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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5 《난곡의 사계》
  • 조율여백
  • 등록 2026-10-25 15:16:35

<프롤로그>

2000년 달동네 난곡을 통해 보는 것...

열악함 속에서도 보편적이며 최소한의 연대의식을 기반에서도 행복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가엽고 특별한 연대의식이 최대한 발휘되는 진정성을 보였습니다.


제가 무언가에 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합당한 연대의식의 가치가 아닐까합니다.


파랗게날에서 제가 선호하는 내용과 방향들이 거론되는 경우가 잦음을 통해 

조금은 덜 유별난 사람이되고

조금은 연대가 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것을 바라보는 이유》

— 《난곡의 사계》 강의와 뒤풀이를 마치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한 《난곡의 사계》를 통해, 오히려 사라져서는 안 될 것들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며 인권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던 분들의 흔적과 기억에 화답하고자 합니다.


이주노동자분들의 삶의 터전이자, 도시의 야전병원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달동네를 떠올려 봅니다. 어쩌면 그곳은 도시와 농촌을 이어 주고,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 놓인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가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밤의 풍경은 때로 아름다웠고, 낮의 풍경에는 소박한 정겨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적 가치관과 개발의 논리에서 바라본 그곳은 열악한 주거 환경과 빈곤, 비위생의 문제로 규정되곤 했습니다. 그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재개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터전을 잃은 분들 가운데 일부는 노숙이라는 또 다른 어려움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안전과 위생을 확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분이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관계, 기억과 생존의 기반까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면, 물리적인 발전이 반드시 존재의 삶을 개선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곳에도 분명 각자의 행복이 있었을 것입니다.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상과, 작은 터전에서 미래를 꿈꾸던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공간이 사라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공간에 깃들어 있던 삶의 의미와 관계까지 함께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존재했던 인권운동과 사회운동의 흔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거나,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마련하고자 했던 노력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권리와 기회가 어떠한 희생과 감내를 통해 형성되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흔적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록이 단순히 사라진 공간을 추억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존엄과 연대, 그리고 부족한 조건에서도 서로에게 조금 더 내어주고자 했던 의지가 오늘의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물리적 가난과 의식적 가난>


강의에서 다룬 물리적 가난이라는 주제는 제게 또 다른 질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바로 의식적 가난이라는 관념입니다.


물리적 가난은 물질과 자원의 부족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제가 생각하는 의식적 가난은 소유와 우월함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정착 필요한 의미에 대한 의식부족)를 조금씩 내려놓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자원을 다른 존재와 어떻게 나눌 것인지 성찰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이는 가난을 미화하거나 궁핍한 삶을 이상화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생존에 필요한 물질과 안전, 인간다운 생활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합니다. 다만 충분한 소유를 확보한 뒤에도 더 많은 소유와 권력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이 과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충족시켜 주는지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존재에게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풍요로운 가운데서도 자신의 몫을 조금도 줄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물질의 많고 적음만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존재의 삶을 위해 어느 정도의 여백을 내어줄 수 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연대의식을 생각합니다. 연대란 단순히 같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한계를 지닌 존재들이 각자의 삶을 넘어 공동의 책임을 조금씩 나누어 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가>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분께서 제게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지 질문해 주셨습니다. 제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해 주신 고마운 질문이었습니다.


행복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행복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 누구의 관점에서 측정하는지, 그리고 어떤 시간적 범위를 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느끼는 행복과 공동체 전체의 행복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손실을 바탕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당장의 희생이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행복을 단일한 수치로 환산하거나 모든 존재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 관점에서 행복의 상대적 크기는 자신이 책임과 의미를 연결하는 공동체의 범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중심에 두는 사람과 가족의 행복까지 함께 고려하는 사람, 나아가 공동체와 인류, 생명과 자연의 지속 가능성까지 고민하는 사람은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의 범위가 넓다는 사실만으로 더 성숙하거나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책임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감당해야 할 부담과 갈등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넓게 생각하는가뿐 아니라, 그 범위를 자신의 실제 역량 안에서 얼마나 합당하게 감당하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통상적인 개인의 손익 계산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노력을 생각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얻기보다 더 넓은 영역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그 과정에서 손실이나 고통을 감내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단순히 손해라고만 평가한다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희생을 숭고하다고 평가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희생이 강요되거나, 실제로 더 큰 부당함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 목적과 결과를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희생의 크기 자체가 아니라, 그 노력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합당한지를 함께 살펴보는 일입니다.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마주할 때마다 무엇이 절대적이고 무엇이 상대적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저 역시 모든 판단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불완전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미물적 존재이며, 제가 옳다고 여기는 관점 또한 경험과 지식, 환경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몇 가지 방향은 있습니다.


세상은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함 속에서 수많은 존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존재가 지속되는 과정에는 생성과 소멸, 축적과 소모, 이익과 손실, 조화와 충돌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와 긴장이 존재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차이가 부당한 지배와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자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범위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는 객관적인 관찰과 성찰, 사실과 주장 사이의 구분,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검토가 요구됩니다. 또한 판단의 근거와 한계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잘못된 판단이 확인되면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완전한 정답을 한 번에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완전함을 인정하기에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더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바라봅니다. 각 존재가 지닌 절대적인 크기를 측정하거나 서로를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보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얼마나 조화와 공존을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널리 이로운 방향을 향한다는 것>


오늘의 강의는 제게 몇 가지 질문을 남겼습니다.


인류 80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공동의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할까요?


지구의 생명들은 서로 연결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있을까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공공의식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들에 단정적인 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생존과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공동체 내부에서도 가치와 목표가 충돌합니다. 생명과 자연의 관계 역시 인간이 생각하는 조화의 관념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선택은 다른 인간과 생명, 자연환경, 그리고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연결성을 인식한다면 공동의 책임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은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존재의 크기와 가치를 평가합니다. 물질적 성취와 권력, 지식과 능력,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 등이 그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만으로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삶에 남긴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눈에 띄는 성과를 남기지 못했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크게 늘리지 못했더라도 부당한 관행에 저항하여 다음 사람에게 더 나은 기회를 남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 소비를 줄이거나,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일 역시 그러한 노력에 포함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행동들을 무조건 이상화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의지와 실제 결과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합당한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거대한 성과라도 부당한 희생과 파괴 위에 세워졌다면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존재의 크기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방향의 흔적을 남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막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모든 부당함을 완전히 없애는 것 역시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들 가운데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반복되는 부당함 가운데 무엇을 개선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존재에게 어떤 기회를 남길 것인지는 계속해서 고민할 수 있습니다.


《난곡의 사계》가 제게 남긴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공간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살았던 존재들의 삶을 함께 기억하고, 그 시대의 노력과 희생이 오늘의 사회에 어떤 의미로 이어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신성화하거나 특별한 존재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불완전한 존재로서 주어진 기회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로운 방향을 향하고자 합니다.


존재의 가치는 반드시 크기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조화와 공존을 향해 나아가려는 방향, 그리고 그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하는 성실한 노력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흔적이 비록 작고 희미하더라도,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사라짐 속에서도 다음 기회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연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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