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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의 차이
  • 이득재
  • 등록 2026-10-31 10:26:30

[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

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의 차이

 

아파트 올라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아이가 말했다. “착하고 아름다운 생활이라고 써야 하는데 착하고를 안 써서 틀렸어, 그래서 87점 받았어. 현이는 91점이라던데.” 벌써 10년도 훨씬 전에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라는 책을 썼지만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 드라마에 <넘버 원 학교>라는 게 있다. 겉으로는 우리나라 예전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유사한데 선생인 학생 돈을 갈취하고 학부모한테서 뇌물을 받는다. 두 드라마를 가지고 러시아에서 한국어 배우러 온 학생하고 대학원 수업을 하는데 러시아에는 SKY 대학 같은 얘기는 없다고 한다. 교육에서 철저한 신분제가 관철되는 곳은 우리나라나 일본 두 나라 정도인 모양이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배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교육은 철저하게 재현 교육이기 때문이다. 기술 교과목에서 톱니바퀴 종류를 가르치고 팬티와 슬립이 같은 종류의 속옷인가를 묻는다. 대한민국 교육이 주입식 교육이고 반복 학습 교육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교육은 재현교육이다. 시험 전 날 외웠던 것을 다음 날 시험지 위에 오바이트 하듯 쏟아내면 그만이다. 인간의 뇌는 관심 없는 것은 워킹 메모리에서 지워버리건만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관심 없어도 점수 올려 SKY 대학 가자면 소용없다. 무조건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줄 아는 모양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골든 벨 프로그램이나 장학퀴즈에 나오는 정보에 불과하다. 지식이란 정보들을 가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져야 지식이라 할 수 있다. ‘폭탄을 맞으면 죽는다’는 것은 정보다. 폭탄을 어떻게 만들고 어디에 쓸 것이며 폭탄이 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기만 한다. 교사도 교수도 그저 정보를 전달하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그 정보에 대한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운운 하는 말이 가장 전형적인 언사다. 톱니바퀴 종류처럼 폭탄의 종류만 외워 해답만 찾으면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다. 지식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Knowledge인데 이 단어는 안다know는 것이 모였다ledge는 것이다. 즉 정보의 축적이다. 아는 게 많다고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다. 

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배운다는 것은 마치 ‘수영’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수영을 배운다고 말하지 수영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영에 대해 좀 알지”라고 말하는 것은 수영을 많이 배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수영이란 무엇인가? 헤엄치기다.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문제가 있다고 치자. 그 때 임진왜란과 1592년 사이에는 재현과 일치관계가 존재한다. 마치 거울처럼. 거울의 저 쪽에서 나온 정보를 맞추기만 하면 점수가 올라간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이 쌓이면 나는 졸지에 ‘걸어 다니는 사전’이 된다. 배움에는 이러한 일치관계나 재현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헤엄치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신체와 물이 만나고 마주치는 과정이다. 헤엄치는 인간의 신체와 물결 사이에는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가 존재한다. 신체의 운동과 물결의 운동 사이에 일치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신체가 그 미세한 물결의 흐름에 일일이 자신의 몸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반드시 가르쳐줘야만 헤엄치기가 가능한 사람이 있지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개구리헤엄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헤엄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배움에는 많이 알고 있는 교사가 필요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올바른 교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나처럼 해 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 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

 다

 

나처럼 해 보라는 얘기는 나를 따라 내가 하는 대로 나를 재현하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참된 교사가 될 수 없다.

 

배운다는 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만나 일어나는 신체의 활동이지 어떤 해답의 규칙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배운다는 것은 학생이 세상과 마주치는 것이고 학생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얘기를 다시 들어 보자.

