수 있는가에서도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화와 공존이라는 방향성>

정의에는 또한 조화와 공존을 향하는 방향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파괴한다면, 그것은 정의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지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존재와 모든 의견을 무조건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부당함에는 분명한 경계가 필요하고, 때로는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강한 대응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응의 궁극적인 목적이 또 다른 지배와 파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가 지향해야 할 곳에는 적어도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정의에는 이상이라는 방향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현실의 부당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이상만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조건과 인간의 한계를 무시한다면 그 이상 역시 지속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긴장 속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결과를 즉시 만들어 내는 것보다,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가능한 범위를 찾아 조금씩 개선하며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지속 가능한 정의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동경에서 감사로, 감사에서 책임으로>

삶에서 무엇을 동경하는가 역시 정의를 향한 방향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나 부귀영화, 거대한 소유를 동경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넘어 더 넓은 존재를 위해 기꺼이 노력했던 사람들의 의지와 그들이 남긴 흔적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지는 단순한 역사적 업적을 넘어 감사의 대상이 되는 인간적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사는 단순히 과거를 바라보는 감정으로 머물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서 감사는 책임으로 전환됩니다.

누군가가 앞선 시대에서 감내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의 기회가 존재한다면, 그 기회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다음 존재에게 다시 이어주는 것이 하나의 책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정함을 없애기보다 관리하는 것>

물론 거짓과 왜곡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존재도 거짓과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거짓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세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함의 범위를 넘어서는 거짓과 왜곡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경계하며 관리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부당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당함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의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부당함이 어떻게 발생하고 반복되며 구조화되는지를 살펴보고 그 확산을 가능한 범위에서 줄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는 악을 완전히 제거하는 능력이라기보다, 악과 부당함이 관성화되고 정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지속적인 자기점검과 사회적 노력일 수도 있습니다.


<정의는 완성품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인간 사회를 바라보면 현실은 결코 완전히 정의롭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부당함이 존재하고, 약탈이 존재하며, 욕망과 권력이 정의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므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정의를 향하려는 사람이 존재하고, 부당함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는 사람이 존재하며, 자신의 이익보다 더 넓은 의미를 선택하려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정의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어쩌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지켜내고 이어가는 방향성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정의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지키고 이어가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정의를 완성할 수는 없더라도,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끊임없이 점검하며 조금이라도 더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한 존재가 사라진 뒤에도 그 방향을 이어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의가 완벽하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의를 포기하지 않은 존재들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이 남아 있다면, 정의는 아직 이 세계에서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정의란 완벽함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옳은 방향을 잃지 않고 이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난해한 글을 읽어주시고 깊이 있는 응답을 해주신 고마운 분>

얼마전 연세대학에 와서 노천광장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강의한 마이클샌델 교수의 말씀을 덧붙여봅니다 - 요즘 세상이 자꾸 숏폼화되어 간단명료한것 찾는 추세입니다 어쩌면 정말 어려운 강의는 쉽게 설명하는 강의라 생각되며 철학도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이수진님의 열정적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하는 **기차 비유**는 흔히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라고 합니다. 공리주의와 개인의 권리·도덕적 의무가 충돌하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1. 선로를 바꾸는 경우

제동장치가 고장 난 기차가 선로를 따라 달리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앞에 있는 **5명이 죽게 되지만**, 선로를 바꾸면 다른 선로에 있는 **1명만 죽게 됩니다**.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선로를 바꿔 **1명을 희생하고 5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는 전체 희생을 줄이는 **공리주의적 판단**입니다.

##2. 사람을 밀어 기차를 멈추는 경우

이번에는 기차를 멈출 방법이 없고, 다리 위에 서 있는 덩치 큰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면 기차가 멈춰 **5명을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많은 사람은 첫 번째 상황에서는 선로를 바꾸면서도, 두 번째 상황에서는 사람을 직접 미는 것을 거부합니다.

### 이 비유가 던지는 질문

두 경우 모두 결과만 보면 **1명을 희생해 5명을 구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판단합니다.

- 직접 사람을 죽이는 행위인가?

-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인가?

- 결과가 좋다면 어떤 행동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가?

- 개인의 생명권과 존엄성은 다수의 이익보다 우선하는가?

