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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이 왕조의 팽창과 송나라의 대응 : 탕롱에서 시작된 패권 경쟁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10-27 15:40:46

이 태종 시기에 탕롱 (하노이)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1010년 베트남의 첫 장기 왕조이자 응오(吳), 딘(丁), 레(黎) 왕조에 이어 4번째 독립 왕조인 이(李) 왕조(1009~1225)는 태조(太祖, 1009~1028) 이 꽁 우언(Ly Cong Uan, 李公蘊)은 즉위 즉시 현 하노이에 해당하는 꼬 로아에 수도를 정했었다.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를 가진 이 수도의 이름은 탕롱(Thang Long, 昇龍)으로, 자신들의 선조를 용으로 삼고 있는 베트남 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이후 이 태조는 새로운 수도의 이름에서 암시되듯, 베트남 장기 왕조의 출현은 곧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또 하나의 용(황제)이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명나라 시대의 거장인 구영(仇英)이 그린 《직공도권(職貢圖卷)》의 일부, 출처 : Denver Art Museum

그러나 이 태조는 참파를 정벌하고 송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중원에 대한 강경책을 세웠지만 1028년 이 태종은 탕롱에서 즉위하면서 초반에는 중국 송나라에 먼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고 결국 송나라는 이를 받아들여 이 태종을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했다. 이 태종은 점차 송나라와의 관계에서 있어서는 왕이라 칭하고, 책봉을 받으며 충실하게 주로 안남국(安南國)이라는 이름으로 조공을 약속하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동아시아 내 중국의 지위인 천자, 황제의 지위를 그대로 적용했다. 스스로 황제라 했던 태종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국명은 주로 다이 비엣(Dai Viet, 大越)이라 칭하면서 주변의 라오스, 참파, 캄보디아, 그리고 북부 변방 지대나 중부 고원 지대의 소 공국들을 왕으로 삼아 그들 위에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남방의 새로운 패자를 인정할 수 없었던 송나라는 1031년 이 왕조에 한 번 더 출병을 결정하게 된다. 한편 동남아시아에서 제국을 이루었던 이 왕조의 기마, 보병 군단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있다. 이는 당시 베트남 인들의 생활 자체를 곧 군사훈련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에 다른 정착 국가의 군대처럼 별도의 격리와 훈련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청소년들이 일정 기간동안 군사집단인 딘 쯔엉(Dihn Trung)에서 공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정식 훈련이 있다기보다는 딘 쯔엉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곧 훈련이었다. 딘 쯔엉(Dihn Trung)은 이 왕조의 집약적인 군사 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하노이 탕롱 외곽에 위치한 쭝엔은 이 왕조 성종 시기 군기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는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양의 군수보급품을 보내줬다. 고대 남월, 월(越) 세력 존재의 명분인 이유를 내세워 남월 인이 많이 거주하는 광서, 광동 지역과 남부 해남도를 이 왕조에, 강족이 대다수인 파촉의 서쪽 지역, 오늘날 란주를 비롯한 사천 서방 지역을 서하에 넘겼다. 그러면서 송나라는 1010년 이 왕조가 건국된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월인들 과의 남방 국경 분쟁을 근원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광서, 광동태수와 란주자사, 한중태수 등은 사임했다. 물론 이러한 협정에는 베트남에 의해 광서, 운남, 귀주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정작 베트남은 어떠한 방법으로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문서도 남기지 않았다. 


베트남 이 왕조가 이처럼 급속하게 대외 팽창에 나설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단지 전쟁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까지 이 왕조도 전쟁을 벌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태종 말년에 진형까지 변경하고 기마도 수입하며 최강의 군대를 보유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당장 송나라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그러한 사실을 어느 나라보다 성종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에서 패전 했던 대리국과 송나라는 이 왕조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한 부분이 많았던 반면 자신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단 전쟁을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것이고 당연히 약소 소수민족의 주권과 일반 백성들의 평안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었다. 


송나라 또한 침략 의도를 분명히 한 베트남을 단독으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즉각 월(越) 계통 주민들의 감시에 들어감과 동시에 국경 방어의 강화에 나섰다. 그러한 방어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티베트 토번 및 서하와의 군사 동맹을 믿었기 때문이다. 광서 지역 합병 사태에서 나타난 것 같이 태종 때 대리국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병했다가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패배한 서하는 베트남과의 군사적 충돌을 철저히 피했다. 또 하나의 강국인 티베트 지역을 영유한 토번도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060년 성종이 광서 지역 할양과 옛 남월 영토 회복을 명분으로 동원령을 선포하자 토번도 송나라 뿐 아니라 자신들도 직접적인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송나라 지원을 명분으로 하여 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실제로 군대를 준비한 베트남과 달리 토번은 단지 요식적인 행위에 그치고 있었고 서하는 여전히 베트남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받은 바 없기 때문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쩐 낀의 전략으로 광동 지역의 월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광동태수가 군을 파견하여 강경 진압에 나서 제압되었다. 사실 이는 또 다른 침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베트남의 모의에 의한 것이었다. 베트남은 광동태수의 월인 반란 사건에 대한 강경 진압을 구실로 광동을 침공했다. 한편 송나라 조정은 멈추지 않는 베트남의 원정에 경악했다. 전쟁의 위기가 해소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송나라는 이제 베트남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상태라면 당장 강경하게 대처하고 군대 증강에 나서야 했지만 문제는 이러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문관들이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적거렸다는 사실이다. 송나라의 이러한 연이은 유화적인 태도는 베트남이 광동 지역에 대한 침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후 베트남 이 왕조의 제3대 황제인 성종(聖宗)은 그는 이 왕조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부친인 태종과 더불어 손꼽히는 명군이다. 대월(Đại Việt, 大越)이란 국호의 창시자였다. 부친인 태종이 조부인 태조의 뒤를 이어서 황위를 계승할 때부터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을 정도로 인재였다고 한다. 


성종은 부친을 닮아서 총명했다. 역사, 문학, 음악, 무술 등을 두루 섭렵하여 그 소양이 베트남 국내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한 학문적 소양, 정치적, 군사적 소양을 한꺼번에 갖춘 군주는 일찍이 거의 없었을 정도이다. 1054년, 부친인 태종이 사망하자, 아들 성종이 이후에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성종이 빈민층들을 위한 자애로운 정책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성종은 황실에서 일하는 종들을 보고는 죄수들에게 먹을 식량들과 덮을 것들을 하사하라고 명령하여 그들이 추위와 근기에 시달리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황실의 공주들이 평민과 결혼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그 외에도 죄인들에게 되도록이면 관대한 처벌을 내리려고 노력했고,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유교에 심취하여서 문묘를 확대시켜 운영하고, 당대의 학자들과 나라의 유학을 직접 발전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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