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

부자 되세요!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나온 지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세월 참 빠르다.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터널로 진입하던 그 시절 사람들도 욕망을 충족시키는 질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욕망의 본질이 지연이었던가. 욕망은 한 때 돈의 쾌락을 가져다주었지만 욕망 충족은 지연되었고 그 사이 사람들은 지쳐갔다. 2008년 금융위기가 몰아친 후 하우스 푸어 얘기가 나왔고 모두가 부자가 될 것 같던 꿈은 한낱 신기루였음이 드러났다. 부자의 꿈이 부서진 사람들은 딴 곳으로 눈을 돌렸다. 힐링 열풍은 그래서 일어났다. 신체의 욕망을 한껏 부풀리려던 꿈, 쾌락을 추구하며 고통을 피하려던 꿈이 상처를 입자 상처 치유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힐링이 진정한 대안인가. 어찌 보면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피하고 또 다시 쾌락을 꿈꾸려고 준비하는 운동 아닐까. 지연이 그 본질일망정 욕망은 끝없이 확장해 나가고 경계를 넓혀 나가는 운동 아니던가. 부자 되기나 힐링은 고통을 피하려는 우회로일 따름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책 『무통문명론』은 부자 되기나 힐링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고통과 쾌락의 변증법에 주목하고 고통 없는 문명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얻자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인간은 과연 고통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령 이빨이 아파 밤새 끙끙거리는 사람이 게보린을 먹지 않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까? 누구나 게보린을 먹고 고통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얼마 전 학교 비정규직 환경미화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환경미화원들이 청소를 거부하자 학교 직원들이 동원되었고 과 조교들까지도 쓰레기 청소를 했다. 환경미화원에 대한 불만이 나타났다. 필자가 툴툴거리는 조교에게 돈 백도 못 받는 환경미화원이 네 부모라고 생각해 보라고 하자 대뜸 우리 부모는 그러지 않을 거니까, 환경미화원이 되지 않을 거니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말에 속으로 열 받던 필자는 모두가 이렇게 경제적 고통이 나한테는 닥치지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통이든 경제적 고통이든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고통을 우회하려고 하는구나. 누가 노동자가 되려고 하고 돈 백도 안되는 돈을 받으려고 하겠는가마는, 그렇다면 실제로 저임금을 받는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 사람들이라고 고통을 피하고 싶지 않겠는가.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책은 이러한 경제적 고통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지만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자본의 자기증식운동이 욕망과 쾌락의 파이를 키우고 고통을 애써 피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무통’을 키워드로 하여 현대 생활 속에 두루두루 개입한 문화적 - 제도적 무통화 장치를 드러내고 무통격류에 휩쓸려 살아가는 현대 문명의 문제를 다각도로 고찰한다. 사람이 힐링과 웰빙을 통해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치통약 같은 문명의 이기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1930년대 폰 아이크슈테트von Eickstedt(1892-1965)가 사용한 ‘자기가축화’란 말을 빌어 인간이 스스로를 가축으로 만드는 자기가축화를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란 인간이 곧 가축이 되는 것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말을 들어 보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인간은 가축공장의 가축처럼 보인다. 좁은 우리에 갇혀 온도가
인공적으로 조절되고 음식은 자동공급 장치를 통해 충분히 제공되며 먹고 자는 것만
이 생활의 전부인 닭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인간이 가축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
인간에게도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힐링 열풍과 넘쳐나는 웰빙 식품, 아파트 이름이 웰리치wellrich인 것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욕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다들 잘 나가고 싶어 하고 자기나 자기 가족들만큼은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 건강, 무병장수가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긴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은 통증, 아픔, 불안, 공포에서 탈출하고자 애쓴다. 주변의 통증은 웬만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애써 채널을 돌린다. 치통이 괴로워 고통을 잊고자 게보린을 먹듯이 고통을 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일까. 중환자실에 누워 영양 섭취와 약 처방을 받으며 온도가 쾌적한 방 안에서 기분 좋게 잠만 청하는 환자는 닭 같은 가축의 모습과 흡사하다. 여기에는 통증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가축을 가축으로 기르고 거기서 인간 스스로를 가축으로 기르고 관리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반려동물로 키우고 옷 입히고 사료를 주거나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려가는 것이나 인간이나 무엇이 다를까. 그런데 현대 문명의 종착지가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대로 인간의 자기가축화라면 뭔가가 꺼림칙하긴 하다. 문명을 이 종착지까지 끌고 온 것은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고통이 적고 쾌락이 가득한 인생, 방망이를 대신한 전자자동세탁기, 해피 엔딩,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욕망 등 욕망의 자맥질에 의해 종착역에 도달한 문명의 끝이, 가축이라니, 인간의 가축화라니 꺼림칙하고 허망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통의 시대는 무감을 낳고 무감은 사이코패스를 낳는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쫓는 순간 사람들은 감정을 상실하고 사이코패스가 되어 간다. 사이코패스가 죽임의 욕망이 절정에 이른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존재다. 아주 가끔씩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99.9%의 절대 다수가 고통을 피해 쾌락과 욕망의 길로 접어든다. 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예 화성인이 될 정도다.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결코 두고 볼 수 없다는, 나에게 고통이 산사태처럼 덮치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도 거기서 한 몫 한다.
