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의 ‘파티(Party)’와 한국의 ‘잔치’는 단순히 모임의 형태를 넘어, 인간관계와 소통을 바라보는 두 문화의 뿌리 깊은 차이를 보여준다. 파티는 철저히 개인이 중심이다. 참석자들은 ‘포트럭(Potluck)’처럼 각자 먹을 음식을 가볍게 준비해 온다. 호스트는 장소를 제공할 뿐, 대접해야 한다는 물질적·정신적 부채감이 적다. 파티의 진짜 목적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며, 가벼운 대화와 네트워킹을 통한 수평적 소통이다.
반면 한국의 ‘잔치’는 공동체적 정(情)과 호스트의 아낌없는 대접이 중심이다. 잔치를 여는 이는 손님들이 부족함 없이 먹고 즐기도록 온갖 음식을 상이 부러지도록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호스트의 ‘허리’는 휠지언정, 풍족하게 대접하는 것이 도리라 믿는다. 잔치에 온 손님들은 주인과 일대일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보다, 이미 친한 지인들끼리 왁자지껄 모여 ‘음식을 나누는 행위’ 그 자체와 흥겨운 분위기에 열중한다.
이러한 문화적 문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활 양식이 서구화되어도, 정서적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대접하는 잔치’와 ‘끼리끼리의 소통’ 방식은 면면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잔치’의 관성은 엉뚱하게도 가장 혁신적이어야 할 학술 공간, 즉 ‘심포지움(Symposium)’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지난 주말, 2개의 학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심포지움에 참석하며 이 거대한 ‘잔치의 관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한국의 심포지움은 본질적으로 ‘학문적 대화’나 ‘지적 상호작용’을 중시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날 무대에 올라온 논문과 논평은 무려 6개에 달했다.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그 많은 연구를 쏟아내다 보니, 발표자들은 숨 가쁘게 준비한 원고를 읽어내려가기 바빴고, 사회자는 “시간이 없다”며 연신 재촉했다. 청중들은 객석에 앉아 빽빽한 PPT 화면이나 WORD 화면을 수동적으로 바라보거나 졸음을 참을 뿐이었다. 이는 학문적 토론의 장이라기보다는, 준비한 지적 결과물(논문)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해치우는 ‘논문 잔치’에 가까웠다. 많이 차려놓았으나, 정작 꼭 필요한 ‘맛있는 소통’은 부재한 잔치상이었다.
발표자가 자기 연구를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면, 굳이 빽빽한 논문을 낭독할 필요가 없다. 대화하듯 핵심과 문제의식을 가볍게 던지고, 청중이 미리 읽어온 내용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묻고 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이 보여주고 대접하는’ 잔치 형식을 버리지 못해,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닫힌 학술 대회를 반복하고 있다.
물론 잔치 형태의 모임이 가진 장점도 있다.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고 친밀함을 높이는 데는 잔치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의 심포지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학문의 진보는 기존의 틀을 깨는 질문과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의 충돌, 즉 ‘창의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적 창의성을 자극하려면, 가볍게 의견을 던지고 경계 없이 섞이는 ‘파티’ 형태의 상호작용이 훨씬 유리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형 심포지움 방식에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참조할 방안들을 생각해보았다.
사전 공유의 일상화: 논문이나 발표 자료는 사전에 이메일이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배포하여, 참석자들이 미리 읽고 오도록 유도한다.
‘읽기’에서 ‘스토리텔링’으로: 현장 발표는 10분 내외로 요약하되, 원고를 읽는 대신 청중과 눈을 맞추며 연구의 핵심 질문(Why)과 흥미로운 발견(What)을 대화하듯 전달한다.
라운드 테이블과 스탠딩 토론: 앞만 바라보는 일렬종대의 좌석 배치를 탈피해, 자유롭게 오가며 이야기할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이나 스탠딩 파티 형식을 도입한다.
질의응답의 주객전도: 발표 시간은 줄이고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을 2~3배로 늘려, 청중이 수동적 관객이 아닌 ‘공동 연구자’로 참여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 학술 문화도 ‘많이 차려놓고 지켜보게 만드는 잔치’에서, ‘각자의 생각 조각을 들고 와 함께 나누는 파티’로 전환되어야 한다. 허례허식을 걷어내고 대화의 본질을 회복할 때, 비로소 한국의 학술장에서도 세계를 놀라게 할 창의적인 불꽃이 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