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눈은 세 개다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 보였던 2012년 영화 <피에타>로 2012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김기덕 감독은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배움이 있다. 하나는 '노동'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든 내가 상처를 준 사람이든. 세 번째는 '자연'이다. 지금 자연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데, 자연은 엄청난 가르침을 준다. 나무 한 그루, 개구리 한 마리가 엄청난 깨달음과 위로를 준다.“ 이 인터뷰에서 보듯 김기덕 감독은 영화제 최고상을 받은 것만큼이나 학문 전반에 대한 통찰을 다 한듯하다. 노동, 사람, 자연은 각각 사회과학, 인문과학,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이 노동, 사람, 자연을 세 가지 배움으로 삼았다면 초등학교만 마친 그는 이미 학문 전반을 아울러 깨닫고 있었던 인문학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인문학은 모름지기 학문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자 열 길 사람 속을 꿰차고 들어앉으려고 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넓고 깊다. 김기덕 영화에 대한 이야기나 김기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는 사람 혹은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하나 그 앎이 충분하지 못하다. 김기덕의 말처럼 나무 한 그루, 개구리 한 마리가 엄청난 깨달음을 주고 위로를 주지만 노동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자연에 대해서도 우리의 앎은 여전히 미숙하기 그지없고 볼품없다.
우리의 앎만이 아니다. 눈이 정면에 위치해 있는 인간의 눈은 물고기의 눈보다 보는 시야가 좁다. 물론 인간에게는 나를 보는 눈, 너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세 개가 있으니 인간의 눈은 어떤 의미에서 물고기의 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눈은 마음의 눈일 뿐이다. 인간은 세 개의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얼굴에 있는 두 개의 눈과 목덜미에 있는 눈을 그린 과학영화에만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신체적으로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세 개의 눈을 인간이 갖고 있다니 괴기하고 공포스럽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프랑스의 특이한 사상가 조르쥬 바타이유(1867-1962)는 원숭이를 연구한 짧은 논문에서 송과안pineal eye을 제 3의 눈으로 명명했다. 마치 생긴 모양이 작은 솔방울을 닮았다고 하여 의학적으로 송과선松果腺(pineal gland)이라 불리고, 솔방울샘, 송과체라고도 불리는 이 신체 기관은 인간이 깨어나고 잠을 자게 하며 계절마다 육체를 조정해주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유도 멜라토닌을 생산하는 내분비기관이다. 인간의 송과선은 대뇌 밑, 간뇌의 시상 상부에 있는데 송과선에서는 죽은 세포를 살려주는 미량의 물질인 프로스터그랜딘(prostagrandin)이 방출된다. 이 물질은 환상의 약이라 하여 현재 세계 각국에서 연구 중이지만 화학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고 오로지 송과선에서만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송과선에 대해서는 이미 데카트르가 그의 저작 <인간론>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두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장소라고 했지만 조르쥬 바타이유는 이 송과선을 두고 제 3의 눈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글에서 눈의 맹점에 관한 이야기를 한 바 있지만 조르쥬 바타이유도 눈의 맹점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조르쥬 바타이유는 유별나게 ‘눈’에 집착하던 사상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눈의 맹점을 넘어 지성의 맹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지적인 실명失明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문학적으로 곱씹을만한 구절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유난히 머리 두개골 윗부분을 조심해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볼록볼록 움직이던 곳이지만 나이가 들면 굳어 버린다. 아이를 재울 때 잘못 재워 이곳을 막아 버리기라도 하면 아이가 죽는 사고가 난다. 이 곳과 양 눈썹 사이 이마의 움폭 들어간 부분이 가로 세로로 만난 머리 안 쪽에 있는 송과선은 바타이유가 말한 대로 제 3의 눈으로서 데카르트나 바타이유가 말하기 이전에도 문화와 수행체계에 따라 명칭은 다를지라도 동양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개념이었다. 중국에서는 송과선을 두고 천목天目이라 부른다. 인도에서는 ‘야즈나 차크라’라고 한다. 선도에서는 ‘상단전’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 ‘영안’, ‘신안’, ‘천안’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상을 보면 눈썹 사이에 빨간 점을 그려 넣거나 보석 모양의 유리를 박아 넣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제3의 눈인 송과선이다.
성인에게는 이 제 3의 눈이 열려 있지 않지만 명상, 요가 등 수련을 한 사람들에게는 제 3의 눈이 열려 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열려 있던 것이 닫힌 것이니 다시 열었다고 해야 한다. 이 제 3의 눈을 열게 되면 다음과 같은 능력이 발달한다. 직관력, 신통력, 텔레파시 같은 천리안, 예지력, 투시력, 통찰력 등으로 불릴 수 있는 기능들이다. 제3의 눈은 우주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눈이 빛을 받아 들여 전기신호로 바꾸듯이 원래 송과선은 우주의 빛을 받아들이던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 3의 눈이 굳어져 닫혀 버렸으니 텔레파시 능력 등을 가질 수 없다. 제 3의 눈이 그려져 있는 앞의 그림이 기괴해 보이듯이 인간의 눈은 원래 세 개이고 제 3의 눈에 엄청난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기괴하고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다. 제 3의 눈이 열려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면 투시 등 상상을 초월할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수련 이야기는 접어둔다 치더라도 바타이유가 말하는 제 3의 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상상해 보자. 만일 퇴화되었던 제 3의 눈이 자라나 이마를 뚫고 나오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두 개의 눈으로는 결코 마주할 수 없었던 것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타이유가 제 3의 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투시 같은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두 가지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바타이유는 태양과 죽음을 응시하지 못하고 눈을 돌리는 기존의 두 개의 눈이 아니라 태양과 죽음을 응시할 수 있고 그리하여 볼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신성한 것을 마주보게 되는 제 3의 눈을 갈망했다. 하늘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태양이라면 눈은 두개골의 정점에 있다. 태양과 눈은 수직적인 구조 속에 있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인간은 땅에 바짝 몸을 붙이고 사는 생명체와 다르다. 주지하다시피 직립의 인간은 수평적인 시각을 갖고 사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수직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수직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인간은 정신적이고 관념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을 신봉해 왔다. 제 3의 눈도 수직적인 시각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 바타이유가 수평적인 시각과 수직적인 시각을 언급하는 이유는 죽음본능과 폭력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다. 인간 특유의 수직적 자세를 수평적으로 회전시켜 낮게 전락시키려는 충동을 두고 바타이유는 죽음 본능이자 폭력이라고 부른다. 수직적 시각이 수평적 시각으로 변하고 정신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렇게 변하는 것이 폭력이라 하여 바타이유가 정신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보다는 몸에 깃든 신성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곳을 송과선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인간은 두 개의 눈처럼 정신과 육체 두 개로 대별할 수 없는 존재다. 양안시차 이야기(좌안과 우안이 공간적으로 약간 다른 위치에 있으므로 물체를 바라볼 때 약간씩 서로 다른 영상을 관측하게 되는 것)가 있듯이 두 개의 눈 또한 우리가 생각하듯이 대칭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그 대칭성을 파괴하는 제 3의 눈도 있다. 인간을 정신과 육체 두 개로 대별하는 것은 육체보다 정신을 우선시하려는 수직적인 시각의 발로다. 수직적인 시각과 정신적인 것은 수평적인 시각과 동물적인 것으로 전락해야 한다. 그리하여 금기를 위반하고 거기서 인간의 신성성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라고 하며 키득거렸지만 바타이유는 거기서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색을 발견한다. 그것도 신성한 쾌락의 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