모리오카 마사히로에 따르면 무통문명에는 무통문명을 작동시키는 몇 가지 원리가 있다. 첫째가 ‘존재 말소’다. 이것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간단한 원리다. 이빨이 아프면 게보린을 먹는 것이다. 매일 보살펴야 할 노인이 고통스럽다면 안락사 시키면 되고 출생 전 태아가 중증장애자임을 알고 나서 그 아이의 장래와 자신의 인생이 고통스럽게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공임신중절을 하면 된다. 문명의 이기인 초음파 장치가 고통의 소멸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두 번째는 ‘예방적 무통화’의 시도다. 앞으로 엄습할 고통을 용의주도하게 예축하여 미래에 생길 그 고통을 지금 여기서 하나씩 존재 말소 시켜가는 예방조치가 그것이다. 힐링과 웰빙 열풍은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신체적 경제적 고통에 대비하는 예방조치다. 도래하지 않는 미래에 투자하는 펀드 투자도 고통을 미리 막으려는 예방조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눈가림’이다. 고통의 원인을 존재 말소하거나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고통이 떡 하니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 자체를 기억에서 지우려고 한다.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한다”는 것은 눈가림의 높은 경지에 올라선 결과다. 이 정도 되면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부인하게 된다. 존재를 말소하고 예방 조치를 취하고 눈가림을 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뜨물처럼 떠오른 고통을 없애는 해독과 예정조화의 원리가 남아 있다. 눈앞에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고통이 독이 해독되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무감한 방관자가 되면 된다. 예정조화란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 결국 나를 돕는 길이 되기에 고통에 동참한다. 예정조화는 타인을 돕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돕는 것을 말한다.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무통문명의 이러한 원리들은 사회 전체가 무통화의 격류에 휩쓸려 가게 만든다. 세포의 대사작용처럼 사회 전체가 하나의 세포가 되어 무통화 작업을 벌인다. 거기다가 문화적 - 제도적으로 넘쳐나는 무통화 장치 - 게임, 도박, 마약, 섹스 등 - 는 사회 전체의 무통화 과정을 더욱 더 촉진한다.
1985년 후지다 쇼죠는 「‘안락’으로서의 전체주의」라는 글을 썼다. 후지다는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안락주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을 일소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은 청산 대상이다.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일에 관여되기를 두려워하고 게다가 그 두려움을 스스로 인정하기를 피하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기쁨’의 감정을 잃어간다고 후지다는 주장한다. 오늘날 세상은 고통, 불안, 통증, 공포, 아픔, 불쾌, 혐오 등과 쾌락, 안락, 욕망, 안전 등으로 철저하게 양극화되어 있는 듯하다. 드라마 <직장의 신>에 나오는 장규직과 계약직 미스 김, 정주리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양극화, 조절주의 경제학자인 알랭 리피예츠가 말한 모래사회hourglass society도 문제지만 무통, 무감의 감정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의 전체주의’도 문제다. 여기에는 공감이 개입할 여지도 고통 분담의 슬로건이 개입할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는 empathy로서의 공감은커녕 그저 옆에서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나 하는sympathy로서의 공감도 턱 없이 부족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공감 프로젝트’ 같은 프로그램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가 감정의 전체주의 사회로 전락해 있음을 말해준다. 무통화의 윈리가 지배하고 무통화 장치가 도처에 널브러져 있는 이 ‘무통’의 시대에 무통, 무감이라는 감정의 전체주의,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사회 전체의 무통화를 거둬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야흐로 힐링의 시대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힐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웰빙도 마찬가지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통문명에서 ‘치유’는 가능성이 아니다. ‘치유’는 무통문명의 흐름에 스스로를 적응
시켜 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자신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생명력’을 두 번 다시 일
어설 수 없도록 무력하해 가는 일이다. 무통문명에는 ‘병’에 그 가능성이 감춰져 있
다. ‘병’을 짊어진 채, 무통화 흐름에 역행하여 쉴 새 없이 출구를 찾으려는 고독한
싸움에 진정한 가능성이 있다. 병을 앓는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병을 치료해서
치유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절망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 식으로 말하면 힐링은 무통문명에 적응하는 것일 뿐이지 사회 전체의 무통화에 역행하거나 그것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힐링은 사회 전체의 무통화에 순응하는 것이자 그것을 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 식으로 다시 말하면 힐링은 무통문명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힐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진짜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를 관리한 후에 찾아오는 관리의 기쁨이다. 생각해 보자. 오늘날 현대 사회는 신체의 관리를 넘어 생명까지도 관리한다. 그래서 ‘생명의 품질관리학’ 자격증을 따야하는 시대가 바로 올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출생 전 생명의 품질을 검사받고 관리 받은 후 태어나는 무통의 시대에는 안전한 유전자 조작과 태아 치료가 보급된다.
그렇다면 이 무통문명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로 전환한 이 시대에 우리는 신체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힐링과 웰빙을 넘어 생명으로 나가야 한다. 생명의 질긴 힘을 이용하여 거기서 터져 나오는 기쁨, 거기서 분출하는 욕망의 힘을 맛보아야 한다. 우리이게는 괴로워하면서도 이겨내야 하는 고통이 필요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청춘으로의 도피 행각은 중지되어야 한다. 고통을 참고 견디면 기쁨이 찾아온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괴로움이 괴로운 고통을 이겨내는 길이다.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아픈 청춘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청춘이라는 말은 청춘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다. 또 다시 감정의 양극화에 빠지고 무통문명에 빠른 속도로 적응해갈 뿐이다.
우리는 아파해야 한다. 고통과 적극 대면해야 한다. 고통은 힐링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고 내가 주체로 설 수 있을 때 그것은 자연히 소멸된다. 그것은 젊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고통의 노예가 아니라 고통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무통문명이 나의 생명력을 포식하고 갉아먹는 시대다. 감정을 온통 무통의 전체주의로 몰아가고 있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나의 넘쳐나는 에너지로서의 생명력을 힐링과 웰빙이라는 좁은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무통문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