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바위와 미륵바위
두타산 무릉계곡의 험준한 암릉 지대에 솟아 있는 베틀바위와 미륵바위는 웅장한 자연경관과 함께 민간의 신화·불교적 염원이 깃든 대표적인 명소이다. 지역에서 구전되어 온 전설과 상징적 이야기를 살펴보고, 동양의 오랜 관점인 ‘형기상감(形氣相感, 형상이 정해지면 기운이 응한다)’의 본질과, 사람이 어떠한 형상을 거듭 마음에 새기고 '그렇다'고 확신하면, 의식의 지향성이 바뀌고 그에 따른 심리적·행동적 파동이 현실의 삶을 실제로 빚어낼 수 있다는 비물질적 에너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베틀바위의 전설과 유래
형상적 특징: 해발 약 550m 절벽 위에 뾰족한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겹겹이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베를 짜는 ‘베틀(織機)’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기괴하고 웅장한 자태 때문에 ‘한국의 소금강’ 혹은 ‘한국의 장가계’로 불린다.
선녀의 하강과 삼베(비단) 세 필의 전설: 옛날 하늘나라의 규율과 질서를 어긴 한 선녀가 옥황상제로부터 벌을 받아 인간 세상인 두타산 무릉계곡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선녀에게 "이곳 험준한 바위산에서 베틀을 차려놓고 삼베(혹은 비단) 세 필을 다 짜야만 다시 하늘로 돌아올 수 있다" 는 과제를 내렸다.
선녀는 깎아지른 바위 위에 베틀을 놓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뉘우치고 정성껏 베를 짰다. 마침내 삼베 세 필을 모두 완성하자, 선녀의 참회와 정성에 감동한 하늘 문이 열리며 다시 선계로 승천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선녀가 베를 짜던 베틀 자리가 굳어져 바위가 된 것이 바로 지금의 ‘베틀바위’라고 구전되고 있다.
2. 미륵바위의 형상과 민간 신앙 이야기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두타산 정상으로 가는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벼랑 끝 능선(미륵봉)에 거대한 독립 암석인 미륵바위가 우뚝 서 있다.
미륵불의 자비와 굽어보는 시선
바위의 윤곽이 조각가가 정성스레 깎아 세운 듯 자비로운 ‘미륵불(彌勒佛)’의 옆모습을 쏙 빼닮아 있다.
지역에서는 이 미륵바위가 발아래 펼쳐진 베틀바위와 험준한 두타산성, 무릉계곡을 자비로운 눈빛으로 굽어살피며, 산길을 오가는 이들의 안녕과 속세의 액운을 막아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보는 각도에 따른 다양한 해석 (선비상·부엉이상)
정면이나 측면에서 보면 인자한 미륵부처의 모습이지만, 시선을 달리하여 올려다보면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사색에 잠긴 ‘점잖은 선비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지혜와 영험함을 상징하는 ‘부엉이 형상’으로도 비친다.
이 때문에 옛 선비들이 두타산에 올라 과거 급제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기도 하였으며, 자식을 얻고자 정성을 들이는 기자석(祈子石)의 영험한 기도처로도 구전되어 왔다.
두타산 미륵바위
3. 두 바위의 조화와 상징성
두타산의 '두타(頭陀)'라는 이름 자체가 "속세의 모든 번뇌와 탐욕을 털어버리고 도를 닦는다"는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베틀바위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죗값을 치르고 땀 흘려 참회하는 ‘인간적 고행과 정화’를 상징하고, 그 위에서 베틀바위를 지켜보는 미륵바위는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고 희망을 주는 ‘초월적인 자비와 구원’을 상징한다.
험난한 암릉 속에서 두 바위가 아래위로 마주 보듯 어우러져 있는 형국은, 두타산이 지닌 불교적 수행의 깊이와 자연의 신비로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절묘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4. 바위의 침묵을 읽는 마음에 대하여
산길을 걷다 보면 홀연히 걸음을 멈추게 하는 침묵의 조각들을 만난다. 두타산 깎아지른 절벽 끝, 칼바람을 온몸으로 빗질하며 솟아오른 베틀바위와 그 너머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미륵바위가 그러하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거친 빗물과 오랜 풍화가 빚어낸 무기물질의 우연한 파편이라며 무심히 스쳐 지나가고, 또 어떤 이는 그 서늘한 암봉의 실루엣 속에서 속죄의 베를 짜던 옛 선녀의 눈물겨운 한숨과 어지러운 세상을 다독이는 미륵의 자비로운 미소를 읽어낸다.
이를 두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풍수 물형론의 자의적 견강부회라며 가볍게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천은 본디 아무런 말도, 이름도 품지 않은 채 그저 억겁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그 침묵하는 대지에 ‘베틀’을 얹고 ‘미륵’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그 벼랑을 올려다보던 인간의 뜨거운 가슴이었다.
모든 사물은 바라보는 이의 내면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무언(無言)의 거울이다. 가슴에 번뇌와 욕망이 들끓는 자의 눈에는 기암괴석이 그저 험상궂은 살기(煞氣)를 내뿜는 장애물로 비칠 것이요, 삶의 고단함을 딛고 참회와 정화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의 눈에는 베틀을 돌려 영혼의 비단을 짜내는 수행의 도량으로 비칠 터이다. 『큰 바위 얼굴』의 어니스트가 그러했듯이, 인간은 자신이 가장 오래, 가장 정직하게 응시하는 대상을 닮아가는 숙명을 지녔다. 부와 명예라는 찰나의 환영을 좇던 이들은 끝내 그 바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흙먼지 묻은 손으로 묵묵히 이웃을 섬기며 매일 아침 바위의 온화한 눈동자를 마음에 담았던 어니스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이 그 바위의 숭고함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얼굴이 되었다.
바위를 무의미한 돌덩이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쉽고 간편한 일이다. 현대의 메마른 이성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아무것도 아님’을 증명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속에서 우주의 호흡을 느끼고 선인들의 염원을 길어 올리는 일은,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겸허한 교감의 시작이다.
형상(象)을 보고 어떤 기운을 읽어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바라보는 자의 그릇에 달렸다. 우리가 미륵바위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합장하는 까닭은 바위가 지닌 초자연적인 영험 때문이 아니다. 억겁의 비바람을 견뎌내며 한결같이 맑은 시선으로 세상을 굽어보는 그 바위의 묵중한 평정을 내 좁은 가슴 안으로 모셔오고 싶기 때문이다. 바위에 새겨진 무늬를 지극한 사랑과 선한 기도로 읽어낼 때, 차가운 바위는 비로소 따스한 생명(氣)을 얻어 우리를 축복하고, 그 믿음의 파동은 우리네 삶의 궤적을 실지로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이끌어간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결국 내 안의 풍경이다. 두타산의 거친 바위가 베틀이 되고 미륵이 되어 중생의 가슴을 적시듯,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저 침묵하는 세상의 모서리들을 어떤 마음의 눈으로 보듬을 것인가. 거친 돌을 마주하고도 그 속에서 거룩한 부처를 빚어내는 것은, 언제나 삶을 끝없이 긍정하고 사랑하려는 인간의 순정한 믿음 바로 그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