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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와 비르투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10-30 18:28:14
  • 수정 2026-10-31 08:58:22


우연히 몇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던 이야기다. "성공하는 데 운(運)과 기(技)가 각각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할까?"라는 질문에 한 선배가 당당하게 답했다. 자신의 경험상 운이 90%이고 노력은 10% 남짓인데, 그마저도 후하게 쳐준 것이라는 말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 고등 교육을 받은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잡는 것 모두가 온전히 운이라는 논리다. 그 선배는 생물학적 유전자와 사회적 환경의 절대적 영향력을 당연시하며, 삶의 성패가 우연한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나는 노력이 정당한 대가를 얻는 일은 극히 드물다며, 끝내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다"거나 "금수저, 은수저" 같은 자조 섞인 발언을 이어갔다. 개인의 노력을 사실상 무화(無化)하는 결론이다. 이쯤 되면 고대인들처럼 사주팔자와 운명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 최첨단 사회에 만연한 이 기묘한 숙명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대인과 근대인을 가르는 핵심 기준은 삶을 이끄는 동력을 '운명'에서 찾느냐, '개인의 노력'에서 찾느냐에 있다.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Oedipus) 신화는 고대인들에게 운명(Fate)을 비켜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키타이론 산속에 버려진다. 그러나 갓난아기를 가엾게 여긴 양치기가 이웃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아이를 건네고, 목동이 그를 왕실에 바치면서 오이디푸스는 왕자로 자라난다. 청년이 된 그는 끔찍한 신탁을 피하고자 스스로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향하지만, 세 갈래 길에서 우연히 시비가 붙은 노인을 살해하고 만다. 그가 바로 테베의 왕이자 자신의 친아버지였다. 이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그는 왕위에 오르고 선왕의 왕비, 즉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다. 신탁의 저주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건만, 바로 그 노력 때문에 신탁이 여지없이 실현된 것이다. 20세기의 탁월한 수학자이자 형이상학자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명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그리스 비극의 이 가혹한 운명관이 근대 과학을 지배하는 '철(鐵)의 자연법칙'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통찰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이러한 고대적 운명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근대인이자, 근대 정치철학의 새 지평을 연 사상가다. 고대인이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na)의 절대적 지배에 굴복했다면, 근대인은 자신의 주체적 역량과 기량인 비르투(Virtù)를 신뢰한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탁월한 역량이 운명의 일방적인 폭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범람하여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거센 강물을 떠올려 보자. 평소 성실하게 둑을 쌓고 운하를 파두면 운명처럼 반복되던 홍수의 재앙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여신이 운명에 순응하는 노인보다는 과감하게 운명을 개척하는 젊은이를 더 편애하므로, 때로는 여신을 거칠게 다루어서라도 삶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근대인은 삶을 옥죄던 신탁과 신(God)의 섭리, 봉건적 신분 질서와 자연환경에 맞서며 스스로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 항해 중 난파당해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해 보자. 그곳에는 그의 생존을 보장해 줄 영국의 종교도, 사회적 전통이나 관습도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이성으로 생존의 설계도를 그렸고, 두 손과 발로 노동을 투여해 그것을 현실에 구현했다. 막막하고 적대적이던 무인도는 점차 그의 합리적 통제 아래 놓인 삶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자의식의 주체인 근대인 역시 로빈슨 크루소처럼 자신의 이성과 노동으로 종교개혁을 완수하고,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으로 중세 봉건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통해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일구어냈다. 근대라는 거대한 실험은 더 이상 운명에 안주하지 않는 인간 역량(Virtù)의 위대한 실현 과정이었고, 서구인에게 근대는 무한한 진보를 약속하는 낙관주의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눈부신 발전이 과연 근대인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보장해 주었는가? 산업화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극단적 대립과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이 모순을 극복하고자 근대의 내부에서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탄생했으나, 그 역시 실패한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극대화했지만, 동시에 생태계를 파괴하여 오늘날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를 불러왔다. 나아가 20세기의 양대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이 쌓아 올린 문명이 인간 자신의 손으로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견고해진 자본의 성벽 앞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세습된 부의 격차를 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팽배하다.

이 일련의 사태를 돌아보면 인간의 노력과 역량이라는 것에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인간이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세계를 개척해 왔지만, 결국 우리 앞에 되돌아온 것은 통제 불가능한 거대한 위기와 구조적 불평등이라는 산적한 문제더미다. 근대인이 추방했다고 믿었던 포르투나(운명과 우연)가 기후 재앙과 자본의 세습이라는 현대적 가면을 쓰고 다시금 비르투(인간의 노력)를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경제 전문지 이름이 다름 아닌 《포츈(Fortune)》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조차 부와 성공은 '기삼(技三)'의 노력보다 '운칠(運七)'의 요행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해서 붙인 이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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