 

 하나의 물결과 몸짓에서도 다른 물결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포괄하는 

 차이, 이 차이를 그렇게 구성된 반복의 공간으로 운반하는 반복이다. 배운다

 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교사가 학생에게 “눈 깔아‘라고 명령하고 학생의 ’문제 제기‘를 원천 봉쇄한다. 배움의 기회를 원천봉쇄하면서 정보만 축적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다. 문제를 발견해도 그것을 제기하고 해결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 학생들에게 창의성이 생겨날 턱이 없다. 미국의 어느 학교에서는 플로리다 반도에 석유를 실어나르는 배가 뒤집혀 바다가 오염되었을 때 이 문제에 미국의 각 주는 어떻게 대처했고 미국 정부, 각 마을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학생들에게 알아보라고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 도서관 이용법 등 - 을 제시해준 후 기말고사 쯤에 발표하게 한다. 그 동안 수업도 시험도 모두 없다. 요즘 같은 SNS 시대에 정보는 학생들이 의심만 품으면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를 가공하고 활용하는 능력의 부족이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수십 년 전에 자기 집 차고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수많은 컴퓨터를 버리고 태워버린 일은 유명한 일화 아닌가. 배움에는 정답이 없다. 올바른 답은 없고 요즘 말로 말하면 ’착한 답‘만 있을 뿐이다. 

인지과학에 ‘발제적 지식’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Enactive Knowledge라고 하는데 Enaction은 인지과학에서 중요한 용어다. 여기서 enactive를 번역한 발제라는 뜻은 수업 발제할 때의 발제가 아니라 행위로부터 산출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뭔가를 느끼고 나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지과학에서는 느끼기 전에 먼저 행위, 움직임이 있다고 본다. 영어 단어의 emotion에는 motion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흔히 정서로 번역되는 emotion은 움직임을 뜻하는 단어다. 느낌feeling은 정서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움직임이 먼저 있고 나서 감정feeling이 생겨나는 것이다. 환경 안에서 지각 - 행위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정보인 발제적 지식에서 인간은 외부의 움직임에 나의 신체만 맞출 줄 알면 된다. 이것은 정보, 지식, 죽어 있는 페이퍼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체를 움직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발제적 지식이다. 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하거나 스포츠를 하면서 혹은 대상을 조작하는 모터 기술 등이 발제적 지식에 속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제적 지식을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공대 학생들만 자전거를 타는 것은 아닌데도 이것은 공대의 몫이라고 방기한다. 

발제적 지식은 지식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배움의 영역에 속한다. 자전거를 타는 과정을 배우고 그것이 세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배운다는 측면에서 자전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헤엄치기처럼 자전거를 배우는 것이다. 시쳇말로 하면 ‘산 교육’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아니 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문제 풀이 식 교육이 관철된다. 거기에서는 문제 제기의 능력만이 아니라 사유의 능력이 거세된다. 신체가 물결과 마주치듯이 대상과 마주쳐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대한민국 교육에서 불가능하다. 어려서부터 국어, 영어, 수학 등 많은 교과목 뿐만 아니라 피아노, 태권도, 골프 등을 가르치며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강요하는 곳에서 생각하고 사유할 줄 아는 능력이 탄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고양이는 평상시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다가 위협이 생기면 이를 드러내며 저항한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머릿속에 발톱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다. 사유란 발톱과 같다. 그러자면 뭔가가 아이들의 머릿속을 침입해야 한다. 인문학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생각과 사유의 힘이 고양이 발톱처럼 머릿속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소명이다. 생각하고 사유할 줄 아는 능력의 탄생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인문학이다. 얼마 전부터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인문학의 위기니 하면서 대학이 장사 안 되는 과는 없애거나 통폐합한 후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붕괴한 인문학을 재생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경제 경영에 활용하자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최근 삼성에서는 인문학 인재까지 뽑는 모양이다. 인문학 인재란 무엇일까? 책을 많이 읽어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이 인문학 인재일까? 아니면 그것은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또 다른 형태일까? 인문학은 앎의 넓이보다 배움의 깊이가 있고, 생각, 사고, 사유의 불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며 인문학 인재 등의 이야기는 이 점을 토대로 시작되어야 사상누각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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