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엿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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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아니면 종로5가였을 겁니다. 길거리 노점상 좌판에 고물 엿가위가 여러 개 나와 있었어요. 이것저것 집어 들고 절컹절컹 해봤는데 그 중 하나가 내 손에 맞는지 소리가 잘 났어요. 노점 상인도 잘 한다고 부추겨요. 그걸 사서 절컹절컹 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아예 엿장수가 되고 싶어지더군요.
책가방 대신 엿판을 짊어지고 엿가위를 절컹거리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나중엔 절에 가고 싶었어요. 그때 제가 고3이었어요. 학교 다니기 싫어서 거의 미쳤을 때였죠. 그날도 학교 담을 넘어 거리로 나와 무작정 돌아다니고 있었던 겁니다.
엿가위를 사기 얼마 전에 효봉 스님 얘기를 읽었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 영어 교사였던 박희진 선생님이 낸 시집에 효봉 스님 일대기가 장시(長詩)로 수록되어 있었거든요. 제목이 효봉대종사송(曉峰大宗師頌)입니다. 효봉 스님이 왜정 때 평양 무슨 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엿장수가 되었다는 얘기가 거기 나와요. 엿장수로 3년을 떠돌다가 금강산에 이르러 신계사에 머물던 석두 스님을 찾아갔다는 얘기를 읽으니 ‘이거구나’ 싶었어요.
거리에서 고물 엿가위를 샀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효봉 스님이 엿장수 하면서 손에 들었던 바로 그 엿가위를 내가 찾은 거구나 싶었죠.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만 제가 원래 좀 그래요. 그 엿가위를 손에 드니 내가 효봉 스님이 되었어요. 석두 스님이 저에게 물어요. 어디서 왔냐고요. 장안사에서 왔다고 그래요. 몇 걸음에 왔냐고 물어요. 일어서서 넓은 방을 한 바퀴 휘돌고 나서 대답합니다. ‘이렇게 왔습니다’ 라고요. 얼마나 멋져요.
우리 선생님 장시에서도 그 장면이 정말 멋졌어요. 꼭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리고 금강산 같은 큰 산에서 사는 스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업 시간이 지긋지긋해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죠. 바로 절에 가서 스님들에게 또 뭘 배우는 건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3년은 엿장수로 전국을 자유롭게 마음껏 유랑한 후에 절을 찾아간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엿가위가 생기자, 학교는 죽어도 못 가겠더군요. 그때 저는 계동의 외갓집에 얹혀살면서 통학했는데, 학생 모자의 챙을 뜯어서 빵떡모자를 만들어 쓰고 물들인 미군 작업복 차림에 엿가위를 옷가지와 함께 보자기에 싸 들고 나와서는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현직 엿장수를 찾았죠. 엿이나 엿판은 어디서 사는지, 리어카나 지게를 사는 데는 얼마나 드는지 등등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간혹 보이던 엿장수들이 통 안 보이는 겁니다.
그날 밤부터 전에 몇 년 하숙했던 청량리 하숙집을 찾아가 친구 방에서 며칠 신세를 졌어요. 하숙생들과 송별회도 하고 그랬는데 왜 그렇게 늑장을 부렸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막연한 공상을 실현하자니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한 하숙생 형이 경동시장에 가면 엿 공장이 있다고 했어요. 거기 가서 알아보면 되겠다 싶어서 엿 공장을 찾아가는 길에 다른 생각이 난 겁니다. 어차피 전국을 떠돌 바에야 서울에서 시작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싶었던 거지요. 이왕이면 멀리 가서 시작하자. 우선 부산이나 목포 같은 데로 가보자. 대전이면 또 어떠냐. 이런 생각이 났던 겁니다. 그래서 서울역으로 갔죠.
돈은 좀 있었어요. 과외비를 안 내고 갖고 있었거든요. 그 돈이면 부산이든 목포든 대전이든 어디든 가서 엿장수를 시작할 밑천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목포 가는 기차표를 끊었어요. 끊고 나서 시간표를 보니 개찰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아 있었죠.
역 주변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보니 불안하고 지루했어요. 그러다 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어머니는 내가 사흘 동안 밖에서 도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알면 뭐라고 할까? 어머니에게 전할 말을 남기려고 외갓집에 전화했어요. 저 살던 집 말입니다. 외숙모가 받았어요. 우린 지금 저녁 먹는다면서 ‘밥은 먹고 다니느냐?’고 부드럽게 물어요.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굶었다는 생각이 났어요.
어디냐고 물어요. 부산이라고 둘러대야 했는데, 곧이곧대로 서울역이라고 하고는 어머니에게 전할 말을 했어요. 아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니 빨리 잊고 오래오래 행복하시라고요. 그러고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피도 눈물도’ 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을 잇기가 어려웠죠.
설마 나를 잡으라고 사람들을 보낼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군대는 갔다 왔지만 아직 대학생이던 막내 외삼촌이 운동선수였어요. 마침, 여러 명의 후배와 같이 집에 왔다가 내가 서울역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출동했던 겁니다. 서울역 광장 시계탑 앞에서 그들에게 붙들렸어요. 엿가위가 든 보자기를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죠.
먼데 숨어서 ‘바로 저놈이다’하고 조카를 지목했던 막내 외삼촌이 나타나서 보자기를 뒤졌습니다. 보자기에서 옷가지와 일기장과 엿가위가 나왔습니다. 외삼촌은 엿가위를 들고 절컹절컹 소리를 내 보더니 '이건 왜 갖고 다니냐 엿장수하려고 그러냐'며 킬킬 웃었어요.