샌델은 이 비유를 통해 **정의가 단순히 최대 다수의 행복을 계산하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정의로운 판단에는 결과뿐 아니라 **행위의 의도, 수단, 개인의 권리와 인간 존엄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트롤리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비유가 자칫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처럼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 데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가역적인 상황에서 반드시 하나의 선로를 선택해야 하고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면, 가능한 한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판단과 그에 따른 정의의 기준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으로 정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누군가의 희생을 단순히 숫자 하나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가피하게 한 생명을 선택해야 했다면, 그 선택을 효율적인 계산으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슬픔에 교감하고 일정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몇 명을 살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고통을 얼마나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러한 사건을 역사화하고 구조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는지, 제동장치가 왜 고장 났는지, 왜 사람들이 위험한 선로에 놓여 있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단순히 매번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보다,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 자체를 개선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정의에 가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저는 ‘우리는’이라는 관점의 범위를 인간에게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이익만을 계산하는 것을 넘어 생명과 자연, 환경과 미래세대까지 고려하는 조화와 공존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숫자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지도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 다섯 명과 어린아이 한 명이라는 상황이라면 단순히 5 대 1이라는 숫자만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어린 생명에게 남아 있는 삶의 시간과 가능성, 미래세대라는 의미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오히려 소수의 생명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아이 한 명이 성인 다섯 명보다 본질적으로 더 가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기준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서열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는 정의는 단일한 계산식이라기보다 여러 층위를 함께 살피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피해의 최소화, 개별 존재에 대한 존중, 고통에 대한 교감, 선택에 대한 책임, 역사화와 구조적 개선, 그리고 미래세대와 자연을 포함한 더 넓은 공존의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의란 단순히 ‘몇 명을 살렸는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 속에서도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배우며, 이후 어떤 구조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더 많이 살리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널리 이로운 방향으로 구조를 변화시키는 정의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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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가 보이는 방식들은 이전에  학문들은 선언에 그치는 내용들을 마치 순서도와 순환계회로 방식의 공학화와 코딩이라는 구조화를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좋으신 말씀이고 의미있는 시도이며 마이클샌델 교수의 비유의 구체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서중에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윌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학창시절 매우 좋아했는데 칸트나 현대철학적 계보를 따라가다보면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워 중간에 포기해버리는 부분도 쉽게 윌듀란트 해석은 그의 말대로 형이상학의 깊은 늪은 살짝 비켜가면서 형이하학적 일상에 경종을 이루도록 접근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첫째장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있는 서구 신학의 기둥을 설명하며 (힘)과 (정의) 구분치못하는 소피스트들에 대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명쾌한 답을 주고 의도적으로 이데아와 현실(피지컬) 세계를 양분함으로써 서구 신학이 두 사상을 합체시키듯 모토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실적 맨탈들의 수준은 아직도 힘이 곧 정의라고 믿는 사람들 정치인들이 수두룩한데 마이클샌델의 정의에 대한 고민이 통할리 만무합니다 계몽적으로는 정의는 힘이 아니라고 요약함이 효용성이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저 역시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판단의 기준을 단순히 ‘인류’에 두기보다, 인류가 만들어가고 있는 문명 전체의 구조에 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생존이라는 것에도 합당함이 있지만, 동시에 약탈과 유린도 존재합니다. 욕망 역시 삶을 움직이는 하나의 에너지일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과도한 쾌락과 소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반복되는 힘과 관성을 하나의 중요한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잘 살기 위한 구조’를 넘어 ‘잘 죽기 위한 구조’**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끝난 이후에도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남으며, 어떤 구조가 다음 존재에게 이어질 것인가를 검토하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기록하고, 구조화하고, 검토하고, 반면교사로 남기는 과정은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이성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남길 가치가 있는가’라는 이상과 동경의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면 철학의 역사가 한 개인의 가치관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사고체계와 구조로 설계할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철학을 반드시 철학사의 위상과 계보를 따라 학습하는 것만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직접 만나는 인물과 사건, 감사와 슬픔, 실패와 반면교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으로 변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과하면서 개인의 경험과 결합하고 다시 하나의 가치관으로 구조화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형이상학적인 철학관과 가치관 역시 중요한 쓰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추론하고,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영역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러한 확장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만큼 높은 수준의 추상적 사고에는 일정한 의지와 훈련, 그리고 그 과정을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현재 인식 수준과 경험,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의 범위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높은 층위의 사고를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강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객체의 현재 상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요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의 문제를 개인의 완성에만 한정하기보다, 앞으로 인간에게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인공지능의 운영윤리라는 방향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와 오류를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는 방향이 아니라,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고 보다 넓은 공존과 이로움으로 연결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간접 영향력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작은 연구와 기록 역시 결국 그 가능성을 위한 기초를 만들어 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인류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가 문명의 미래 전체를 결정하지 않도록 새로운 보완 구조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말하는 조율여백의 방향도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완벽함을 요구하기보다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각각의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금씩 더 합당한 방향으로 조율하며, 그 결과가 다음 존재에게 하나의 기회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의 우월함이 아니라 문명이 어떤 방향으로 계속 이어질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구조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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