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 중 가장 호전적인 민족인 켈트족들이 카르타고 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반기를 들었다. 이에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까지 완전히 정복하려 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지브롤터 해협과 연결되어 있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인 안달루시아와 세비야의 부족민들을 공략하여 반도의 남부와 남동부 해안 지역까지 점령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201년) 당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의 이동 경로,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러나 계속되는 켈트족과의 전투에서 하밀카르가 사망하자 아들인 한니발(B.C 247~B.C 183)이 그를 승계했고 사위인 하스드루발도 이베리아 반도의 공동 총독이 되었다. 하스드루발은 북쪽 대서양 해안가와 오늘날의 포르투갈 지역에 대한 팽창주의 정책을 계속 추구하면서도 원주민인 켈트족, 이베리아 인과의 융화 정책을 펼쳤다. 그는 풍부한 광산지대가 인접한 카르타헤나를 경제 및 군사적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전략적인 항구로 발전시켰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북쪽 오늘날 카스티야로 약간 존재했을 뿐이던 켈트족의 세력을 2년도 채 안되어 복속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켈트족을 한니발의 용병으로 고용하여 로마를 정벌할 때 그 용맹성을 인정하여 선봉부대에 세웠다. 특히 한니발이 오늘날 포르투갈을 정복하고 새로 건설한 항구는 페로(Pero)라 불렸으며, 오늘 날에도 포르투갈 최남단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하스드루발은 오늘날의 발렌시아를 함락시키고 이 지역을 카르타고 해군의 본거지로 삼아 단 시간 만에 지중해의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히스파니아의 풍부한 은광과 인구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위축된 카르타고의 전력과 경제력을 보강하고 로마에 대한 배상금을 완납하고도 남았다. 한니발의 가족들이 군사 지휘권과 함께 행정권까지 행사하며 사실상 히스파니아의 왕처럼 군림하는 상황에 본국인 카르타고에서는 한니발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그의 군세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때의 히스파니아를 카르타고와는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하고 하밀카르의 이름을 딴 바르카스(Barcas)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배상금 완납과 카르타고의 세력 회복을 이상하게 여긴 로마는 그 배경에 히스파니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바르카스 왕국을 억제하기보다 회유하여 카르타고와 대립을 통해 정치,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에 로마-카르타고-바르카스 사이의 미묘한 외교 관계가 한동안 이어지게 된다.
그러한 삼각 외교 관계가 매듭지어진 것은 B.C 228년에 하밀카르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그의 매부인 하스드루발에 의해서였다. 하스드루발은 B.C 226년에 로마와 에브로(Evro) 조약을 맺어 히스파니아의 북동부를 흐르는 에브로 강을 두 나라의 사실상 경계선으로 삼고, 다만 그 아래쪽에 있는 사군툼(Saguntum)은 로마의 세력권으로 인정해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에 합의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 동안 한니발은 10대의 나이로 히스파니아 정복 전쟁에 출전하여 전투와 전술을 익히는 한편, 스파르타 출신의 가정교사 소실로스(Sosilos)에게 호메로스(Homeros)에서 플라톤(Platon),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les)에서 알렉산드로스에 이르는 문학, 철학, 역사, 지리를 폭넓게 공부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이야기는 한니발의 영웅적인 심리가 부각될 만큼 영향력이 지대했다.
히스파니아에서 소떼들을 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고 하는 헤라클레스의 전설도 한니발에게 상당한 영웅심을 고취시키게 된다. 후일 한니발이 알프스의 험로를 넘은 것은 이러한 헤라클레스의 영향을 받아서인 것으로 분석된다.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하고 3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한니발에 대한 기존 카르타고 정치인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에 대한 중상모략과 선동, 자신의 재산과 위치, 명예가 한니발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홀로 강대국 로마와 싸우고 있는 한니발에게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한니발의 인기가 높아지면 자신들의 지위를 잃을까 걱정해서였다. 진정한 인재를 품지 못한 카르타고 정치인들의 무능, 그로 인한 영웅 죽이기는 거듭된 패전으로 이어졌고 그 고통은 모두 카르타고 시민이 짊어져야 했다. 이것은 비단 카르타고 뿐 아니라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어느 정치인들과 닮지 않았던가?