해골
다시 학교에 갔죠. 과외도 다니고요. 과외 선생이 그때 s대학교 외교학과 1학년인데 우리와 같이 놀았어요. 과외 수업을 하는 집은 돈암동 천중이네 집이었는데 천중이 아버지는 전방 사단의 연대장이었고, 천중이 어머니는 자주 관사에 가서 여러 날 머물다가 돌아오곤 했죠. 그래서 그 집에는 어른이 없는 날이 많았어요.
말이 과외지 공부는 거의 안 했습니다. 천중이 어머니가 집에 있는 날에만 대충 공부하는 흉내를 냈을 뿐입니다. 천중이 어머니가 전방에 가고 집에 없는 날에는 그 방이 과외 공부 방이 아니고 그냥 ‘만남의 광장’이었죠. 큼직한 재떨이도 갖춰 놓고 담배도 엄청나게 피워댔습니다.
우리 그룹이 거기서 만나면 그때그때 다르게 둘씩 셋씩 작당을 해서 밖으로 나가서 놀았습니다. 과외 선생 이 친구도 가끔 같이 당구 치러도 가고 작부가 있는 대폿집에도 가고 그랬습니다. 대신 과외비는 부모가 알고 있는 액수의 반만 내면 됐어요. 어떤 때는 안 내고 버티기도 했죠. 엉터리 과외 교사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천중이는 그럴듯한 가발이 있었어요. 어디서 동그란 색안경도 장만했어요. 비틀스의 존 레논을 방불케 하는 변장을 하고 밤이면 명동 어느 다방에서 DJ를 봤었죠. 고3인 주제에 대학생 애인도 수두룩했죠. 물론 대학생 애인은 천중이도 대학생인 줄만 알았죠. 그것도 s 대 외교학과 학생 말입니다. 천중이는 그걸 증명하려고 과외 선생을 자기가 DJ 하는 다방으로 불러내어 친구라고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과외 선생에게 여자 친구도 소개해 줬어요.
믿어집니까? 100퍼센트 사실입니다. 우리의 과외 선생이었던, 영어와 수학을 책임지기로 했던 외교학과 1학년 그 친구 이름은 지금도 기억하지만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일종의 의리 같은 게 아직도 작용하네요. 그 친구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한두 살 어린 고등학생들, 공부하기는 아예 틀려먹은 꼴통들 대여섯 명을 그 친구 혼자 감당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었죠. 차라리 같이 놀아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천중이네 집에서 과외 하는 친구 중에 셋이서 학교 담을 넘어서 거리에 나오기는 했는데 냄비라면 하나씩 사 먹고 나니 뭐 할 게 없더라고요. 그날 문리대에서 데모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루탄 가스로 눈이 매웠던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데모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어쨌든 개천을 끼고 걷다가 길을 건너서 서울대학교 병원 정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디 으슥한 데를 찾아서 담배나 한 대씩 필까 했던 건데 가다 보니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으슥한 데가 나왔어요.
보통 건물은 지붕이 있잖아요? 양철이든 슬레이트든 기와든 그런 걸로 지붕을 씌웠잖아요? 그런데 그 건물은 교실만 한 창고인데 지붕 한쪽은 철망이었어요. 일부러 비나 눈이 들어오게 만든 것이죠.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서 턱걸이해서 철망 밑으로 얼굴을 디밀고 내려다본 친구가 으아악 소리 지르며 땅에 털썩 떨어졌어요.
땅에 털썩 떨어진 친구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 해요. 성질 급한 천중이가 벽 끝을 잡고 턱걸이를 해서 지붕에 씌운 철망과 벽 사이의 공간으로 머리를 디밀었는데 역시 으아악! 하면서 땅에 털썩 떨어졌습니다.
“왜 그래?”
“해해해해골이야.”
“해골?”
“그래 해골, 해골이 많아.”
이것들이 미리 짜고 놀리나 싶어서 저도 턱걸이를 해서 그 공간에 머리를 디밀었죠. 우와, 뭔가 특별한 게 있기는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의사니까 자라면서 시체도 볼 만큼 본 저로서는 매우 놀랄 일이 아니지만 시체조차 본 적이 없는 두 녀석은 놀랄 만도 했습니다. 건물 한쪽 바닥에 해골만 남은 시체들이 한 줄로 주르르 누워 있었던 겁니다. 금방 벌떡 일어설 것처럼 팔뼈, 다리뼈가 멀쩡한 해골들이 흐흐흐 웃는 표정을 짓고 누워 있었던 겁니다.
그 창고 건물의 문은 철판으로 만든 문인데 굳건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그 안에 누워 있는 해골들은 의대생들의 실습용으로 일부러 모셔둔 해골들이지 싶었습니다. 우리가 빙빙 돌았던 그 건물 외벽 밑에서 발길에 차이던 것들도 자세히 보니 모두 사람의 뼈였습니다. 피막과 근육과 힘줄이 붙어 있어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손뼈, 사람의 발뼈, 그리고 사람의 머리뼈였습니다. 머리뼈는 해골의 윗부분을 톱으로 잘라낸 것인데 넓적한 표주박 같았습니다.
손뼈와 발뼈는 두 친구가 각각 나눠 가졌고, 바가지처럼 생긴 머리뼈는 제가 가졌습니다. 손뼈 발뼈는 과외 공부방의 옷걸이 못에 걸렸지만 머리뼈는 제 방 책상 위에 놓였습니다. <</span>계속>
장편소설_칸첸중가_032_엿장수_해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