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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존중 없는 사회』를 읽고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10-18 20:53:37
  • 수정 2026-10-19 10:09:41


10여 년 전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 사회의 ‘자기착취’를 폭로하며 독서계를 강타했던 한병철 교수가 신작 『존중 없는 사회』(간디서원, 2026, 정창호 옮김)로 돌아왔다. 얇은 부피와 특유의 아포리즘적 문체로 높은 가독성을 자랑하는 그의 작업은 늘 한결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번 책 역시 그 연장선에서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의 병리를 ‘존중의 실종’이라는 프리즘으로 포착해낸다. 인간의 가치를 오직 성과에 종속시키는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존중은 물론 자기 존중마저 손상되며, 이는 개인의 인성 문제를 넘어 사회적 관계와 제도의 위기로 번진다는 진단이다.

패배가 곧 인간적 실패가 되는 사회, 그리고 타자의 실종

책의 문을 여는 것은 존 롤즈의 ‘질서정연한 사회’다. 인간이 자기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기 존중’은 평등한 권리와 사회적 인정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존중을 직업, 소득, 지위에만 할당한다. 경쟁에서의 패배가 곧 인간으로서의 실패로 경험되는 구조 속에서, ‘루저(loser)’로 낙인찍힌 이들의 굴욕과 고립은 사회를 해체하는 맹목적인 공격성으로 폭발한다. 저자는 이를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개념을 빌려 ‘분자적 내전’이라 부른다. 뚜렷한 대의도, 명확한 적도 없이 일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파괴의 전쟁이다.

이러한 내전 상태를 넘어서는 단초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주의(Aufmerksamkeit)’와 ‘우정’이다. 여기서 주의란 타인을 경계하는 시선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낼 시간을 허락하는 사려 깊은 관심과 배려다. 섣불리 타인의 감정에 개입해 평가하고 훈계하기보다 일정한 ‘형식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존중의 시작이다. 나아가 저자는 적과 아군을 가르는 칼 슈미트 식의 정체성 정치에 맞서, 나와 다른 존재를 복제물로 만들지 않고 그 ‘차이’ 자체를 품는 ‘우정의 정치학’을 대안으로 호출한다.

수치심과 거리를 잃어버린 시대, 배설구가 된 공론장

중반부로 접어들며 저자의 시선은 현대인의 일상에 만연한 무례함과 폭력성으로 향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가장 먼저 깨달은 감정이 수치심이었듯,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말하듯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문명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보루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약자를 조리돌림하며 수치심을 주는 행위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소비된다. 이 ‘수치심의 상실’은 공동체를 지탱하던 수직적 가치와 본보기가 무너진 자리에서 더욱 가속화된다. 모든 것을 화폐와 상품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는 존경받는 어른과 스승, 초월적 이상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인플루언서와 아이돌을 세웠다. 최상위 포식자가 사라진 생태계가 도리어 무너지듯, 권위와 모범이 증발한 ‘평면화된 수평 사회’는 민주주의의 성숙이 아니라 파편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으로 귀결된다는 지적이다.

이와 맞물려 7장 「공론장의 퇴락」이 보여주는 진단은 특히 설득력이 높다. 저자는 낯선 이들이 공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예의와 형식적 거리’가 무너진 현상을 루소의 『고백록』에서 기원한 ‘친밀성의 문화’로 설명한다. 거리 두기를 위선으로 치부하고 날것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태도가 미덕처럼 포장되면서, 사적인 감정이 공적 관계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노와 혐오, 원색적인 감정의 배설구로 전락한 오늘날의 디지털 공론장을 떠올려보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칸트적 존엄과 합리적 권위의 복원

그렇다면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한병철은 칸트의 도덕철학을 경유해 ‘존중’과 ‘존경(Achtung)’을 구분한다. 존중이 타자성에 대한 인정이라면, 존경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화될 수 없는 ‘인간 존엄성’ 자체에 대한 경외다. 성취를 높이 평가하되 성취하지 못한 이의 존엄 또한 온전히 지키는 것, 그리고 타자와의 거리와 수직적 가치를 잡아줄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그가 제시하는 해법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강압적 폭력이나 맹목적 카리스마가 아니다. 설명 책임과 오류 정정의 제도, 투명한 검증 절차를 갖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법과 제도의 권위다.

‘개념의 마법사’가 남긴 아쉬움: 급진적 진단과 보수적 처방 사이

『피로사회』의 자기착취, 『타자의 추방』의 나르시시즘, 『리추얼의 종말』의 형식 상실에 이르기까지, ‘개념 주조의 마법사’다운 한병철의 문제의식은 이번 책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남는 특유의 갈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향한 비판의 칼날은 더없이 급진적이고 날카로운데, 정작 그가 내놓는 해법은 묘하게 비관적이거나 보수적인 감수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경쟁이 인간을 파괴한다고 질타하는 급진적 목소리와, 예의·본보기·스승의 권위를 복원해야 한다는 전통주의적 호소는 과연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더구나 경제적 불평등, 온라인의 모욕 문화, 진영 정치의 적대, 공적 권위의 추락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의 복합적 현상들을 ‘존중의 상실’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묶어버릴 때, 자칫 문제의 인과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도 따른다.

타자에 대한 경청과 우정의 회복은 분명 소중한 윤리적 지향점이다. 하지만 개인의 태도 변화와 도덕적 각성만으로 신자유주의의 가혹한 경쟁 압력을 낮추거나 존중의 사회적 기반을 새로 깔 수는 없다. 이 책의 진단을 현실의 변화로 밀고 나가려면, 경쟁에서 실패해도 시민적 지위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 감정노동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법제, 혐오와 모욕의 확산을 방치하는 디지털 플랫폼에 책임을 묻는 제도적 논의가 훨씬 더 치열하게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책이 지닌 시의성과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 특히 AI 번역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나, 철학적 사유의 결을 매끄럽게 살려낸 정창호 박사의 유려한 번역과 충실한 주석은 전문 번역가의 역량이 왜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대 진단과 역자의 빼어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존중’의 자리를 다시금 서늘하게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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